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높은 천장에 튼실한 바닥 그리고 20평쯤 되는 공간.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해서 아무리 볼륨을 울려도 저음이 벙벙대거나 이웃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다. 이런 곳에 어울릴 스피커라면 당연히 대형이어야 한다. 말러나 브루크너를 쾅쾅 틀어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재생음의 극한을 추구한 쾌락을 맛보고 싶다. 아마 어떤 오디오 애호가를 붙잡고 물어봐도 이 두 가지 로망을 꿈꾸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바로 넓은 시청실과 대형 스피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필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지 못했다. 아마 이 글을 읽은 많은 분들도 이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오디오 애호가들은 이상한 기질이 있어서, 비록 두 가지 로망은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 가지쯤은 이루고 싶어한다. 아무래도 전용 시청실을 마련하는 것은 워낙 단위가 크기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지만, 그래도 대형 스피커만은 들이고 싶어한다. 언젠가는 넓은 시청실을 얻겠지 하는 희망으로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

일본에 한 서 너 평쯤 되는 원 룸에 사는 분이 있었는데, 너무나 탄노이가 갖고 싶었다. 그것도 대형 기종으로. 그래서 일단 구입하고 말았는데, 그야말로 스피커 속에 파묻히다시피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과연 잠은 어떻게 잔단 말인가. 궁리 끝에 그는 스피커 위에다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잤다고 한다. 얼마나 탄노이가 갖고 싶었으면, 아예 애인을 껴안듯 잠자리까지 함께 했을까 ? 그러나 웬만한 오디오 애호가라면 수긍할 것이다. 이게 바로 오디오의 로망이니까.

필자도 대형 스피커가 탐난다. 여유만 되면 일단 들이고 싶다. 전용 시청실이니, 에어 볼륨이니 하는 말은 일단 접어두자.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대형이 아니면 안 되는 음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볼륨을 크게 틀 수 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요즘의 대형 기종들은 과거 탄노이나 알텍처럼 혼 스타일 일변도가 아니고, 음량을 크게 올려야만 제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재차 확인했지만, 전체적인 음 조성은 잘 만들어진 소형 스피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코 음상이 커서 귀를 자극하거나, 바닥을 쿵쾅 울리는 저음으로 혼을 빼는 스타일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음을 듣고 나면, 괜히 용기가 충만해진다. 아파트 값이 천장부지로 치솟은 지금, 어차피 평수를 늘릴 순 없지만 음이 이렇다면 대형기는 탐낼 만하다. 그러니 앞으로 전개될 대형기의 시청평을 결코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읽지 말아줬으면 한다. 잘만 운용하면 10평 이하의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운용할 수 있는 대형기가 바로 요즘의 추세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번 시청은 20평 정도 하는 하이파이 클럽의 큰 시청실에서 이뤄졌다. 중형 스피커 특집이 12평 정도의 작은 시청실에 이뤄진 것과 비교할 때 아무래도 공간에 여유가 있고, 에어 볼륨도 엄청 커졌다. 하지만 작은 시청실에서 행사를 치렀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만일 30~40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분들이라면 거실에 갖다 놔도 얼마든지 이런 기종들을 콘트롤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번 시청에 동원된 앰프는 그리폰의 미라지 프리와 안틸레온 시그너처 파워이고, CDP는 심 오디오의 문이다.

가슴이 뛴다. 평소 동경해 왔던 하이엔드 스피커 메이커들, 특히 그들이 자신 있게 내세우는 간판급 기기들이 한 자리에서 자웅을 겨루는 비교 시청이라니... 브랜드 최고의 기종들이니만큼 스피커마다 개발자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음향의 이상이 타협 없이 구현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실효를 확인하고 싶고, 최고 수준의 공업 디자인도 만끽하고 싶다. 무엇보다 그들이 추구하는 소리와 내가 추구하는 소리가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면에서 다른지 확인하고 싶다.

여러 종을 한꺼번에 비교하는 과정에서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의 동향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흥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하이엔드 대형 스피커 비교 시청이 그토록 가슴을 들뜨게 하는 반면, 방법론적인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진다. 과연 어떤 식으로 비교를 할 것인가?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양산 시스템은 오디오 시장에서 많이 팔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보통의 리스닝 환경에서 보통의 앰프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음질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엔트리 레벨에서는 장점일 수도 있지만 스피커가 민감하지 않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레벨의 스피커들을 모아 놓고 동일한 조건 하에서 들으면 개개의 특성이 어렵지 않게 감지되며 이 성질은 앰프나 환경이 바뀌어도 크게 변하지 않으므로 비교 시청이 쉽다. 하지만 레퍼런스 급의 스피커들은 다르다. 설계자가 추구하는 개성적인 음향미가 아주 엄격하게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어울리는 기기를 찾기가 어려울뿐더러, 스피커 자체가 민감하므로 리스닝 룸이나 사소한 액세서리 하나에도 영 딴판의 스피커가 되어 버린다.

이런 스피커들은 각양각색의 소비자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설계자의 음향 미학에 공감할 수 있는 소비자들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진다는 도도함이 있다. 하이엔드 오디오는 바늘 끝과 같이 엄격하며 냉정한 세계. 하지만 최소한 레퍼런스 급의 하이엔드 스피커라면 이 ‘바늘 끝'에 올려 둔 상태에서 비교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교할 스피커마다 매칭 기기들과 케이블, 나아가 리스닝 룸을 바꾸며 ‘바늘 끝'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물론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 ‘바늘 끝'이 최선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없다.

결국 시스템을 정해 두고 스피커만 바꾸어 매는 기존의 비교 시청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이번에 비교할 스피커들은 소너스 파베르 스트라디바리 오마쥬, 베리티 오디오의 로엔그린, 이글스턴 웤스 사보이, 이소폰의 아라바 그리고 그리폰의 트라이던트. 가히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제품들이다. CDP는 심 오디오 문, 앰프는 그리폰 미라지와 안틸레온 시그너처 세트. 아르젠토 세레니티 마스터 레퍼런스 스피커 케이블까지.

가격이 제일 저렴한 것이 처음 무대에 올랐는데, 그것은 소너스 파베르 스트라디바리 오마쥬! 지난 번 미들급 스피커 다섯 종의 비교 시청 때는 내 샵을 비워 두고 하루 종일 남의 샵에 와서 놀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며 과연 이것이 옳은 짓인가 고민했었는데, 이 정도의 초호화 비교 시청이라면 늘 환영이다. 하이파이클럽 한 사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바쁜 것을 알지만~ ” 하고 이야기를 처음 꺼낸 것은 판단 착오였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가 도도한 말투로 입장료를 받겠다고 했어도 참석하고 싶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C 선생의 전화가 울려왔다 . 고전음악의 대가인 C 선생은 오디오를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참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자신만의 사운드 세계를 가지고 명확한 금을 그어 놓은 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 급히 전화를 한 까닭은 이러했다 .

‘ 봄바람이 불면서 뭔가를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른 것은 그냥 놓아두고 스피커를 바꾸어야 하는데 물망에 오른것이 틸의 CS6 와 마르텐오디오의 북셀프타입을 염두에 두고있다 . 뭘로 바꾸는 것이 좋겠느냐' – 대략 이런 내용의 질문인데 사실 마르텐의 북셀프는 나도 깜찍하니 하나 가지고 싶었던 것이라서 선뜻 말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자꾸만 플로어 스탠딩 타입인 틸 쪽으로 화제가 몰려가고 있었다 .

C 선생은 자신의 앰프와 상성이 맞는지 , 또는 비교적 작은 시청실에 대형기를 들이기가 쉽지 않음을 우려 했으며 , 나는 대형기가 도리어 자연스럽게 울리기가 쉽다는 점 , 북셀프라 할지라도 스탠드의 바닥이 차지하는 면적을 고려하면 대형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 , 그리고 북셀프가 만들지 못하는 밀려오는 사운드의 세계를 강조했다 . 결국 C 선생은 틸을 선택하였다 .그가 얼마나 만족을 하고 있는지 후회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하지만 나의 여러가지 주장 가운데 자연스러운 울림과 문득 밀려오는 사운드의 에너지에 있어서 대형기는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찬란한 가치가 있다 . 그리고 이어진 대형기 5 종의 비교시청회는 선약을 파기하면서까지 놓칠 수 없는 맛있어 보이는 행사였다 . 시청실에 들어섰을 때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의 위용과 준비된 앰프를 보며 짜릿한 흥분이 몰려왔다 . 문 오디오의 CDP 는 익숙하지 않은 기기이다 . 하지만 그리폰의 미라지 프리앰프는 아주 익숙하다 . 아름다운 디자인과 깊고 깔끔한 사운드 . 돌려주기 싫었던 시청기 중의 하나로 기억이 된다 . 게다가 안틸레온 시그너처와 연결되어 있다 .

무엇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조합이다 . 이와같은 시스템에 5 종의 대형기가 차례로 물리우게 될 것이다 . 다른 평론가들과 시청용 음반을 선정했다 . 핑크 플로이드 . 불타고 있는 자신의 도플갱어와 악수하고 있는듯한 자켓이 인상적인 Wish you were here - 이 음반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속에서 피어오르는 어쿠스틱 기타를 귀 기울여 듣게 될 것이다 . 그뤼미오와 하스킬의 모짜르트 소나타 . 오래된 음반이지만 기기에 따라 아주 다른 느낌을 주는 묘한 음반이다 . 에이지오우가 지휘하는 스트라빈스키 – 당연히 대편성의 에너지감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 나윤선의 초우 – 여성보컬의 홀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 그리고 “ 엔리코 라바”의 자켓과 동봉된 만화가 흥미로운 Noir 에서 Theme from Jessica Tatum 을 듣는다 .

이 음반은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음반이지만 정갈한 연주와 녹음이 인상적이다 . 시청을 하기 전에 이것저것 까탈스럽게 주문을 해야 했다 . 조금씩 손을 댈 수록 변해가는 스케일에서 이와 같은 비교시청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 독자 제위께서 이중 한 기기라도 소유하고 다듬어 나간다면 5 종 모두가 훌륭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재현을 이루어 낼 것임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 . 단지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훅업에 의한 스피커들의 인상이 여기에 남겨져 있을 뿐임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