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1939년, 재팬 일렉트릭 레코더스 매뉴팩처링(Japan Electric Recorders Manufacturing)의 영업용 오디오 부문에 소속된 일군의 엔지니어들이 독립한다. 원래 이 업체는 NHK를 비롯, 여러 방송국에 턴테이블과 카트리지, 테이프 레코더 등을 개발, 납품하고 있었다. 심지어 디스크 레코더와 디스크 커팅 머신 등을 개발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던 터라, 이들의 장래는 결코 어둡지 않았다. 결국 덴키 온쿄(Denky Onkyo)에 합병, 1947년 덴온(Den-on)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하며 본격적인 신화가 시작된다.

덴-온이 유명해진 데에는 1951년, 세계 최초로 MC 카트리지를 발명하면서부터다. 이것은 7년 후, 스테레오 버전으로 업 그레이드되면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전문가용 테이프 레코더, 오픈 릴 테잎 기기 등을 생산하면서 음향 전문 회사로 발돋움한 덴-온은, 최근 데논이라고 이름을 바꿔 음향쪽만 아니라 영상쪽에서도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실제 디지털 시대의 장을 연 회사중의 하나가 데논이다. 이미 1980년에 CD가 나오기도 전에 디지털 녹음을 행한 바 있으며, 83년 무렵에는 민생용 CD 플레이어를 개발해서 적극적으로 보급한 업체이기도 하다. 또 자사 브랜드의 음반 사업까지 병행했으니, 초창기 디지털의 발전을 논할 때 결코 데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기술력을 기반으로, 현재에도 계속 첨단의 기술을 선도하는 메이커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데논은 아마 A1XVA라는 DVD 플레이어로 친숙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영상 신호도 1080P로 업샘플링해서 HDMI로 전송해주는 이 기기는, DVD에 아직도 이렇게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는가 놀랄 정도의 화질을 보여줄 뿐 아니라, 블루 레이며 HD-DVD가 제대로 정착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키고 있다. 그래서 한다 하는 영상 매니아치고, 이 기기를 소유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덕분에 데논의 기술력도 새삼 인정받는 추세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원래 데논이 음향 전문 메이커인 만큼, 이쪽 분양의 기기 역시 놀라운 완성도와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A1XVA의 경우처럼 CD라는 매체가 제대로 작동할 경우의 음질 역시 엄청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자사 독자의 기술력을 배양했으니, 그게 바로 "AL 24 Processing"이란 테크놀로지다. 이의 배경은 멀리 1972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데논이 추구했던 것은 PCM 레코더 기술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온 16비트/44.1KHz의 경우, 일정한 신호 손실과 왜곡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나온 것이 ALPHA라는 기술이다. “Adaptive Line Pattern Harmonized Algorithm)의 약어로, 디지털 오디오에 있는 양자화 노이즈 문제의 해결을 위해 20비트로 오버 샘플링한 다음, 출력시에는 16비트로 내는 것이 골자다. 이런 개발은 나중에 24비트로 진일보하는 바, 그게 바로 AL 24 Processing이 된 것이다.

데논이 제시하는 도표를 보면, 하나의 신호를 무려 3개의 그룹으로 나눠 알고리즘을 실시한 뒤 출력을 내보는데, 이를 위한 고도의 연산 제어 장치가 설정되어 있다. 참고로 DVD 오디오의 192KHz 신호를 만들기 위해 이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AL 24 Processing Plus도 있다. 아무튼 오랜 기간 동안 아날로그와 디지털 오디오를 통해 축적한 기술을 기반으로 차근차근 현재의 기술을 업 그레이드하는 한편, 차세대 미디어의 개발에도 열을 올리는 데논의 연구실은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는 날이 없이 풀 가동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90년대 초, 필자가 일본의 스윙 저널이라는 잡지사를 방문했을 때, 시청실에 비치된 CD 플레이어가 바로 데논의 DP-S1과 DA-S1 콤비였다. 각각 90만엔 전후의 엄청난 고가였는데, 웨스트레이크 BBSM 15를 중심으로 한, 파워풀하고 약동적인 사운드의 첨병 노릇을 톡톡히 한 바 있다. 비록 우리한테까지 소개되지 못한 감은 있지만, 음향 전문 메이커로서 데논의 위상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또 이 당시, 엄청난 고가의 분리형 앰프도 생산한 만큼, 이런 몬스터 클래스의 제품을 만든 노우 하우가 이번에 시청할 기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번 시청의 주인공은 PMA-SA1 인티 앰프와 DCD-SA1 CD 플레이어다. 더 이상 분리형을 생산하지 않는 데논인지라, 이 두 제품이 실질적인 플래그쉽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여러 박스로 나눠진 메머드급 덩치를 생각하는 분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전혀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간 축적되어 온 신기술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음질 면에서는 오히려 나은 점도 있다. 특히, 일본제 오디오에 강한 거부감이나 편견을 가진 분들에게 이 데논 세트가 선사하는 온후하면서 섬세한 음은 나름대로 크게 어필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인티 앰프 PMA-SA1을 보면, 정 중앙에 위치한 볼륨 노브가 내뿜는 카리스마가 대단함을 느끼게 된다. 역사상 이렇게 볼륨 노브를 큼지막하게 제작한 회사는 없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 위용이 엄청난다. 실제 손으로 조작해보면 감촉도 좋고, 매우 섬세하게 반응한다. 프리단에서 볼륨단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정도의 물량 투입이라면, 일단 믿어도 좋을 듯 싶다.

크기는 좀 작지만, 오른편에 박힌 셀렉터 노브 역시 존재감이 강하다. 감촉도 훌륭하다. 이 두 개의 노브가 전면 패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런 무뚝뚝한 디자인이 일견 묘한 기능미도 표출한다. 고전적이면서도 과감한 레이 아웃이다. 한편 뒷면을 보면, 볼륨 노브만큼 충격적이면서 믿음직스러운 것이 바로 스피커 단자다. 웬만한 어른의 엄지손가락만큼 크고, 두툼하다. 굵직한 스피커 케이블을 마음놓고 걸 수 있는 사이즈다. 그 외 각종 밸런스 및 언밸런스 단자의 풍부한 제공도 만족스럽고, 바닥면에 접합된 네 개의 스파이크 역시 튼실해서 믿음이 간다. 외관만 봐도 합격점을 줄 만하다. 그러나 두 부분으로 나뉜 상단의 샤시를 열면, 그 호화스런 내용물에 입이 딱 벌어진다. 고집스런 정공법이면서, 그 설계며 부품 배치가 매우 합리적이다. 그냥 무작정 부품을 바른 것이 아니라, 투자할 때와 건너뛸 때를 정확하게 알고 배분한 설계라 하겠다.

우선 뒷부분에 위치한 커다란 전원 트랜스와 두 개의 전해 콘덴서는, 한 500W쯤 출력을 내는 파워 앰프에나 어울릴 법한 사이즈다. 고작 4오옴에 100W를 내는 본 기의 출력을 훨씬 넘어서는 스피커 구동력은, 결국 이런 견실한 물량 투입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 출력을 적당히 하는 대신 이런 부분에 투자를 하면 음이 퓨어하면서도 힘이 딸리지 않는다. 적절하게 저역을 통제하면서도 청량감 넘치는 고역을 맛볼 수 있다. 무작정 200W, 300W로 늘린 앰프가 나는 소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내부의 신호 전달 과정을 보면 완전한 밸런스드 앰프 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본 기의 실력을 최대한 뽑아내려면 밸런스 단자의 활용은 필수라 하겠다. 역시 총 4개의 DAC 칩을 동원해 밸런스 구성으로 출력단을 꾸민 DCD-SA1과의 매칭을 감안한다면 더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DCD-SA1의 경우도, 인티 앰프처럼 튼실한 샤시에 안정적인 회로 구성으로 신뢰를 주는데, 특히 AL 24 Processing과 밸런스 출력단이라는, 음질 위주의 설계가 실제 음에 크게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제품의 또 다른 가치는 그 안정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렉서스나 인피니티와 같은 승용차처럼, 이 제품들은 기능적인 편의성 외에 전기적, 기계적 안정성이 대단하다. 10년을 써도 고장 한 번 나지 않는 것이 이런 제품이다. 간혹 하이 엔드 제품 중에 트랜스가 운다거나 트레이의 작동이 부실한 경우를 왕왕 볼 수 있는데, 이런 제품에선 절대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없다. 아무리 음질이 중요하다지만, 그런 음을 담아내는 용기 역시 튼튼해야 한다.

본 데논 세트의 음질을 테스트하기 위해 동원한 스피커는 역시 필자가 시청에 자주 사용하는 하이페리온의 HPS-968이다. 원래 이 스피커는 강한 출력으로 구동하는 것보다 퓨어하면서 퀄리티가 높은 파워 앰프가 제격이다. 이 점에서 본 세트가 내는 음은 968의 새로운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생동감이 넘치면서, 온후하고, 윤기가 있으며, 풍부하다. 진공관의 부드러움과 적당한 온기에 하이 엔드적인 해상력, 사운드 스테이지, 밸런스 등이 엮여있다고 할까 ?

우선 에바 캐시디의 를 듣는다. 초반부에 어쿠스틱 기타 하나로 반주를 하면서 에바의 음성을 충분히 살린 음향이 전면을 지배하는데, 그 자연스런 울림이 매우 좋다. 특히, 적당한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음성이 주는 호소력이 대단해, 듣고 있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다. 중간에 일렉트릭 기타의 애드립이 잠시 나오는데, 약간의 필터를 건 기타의 음이 매우 첨예하고, 명징하다. 기본적인 투명도에 적당한 온기가 있어 보컬 재생에 매우 능한 조합이라 하겠다.

이어서 FIM 레코드가 내놓은 수퍼 사운드 3집 중 을 듣는다. 처음 쾅 하며 둔중한 저음과 함께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움직임이 기세 좋게 돌진하면서, 일체의 얽힘이 없이 포효하는 브라스 군단이나 중간에 음에 맞춰 두드려대는 팀파니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다만, 약간 스피드가 느린 감은 있는데, 이는 듣는 이의 취향에 따라 평이 다를 것이다.

SACD로 들어보는 반 클라이번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저 유명한 현악단의 애잔한 멜로디를 뒤로 하고 유려하게 펼쳐지는 피아노의 프레이징은 화려하면서 기품이 넘친다. 은쟁반에 옥 구슬이 굴러간다는 표현이 이럴 때 등장하는 것일까 ?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스피커 사이에 확 펼쳐지면서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절정을 향하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어울림은, 정확하게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빈틈이 없다. 단순히 음향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품위와 멋을 더하는 음 조성이다.

마지막으로 레드 제플린의 를 듣는다. 오른쪽 채널에서 드럼 세트가 약동하고, 왼쪽에서 현란한 기타 애드립이 펼쳐지며, 중앙에 우뚝 선 플랜트의 포효하는 보컬까지, 화끈 달아오른 한 판 세션이 풍부하게 전개된다. 특히, 바닥을 연달아 두드리는 킥 드럼의 타격이 명확하게 포착되어, 오랫동안 들어온 곡인데도 느낌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위 아래로 레인지가 훨씬 넓고, 다이내믹하며, 막힘이 없다. 그러면서 귀를 쏘는 자극 성분이나 피곤함이 없으니, 냉정과 열정 사이를 절묘하게 부유하는 음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음을 오랫동안 다뤄온 메이커만이 낼 수 있는 관록이 묻어있는 것이다. 이토록 기능성과 음질을 절묘하게 갖췄다면, 오랜 기간 사용해도 별 싫증을 내지 않고 충실하게 음악 감상을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