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개비와 뾰족이가 엮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 L7
| 칸느 역에 내리는 순간, 후끈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감쌌다. 갑자기 등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면서 눈부신 태양빛이 피곤한 망막을 마구 자극했다. 빛으로 망막을 마구 때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여기가 바로 지중해구나, 새삼 절감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때는 5월, 한참 칸느 영화제가 열리고 있어서 거리는 관광객이며 영화 관계자들로 가득하다. 특히, 니스에서 칸느로 오는 열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때아닌 콩나물 시루가 된 열차 안. 거기에 싸움까지 벌어져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섰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것이, 뭔헨 오디오 쇼를 보고 저녁 8시에 중앙역을 출발, 오후 2시에 칸느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4번이나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통상의 코스라면 파리로 가서 바로 칸느로 오는 차편이 있지만, 5월의 칸느에 이런 황금 노선이 남아있을 리 없다. 결국 이태리쪽의 노선을 이용하다보니 볼로냐-보게라-니스 등을 거치며 밤새 열차를 갈아타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당초 숙소를 제공하기로 한 영화사쪽의 스탭과 연락이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짜증이 마구 밀려온다. 이럴 바에야 식사나 하자, 라고 동행한 사람에게 제안,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나 가까운 곳에 레스토랑이 하나 보인다. 다가가니, 점심 세트 메뉴가 15유로다. 샐러드도 나오고, 후식도 있는 3 코스짜리다. 나쁘지 않다.
안에 들어가서 주문하고 찬 에비앙으로 열을 식히니 금방 샐러드가 나왔다. 갓 농장에서 나온 듯한 싱싱한 채소가 한껏 빛을 발해 그냥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소스를 대강 뿌려서 몇 개 집어넣자 문득 피로가 날아갈 듯 입안이 상쾌해진다. 역시 지중해쪽의 채소는, 기본이 다르구나. 돌이켜보면, 독일에서의 식사는 입에 쑤셔넣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인상적인 음식이 없었다. 정통 독일 식당에서부터 프렌치, 일본, 중국 식당까지 골고루 다녀봐도 상황은 비슷했다. 정밀 기기나 자동차는 잘 만들지 몰라도, 요리에 관한 한 독일인은 젬병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에 비하면, 역 근방에 있는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내는 이곳 식사의 수준이라니 ! 뭘 먹어도 여기서부턴 맛있다. 후식으로 나온 티라미슈 케이크 앞에선 감동의 눈물은 아니어도 뭔가 찡하는 느낌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으니까. 사실 혼 타입이나 아큐톤, 스카닝 등의 유닛은, 음식으로 치면 일단 맛있는 재료에 속한다. 혼 ? 잘못 다루면 난폭하고, 째지기 쉽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시원시원하게 소리를 쏟아낸다. 아큐톤의 청량감이나 스카닝의 진한 밀도감도 마찬가지. 모두 중독성이 있다.
그에 비해 스캔스픽의 유닛들은, 기계적으로 정밀하고 또 정확한데 비해 별 맛은 없다는 것이 그간 필자가 가져온 생각이었다. 확실히 우수한 유닛이긴 하지만, 어딘지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다. 독일 음식처럼 심하진 않아도, 지중해성 기후에서 생산된 풍부한 맛은 없다고 할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설계자가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는 유닛이기도 하다. 윌슨 오디오에 이 유닛이 들어간 것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풀 스캔스픽 구성이라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물론 스피커에서 유닛이 전부는 아니다. 인클로저와 네트워크 등을 감안하면 유닛이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50%를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치 진공관 앰프에서 어떤 관을 쓰느냐가 소리의 성격을 좌우하듯, 스피커에서 유닛의 존재를 간과할 수는 없다. 더욱이 21세기에 들어와 유닛의 품질이 확실히 개량되면서, 예전처럼 설계자가 자기의 주장을 잔뜩 심기보다는 유닛의 특성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스피커의 설계 방침이 바뀐 것도 요즘의 추세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소개할 스피커는, 그냥 무덤덤하고, 정확한 유닛으로 알려진 스캔스픽의 숨은 가능성을 파헤쳐서 높은 음악성으로 승화시킨 하나의 모범 사례라 하겠다.
우선 외관부터 보자. 전면에서 보면 홀쭉하게 폭이 좁은 가운데 위 아래로 긴 모습이 전형적인 톨보이 스타일이다. 여기서 전면 배플을 최대한 줄인 것은, 아무래도 2차 라디에이션을 피함일 것이고, 유닛이 내는 음에 일체의 왜곡이나 컬러링을 억제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대신 뒷부분을 완만한 곡선으로 마무리해서 어느 정도의 볼륨을 확보하고 있다. 밑에는 전용 스파이크가 장착되어 있는데, 이로써 탄력적인 베이스 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유닛 구성을 보면, 상단에 7000, 일명 뾰족이라고 불리는 트위터가 배치되어 있고, 그 밑으로 미드레인지가 배치되어 있다. 베이스 유닛은 상단에 하나, 하단에 하나로 위 아래 배열된 형국인데, 다소 이색적이다. 얼핏보면 맨 위의 유닛이 미드레인지로 보이고, 밑의 두 유닛이 베이스로 보이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참고로 미드레인지와 베이스 모두 같은 구경의 바람개비 시리즈가 쓰였다. 18W 시리즈의 일종으로, 8545K나 8531G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바람개비 시리즈는 뾰족이와 비슷한 시기에 개발되어, 서로 궁합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바람개비는 미드레인지 내지는 베이스로 두루 쓰일 수 있으면서 스피드 또한 빨라 최근 각광을 받고 있다.
이번에 만난 모델은 L 시리즈 중 최상급인 7이다. 그 밑으로 5와 3가 있으며, 홈 씨어터를 겨냥한 서브 우퍼도 존재한다. 메이플 마감에 무려 11번이나 도장한 인클로저는 매우 세련되어 보이며, 키가 큰 대신 폭이 좁아 웬만한 공간에서 설치하더라도 큰 부담이 없는 장점이 있다. 내부는 크게 3개의 챔버로 나뉘어 각각의 대역이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원천적으로 제거했으며, 이를 바이 와이어링으로 처리, 역시 대역간의 간섭을 피하게 되었다. 위 아래에 각각 나있는 덕트는 전반적으로 시원시원하면서 높은 감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서 앰프 매칭에도 크게 까다롭지 않다. 이제 본격적인 시청에 들어가 보자. 사실 앞서 언급했듯 스캔스픽의 유닛들은 필자가 과히 좋아하는 쪽은 아니다. 개성이 강한 스카닝이나 아큐톤에 비해 다소 밋밋하고 심심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이 점이 강점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진한 밀도감으로 오히려 스피드에 문제가 있는 스카닝이나 빠르고 정교하긴 하지만 약간 날리는 맛이 있는 아큐톤의 단점을 생각하면, 스캔스픽은 이 유닛들의 장점만을 끌어모으는 쪽으로 유도할 수 있다. 즉, 적절한 질감에 빠른 스피드. 과연 가무트는 어떤 식으로 이를 요리했을까 적잖이 궁금해진다.
잘 알겠지만, 하이파이 클럽의 시청실엔 많은 앰프들이 진열되어 있다. 신제품도 있지만, 중고로 나온 제품도 꽤 된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매칭이 가능해 본 기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 스캔스픽의 장점이라면, A 클래스 앰프를 선호하는 스카닝이나 최단 신호 경로로 구성된 앰프에 적합한 아큐톤과는 달리, 이 모두를 아우르며 크게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8~90년대에 날리던 하이 엔드 앰프는 물론이고, 진공관 앰프 역시 환영이다. 그러므로 사용자 입장에선 편하게 여러 형태의 소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시청에서 눈에 띠는 것은 다질 콤비와 에어 타이트 콤비(ATC 2 & ATM 300)였다. 각각 제짝을 맞춰 걸어봤는데, 서로 성격이 다르면서도 매력이 넘쳐 역시 본 기가 매우 공을 들여 제작되었음을 알게 한다. 참고로 시청에 동원한 CD 몇 장을 소개하겠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루빈스타인(피아노) & 프리츠 라이너(지휘)
우선 다질 콤비부터 소개하면, 게이코 리의 경우 다소 텁텁하고 허스키한 음성이 잘 살아있으면서 그 옆에서 나긋나긋 불어대는 아트 파머의 트럼펫이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일절 설치는 부분이 없으며, 특히 보컬의 에너지가 대단해서 강한 카리스마로 압도해온다. 지미 헨드릭스는 초반에 어마어마한 저역 성분과 노이즈 등이 섞여 있는데, 지극히 태연하게 분해하는 대목에서 역시 현대 스피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본격적으로 노래하고 연주할 때의 앙상블도 파워풀하다. 다만 고역 부분에 좀 까칠한 맛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모차르트를 보면 꽤 편성이 크고 앙상블도 화려한데, 여기선 약간 억제된 기분이다. 특히 합창단과 악단 사이의 거리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아, 이것이 녹음의 문제인지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대역 밸런스가 뛰어나 큰 저항감 없이 감상에 몰두하게 한다. 역시 클래식에서 장점을 보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브람스를 들었을 때, 탄력적으로 약동하는 루빈스타인의 손놀림에서 역시 고수다운 에너지와 기품이 제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다질이 갖고 있는 미음이 전혀 훼손되지 않고 잘 전달되어 전반적으로 품위있는 재생음이 되었다.
한편 에어 타이트로 들으면, 역시 300B 싱글을 쓴 파워 앰프의 출력이 갖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파탄이나 피크가 없이 스피커를 장악하는 대목에선 거의 경악할 만했다. 특히, 클래식에서의 재생은, 뉘앙스가 풍부하면서 잔향이 깊어 넋을 잃고 감상에 임하게 된다. 게다가 스피드도 전혀 뒤지지 않아 애매모호하거나 뭉치는 음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다만 록에서의 광기, 재즈에서의 그루비한 느낌과는 거리가 있어, 이런 맛을 느끼려면 앰프쪽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램이나 B.A.T와 같은 미국 계통의 앰프라면 이런 장르도 잘 커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스캔스픽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잘 뽑아내어 독자적인 음 조성을 이끌어낸 가무트는, 마치 오랫동안 스피커를 제작해온 내공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특히 클래식에서의 단아하고, 고운 음은 뇌리에 떠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이 회사의 활동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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