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오디오의 숨은 저력, 오디오밸브
오디오 밸브라는 회사는 이상하게도 국내에 중국 메이커로 알려져 있다. 아마 대만에 일찍 상륙해 호평을 받은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확히 이야기하면 순수 독일 회사이고, 설계 및 제조 모두 독일에서 이뤄진다. 정확한 소재지는 칼레탈(Kalletal)이라는 인구 3만의 소도시다. 헬무트와 하이케 베커 부부가 주재자인데, 남편은 설계 및 제조 공정을 담당하고, 아내는 영업을 책임지는 전형적인 가내 수공업적인 메이커다. 직원이라야 실제 제조를 담당하는 직공 몇 명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얼마 전 수입사측에서 안전 인증을 위해 헬무트씨에게 설계도를 의뢰했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변변한 설계도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게 모든 도면은 그의 머릿속에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입력되어 있고, 직공들 역시 자기의 파트를 오랫동안 담당해와서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는 한 정밀기계처럼 오차없이 작업하니까 말이다. 결국 거듭된 요청 끝에 헬무트씨가 머릿속에 그려둔 도면을
실제 그려서 보냈다고 하니, 그야말로 장인이라는 말밖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개인적으로 하이 엔드 오디오의 제품들은 이런 소규모 공방이 어울린다고 본다. 설계나 도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튜닝. 그야말로 원하는 음에 도달하기 위해 저항이며 콘덴서 혹은 출력 소자 등을 꼼꼼하게 바꿔보고, 이리저리 매칭시키면서 음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소용되는 시간과 비용을 따져보면, 결코 대 메이커가 달려들 분야는 아닌 것이다. 일본의 거대 음향
회사들의 음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것은, 어떤 면에서 하이 엔드 오디오의 속성과 상반되는 체질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만 디지털 관련 분야는 어느 정도 몸집이 필요하다. 계측 장비가 우선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첨단 하이 테크 관련 지식도 필요하다.
따라서 디지털 관련 솔루션을 많이 갖고 있는 회사와의 연합도 염두에 둬야 한다. 개인적으로, 디지털 관련은 덩치가 있는 편이
좋고, 스피커며 앰프 등 전통적인 분야는 소규모 공방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디오 밸브의 제품군은 그리 많지 않다. 국내에 수입된 것을 보면 에클립스(Eklipse)라는 프리와 몇
개의 파워 앰프군이 전부다. 그 파워도 보면 발더 시리즈와 그 하위 라인인 챌린저 시리즈 정도다. 발더는 300이 기함격이고,
그 밑에 70이 있으며 챌린저 시리즈는 400과 180, 115 세 기종이 있을 뿐이다. 그 외 포노 EQ로 서닐라(Sunila)라는
모델이 달랑 하나만 있을 뿐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을 만큼 간략하고, 그 때문에 더욱 신뢰가 가기도 한다. 철저한 장인 정신으로 무장한 소수 정예의 공방이 빚어내는
음의 연금술은, 결코 사이즈나 제품 가짓수로 판단할 수 없는 하이 퀄리티와 품격을 갖고 있으니까.
발더 300은 동사로서는 파워 앰프를 대표하는 모델이다. 하위 기종인 챌린저 시리즈와 가장 차별되는 것은, 발더 시리즈엔 출력관으로
3극관이, 챌린저 시리즈엔 5극관이 각각 쓰인다는 것이다. 특히 발더 시리즈에 쓰이는 출력관이 6AS7G(혹은 6H13C)인데
반해, 챌린저 시리즈엔 EL34, KT88, 6550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발더 시리즈가 설계자의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면, 챌린저 시리즈는 소비자 위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발더 300은, 오디오 밸브사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대표 기종이 아닐까 한다.
본기는 모노 블록 형태로 되어 있는데, 우선 그 자태부터 심상치 않다. 색상은 블랙과 실버 두 가지고, 그 점은 에클립스도 마찬가지다.
이전에 시청한 것은 블랙 모델이어서 이번에 만난 실버는 약간 생소하기는 하다. 여기에 상판에 가득 진공관이 나와 있는 데다가,
위에서 내려보면 각 출력관 주위로 보호나 정류를 위한 별도의 저항이며 콘덴서가 가득 차 있어 현기증이 날 정도다. 혹시 싶어
본체를 들어봤더니 꼼짝하지 않는다. 무게가 무려 55Kg. 성인 남자 둘이서 낑낑대야 겨우 움직일 만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출력관만 해도 10개나 들어가, 채널당 8오옴에 240W를 내니 이 정도의 물량 투입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외관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카리스마가 대단한 것이다.
본기의 특징은 무엇일까 ? 우선 3극관을 출력관으로 사용하면서 대출력을 뽑아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아마 3극관 싱글 애호가들이라면,
3극관만이 갖고 있는 투명함과 순수함에 매료되었을 터인데, 다만 문제는 스피커 구동력이다. 8W 혹은 3W 정도의 출력으로 울릴
수 있는 스피커는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푸시풀로 구동하자니 출력은 높아지지만, 3극관 특유의 맛이 희석되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240W라고 하면, 무슨 정신병자로 취급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음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대출력 특유의 여유로움과 3극관 특유의 밀도, 순수성 등이 합치되어 그 어떤 스피커를
걸어도 청량감이 대단할 뿐 아니라, 구동력에 있어서도 별 불만이 없다. 록이나 재즈 등의 그루비함이나 어시(어그레시브?)한 느낌도
손상하지 않으면서, 3극관의 미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로 혀를 내두를 만한 솜씨라 하겠다. 그런 면에서, 앞서 소개한 소규모
공방이 갖는 메리트가 철저히 반영된 셈이다.
참고로 6H13C는 러시아에서 개발한 쌍3극관이다. 미국에서 개발한 6080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당초 출력관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정전압관으로 생산된 만큼 내부 저항이 낮아 주로 OTL 방식에 쓰인 바 있다. 그 외 초단관이나 정류관쪽에 12AU7(2개),
12AX7(1개), 6N6P(1개) 등이 동원되고 있다.
이렇게 관이 많아지면 당연히 전기적 안정성이나 진공관 보호 회로가 필수적이 된다. 요는 이런 장치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음질적
열화를 최대한 피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 면에서 오디오 밸브의 기술력이 빛을 발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제품을 보면 상단에
빼곡이 진공관들이 꽂혀 있고, 케이스 안에는 각종 전원 및 출력 트랜스 등이 숨어 있다. 그런데 이 두 파트 중간에 ABR이라는
회로가 담겨진 기판이 끼어 있다. 이 ABR은 “Automatic Bias Regulator"의 약어로, 출력관의 바이어스를
자동으로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공관 파워 앰프에서 얼굴이라고 하면 출력관이다. 그 설계 내용을 보면, 해당 출력관의 성능이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또 보호하는 장치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만큼 출력관이 중요한데,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 출력관을 출하 당시에 설정된 내용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출력관은 일정 시간이 되면 열화되기 마련이고, 당연히 바이어스가 바뀌게 된다. 별다른 계측 장비나 개념이 없는 일반 애호가들로서는 서서히 소리가 변화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냥 듣다가 결국 뻑 하고 사망한 다음에야 관을 바꾸게 된다.
물론 싱글 엔디드 설계처럼 관이 두 개 정도면 계측기를 빌어다가 조정도 하고, 각 관의 열화 정도를 체크할 수도 있는데, 이처럼 채널당 10개씩이나 출력관이 투입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노련한 유저들조처 어쩔 도리없이 전문가에게 맡겨야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기는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바이어스를 조절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여기에 또 하나의 기능이 추가되는 바, 바로 진공관 사망 신고다. 다시 말해, 10개의 진공관의 수명이 모두 다르고, 그에
따라 한 두 개가 사망해버리면, 모두 교체하는 것이 여태까지의 관례였다. 10개의 관, 게다가 2채널이니 만큼 20개의 관이
모두 일정한 수준으로 고른 상태가 되어야 사용상 안정된 동작과 음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동
바이어스 조정이기 때문에 20개의 관이 각각이어도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동작이 보장된다. 그러므로 한 두 개가 사망해도, 해당
관만 교체해주면 된다. 여기서 사망 신고라 하면, 특정 관이 나가버릴 경우, 그 주변에 배치된 4개의 LED에서 붉은 빛이 반짝거린다.
그 신호를 감지하면 교체만 해주면 된다. 그럼 앰프의 기능은 원상 복귀된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편한 만큼, 진공관 파워 앰프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이 앞선 애호가들에겐 낭보라 하겠다.
시청에 동원된 기기는 다음과 같다. CDP는 린데만 820, 프리앰프에는 오디오 리서치의 레퍼런스 3 그리고 스피커는 록포트의
메락2+세리탄2다. 이 스피커는 제대로 구동될 경우, 스케일도 크고, 스카닝 특유의 질긴 맛을 만끽할 수 있지만, 어지간한 파워
갖고는 꼼짝도 하지 않는 괴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즐겁게 노래하고 있다. 3극관 특유의 투명함과 담백함이 가미되어, 여태껏
들을 수 없었던 청순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 이 종 학
우선 안네 조피 무터의 <카르멘 판타지>를 걸어본다. 바이올린의 결이 곱고, 미세한 손동작이 낱낱이 포착된다. 말
그대로 천의무봉, 일체 막힘이 없이 음이 연결되는 대목이 기막히다. 특히, 고역 부분의 아슬아슬한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포착되어 대형기의 매력을 만끽하게 된다. 거기에 진공관 특유의 배음이 깔려, 음악에 사실감을 더한다.
게르기에프 지휘의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정말로 광대한 음장이 펼쳐진 가운데, 각 악기의 서로 다른 음색과 질감이
뚜렷이 부각된다. 몇 개의 레이어로 구분된 전체 악단의 배치가 일목요연해서, 눈앞에 단원 한 명 한 명이 정렬한 장면이 보이는
느낌이다. 이들이 총주로 몰아칠 때의 박력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요즘 자주 듣는 마델라인 페이루의
사실 3극관과 대출력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컨셉이긴 하다. 거기에 자동 바이어스 조정장치까지 개재해, 이래저래 덩치가 크고,
부품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음은 매우 담백하고, 디테일이 분명하며, 저역의 핸들링도 일품이다. 드디어
해낸 것이다. 독일의 한 소도시에 사는 장인의 손길에 의해, 우리는 진공관 파워 앰프의 새로운 경지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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