하이 스피드와 광대한 음장감의 쾌락, 에벤 스피커
필자가 자주 시청에 동원하는 CD 중에 안네 소피 무터가 연주한 <카르멘 판타지>라는 곡이 있다. 워낙 유명해서 웬만한 오디오 숍이나 수입상의 시청실에 모두 비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CD와 SACD 포맷으로 각각 나와 있어서 유니버설 플레이어의 성격이나 퀄리티를 체크할 때 일종의 AB 테스트용으로 더없이 유용한 소프트이기도 하다. 이번에 건 것은 이른바 레드북 CD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역이 20kHz 부근에서 자연스럽게 감쇄되어 있다. 만일 이것을 SACD로 듣는다면 좀 더 고역이 확장된 느낌을 주는데, 그 차이를 판별하는 기준은 역시 무터가 하이 톤을 연주할 때의 에너지와 초고역 부분 등이다. 특히 연달아 고음을 내면서 빠르게 보잉할 때의 쾌감이 대단한데, 대부분의 시스템은 여기서 모기 소리처럼 앵앵대기 일쑤다. 고역의 끝 부분이 희미하게 들리거나 일정 대역 이상부터 에너지가 확 감소해서 갑자기 음량이 작아지고, 선이 가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일정한 에너지와 양감을 갖고 끝가지 밀어부치는 소리를 듣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덴마크에서 날아온 이 낯선 스피커는 레드북 CD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알아서 고역 정보를 추가한 듯 전혀 고역을
죽이지 않고 싱싱하게 토해낸다. 일직선으로 빨랫줄처럼 외야에서 홈으로 송구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혹시나 싶어 다시 CD를 꺼내들었지만
분명 일반 CD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대체 이 에벤이라는 회사는 정체가 무엇이며, 어떤 기술력으로 무장했단 말인가?
요즘 스피커의 메카로 떠오르는 곳이 덴마크다. 스카닝이라는 천재 박사가 출현하면서 차례로 다인오디오, 스캔스픽, 오디오 테크놀로지
등을 설립한 탓도 있지만, 인클로저의 제작이라든지 크로스오버 네트워크의 설계 등에서 솜씨 좋은 장인들과 브레인들이 결집, 하이
엔드 스피커를 만드는 데 가장 용이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알게 모르게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도 밑바탕이 된
바, 인구 500만도 되지 않은 이 조그마한 동화의 나라가 신데렐라처럼 스피커 산업의 선두 주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주목받는 피크 컨설트나 에벤과 같은 신생 브랜드가 계속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만일 필자가 스피커를 만든다고 하면 이런 덴마크의 인프라를 이용해서 제작한 후, 벤츠 공장에다 도색을 맡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에벤은 필자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벤츠에 도장을 맡기는 베리티 오디오의 제품들과 똑같은 도장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할 X3란 모델은, 에벤에서 내놓은 엑스-스트림(X-Stream) 시리즈의 두 번째 클래스에 해당한다. 맨 위로는 X4가 있고, 그 밑으로 X2, X 센트릭, X 베이비 등이 있다. 필자는 X 센트릭에 특히 매료되어 한동안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에벤의 얼굴인 플래너 타입의 트위터가 장착된 가운데 미드베이스를 담당하는 두 발의 유닛이 상하로 배치된, 일종의 가상 동축형 스타일의 북셀프인데, 저역도 탄탄할 뿐 아니라 스피드도 빠르고 분해력도 뛰어나며 무엇보다 사이즈를 잊게 하는 광대한 스테레오 이미지에 탄복한 적이 있다. 특히 일본의 바쿤에서 만든 인티 앰프와 발군의 매칭을 보인 바, 실제 그 앰프의 디자이너 역시 우연히 이 소리를 듣고 에벤에 관심을 피력했을 정도다. 이번에 그 윗모델인 X3를 본격적으로 시청하게 되었으므로 이래저래 호기심이 간다.
우선 에벤 제품의 핵심인 플래너 타입의 트위터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아마 언뜻 보면 리본 타입의 트위터라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리본 트위터는 대역폭이 넓기는 하지만 음에 에너지가 없고, 에지도 부드러워 대개 클래식의 현에나 적합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필자 역시 인피니티나 피에가 등의 스피커를 들으며 그런 세간의 평에 동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회사의 트위터는 좀 다르다. 말하자면 리본 트위터의 장점에다 돔 타입 유닛의 에너지를 섞은 음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해 SACD와 같은 포맷에 충분히 대응하는 광대역을 보장하면서도 음 하나하나에 에너지가 충만하고, 농후한 묘사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에벤 특유의 비법이 개재되어 있다. 원래 에벤이 만들어지는 레이드호(Raidho)사를 설립한 창업자 겸 디자이너 미카엘 보에레센(Michael Boerresen)은, 트위터의 경우 돔 타입보다는 플래너 타입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돔 진동판 무게의 1/10밖에 되지 않으므로 리스폰스가 뛰어나고, 광대역으로 설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 유닛의 다이어프램을 일종의 밀봉 형태로 제작해서 음이 새는 것을 방지했을 뿐 아니라 여기에 보이스 코일을 에칭해서 덧붙인 다음 네오디뮴 자석을 첨가, 자연스럽게 자장을 형성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전 표면이 극히 작은 관성 질량으로 움직이게 되면서 3.5kHz~50kHz의 주파수 대역을 담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리본 트위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특주의 다이내믹 드라이버를 결합시켜 에벤만의 독자적인 플래너 타입의 트위터를 완성시킨 것이다. 아포지같이 리본을 쓴 스피커들이 이런 다이내믹 드라이버가 없이 얇은 판으로 제작된 것을 상기하면 에벤의 발상이 얼른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트위터가 우수해도 이것만으로 음악을 재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커플링되는 중저역은 전통적인 콘 타입을 사용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렇게 기민하고 하이 스피드한 트위터를 이런 콘 유닛이 어떻게 쫓아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에벤은
스카닝 유닛으로 유명한 오디오 테크놀로지사와 손잡고 개발에 착수한 바, 이 회사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새로운 유닛을 완성하게
된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콘 타입의 유닛이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한편 에벤은 크로스오버 네트워크에도 대대적인 손질을 가했는데, 워낙 유닛이 우수하고 그 응답 특성이 빠른 만큼, 여기서도 일체의
지체 현상이나 잡신호 유입을 방지하고자 했다. 최소한의 소자만으로 꾸미되 그 부품은 세계 최고를 쓰자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 결과 에벤의 플래그십 모델인 X4의 경우 우퍼 유닛만 4개인데도 불구하고 네트워크에는 고작 8개의 소자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젠센의 플랫 와이어 인덕터와 수공품인 포일 커패시터를 사용할 정도로 부품 선정에 만전을 기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점검할 것은 인클로저. 앞서 벤츠의 도장을 실시했을 수도 있다는 예상은 했는데, 뛰어난 마무리도 마무리지만, 절묘한 유닛 배치와 구조 역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프론트 배플은 60mm로 적절한 두께이고, 맨 윗부분은 플래너 트위터와 한 개의 155mm 미드우퍼, 거기에 저역을 보강하기 위해 155mm 구경의 우퍼 네 발을 첨가한 형식이다. 그 결과 저역은 30Hz까지 내려가고 고역은 50KHz까지 뻗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3발의 우퍼를 어떻게 컨트롤하며, 플래너 타입의 트위터와 어떤 식으로 자연스럽게 융화되도록 하는가 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뒤편의 터미널이 싱글와이어링 방식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네트워크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또 덕트도 밑에 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역을 구사하는 데 용이한 점도 있다. 그러므로 외관만 보고 세 발의 우퍼가 주는 위압감에 벗어남직도 하다. 또 개인적으로는 우퍼의 양만 생각한다면 구경이 큰 것으로 한 발이 낫다고 보지만, 이렇게 작은 구경으로 분산해서 저역을 처리했을 경우 스피드 면에서 매우 유리하다고 본다. 본 스피커가 가장 첨단의 소프트에 대응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는 이상, 결국 이런 설계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본다. 게다가 이렇게 슬림한 톨보이 스타일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일종의 정재파나 2차 반사파를 피하기 위한 조치로 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 스피커는 매칭되는 앰프나 소스의 성격 또 케이블류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를 들어 에지의 세트를 걸었을 때엔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빨라 그 광대한 주파수 대역과 더불어 엄청난 임장감으로 사운드 속에 포위된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라면 지나친 과장일까? 반대로 콘래드 존슨의 세트를 걸면, 지극히 평온하고 자연스런 음이 된다. 시속 300Km를
넘어서는 스포츠 카가 130Km 정도로 얌전하게 달리는 세단이 된 듯하다. 나빴던 것은 A급 설계의 앰프나 다소 반응이 느린
진공관 계열. 누가 뒤에서 옷자락을 움켜쥐고 당기는 듯 음이 질질 끌리는 듯한 인상이며, 특유의 싱싱함이나 오디오적 쾌감이 매우
반감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전통적인 하이엔드 브랜드와도 상성이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럴 바엔 역시 하이 스피드를 표방하는 골드문트
계열과 커플링할 것을 권한다.
아무튼 너무나 반응이 빠르고 예민한 만큼, 어떤 면에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라 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노련한 오디오파일의
손길을 탄다면 세상에 없는 명마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스피커라 할 만하다. 평판형 계열의 광대한 스테레오 이미지와
투명함에 더한 적절한 양감이 이 시대 스피커의 한 모범이라 한다면, 분명 에벤은 그 이상에 매우 가깝게 제작된 스피커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