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이종학

필자가 다녀본 음반 가게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마드리드에 있었다. 그곳을 방문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좀 있다. 때는 1990년, 아직 앳된(?) 모습을 갖고 있던 필자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한동안 마드리드에 체류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영화인지는 밝히기 곤란하지만, 아무튼 낮에 글을 쓰다가 무료해지면 산책을 하곤 했는데, 지금도 그 코스가 기억날 만큼 아주 또렷하다.

그 무렵 자주 들렀던 곳이 오페라 하우스 근처로, 멋진 광장이나 정원이 있었고, 무엇보다 맞은편에 오래된 음반 가게가 있어서 발걸음을 자주 했다. 지은 지 몇 백 년쯤 된 고색창연한 건물을 사용하는 이 가게는 음악에 관한 한 일종의 종합 서비스를 하는 곳으로, 각종 악보나 악기는 물론 CD, 오디오, LP 등을 골고루 비치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환갑은 넘긴 듯한 지배인이 늘 검은 정장 차림으로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할 뿐 아니라, 간혹 CD를 구입하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정성스럽게 포장해주는 직원의 모습에서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말하자면 한 장의 CD를 구매하면서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다. 내가 구입하는 이 한 장의 CD가 실은 대단한 문화 상품이고 또 유산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오디오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편이라, 이 가게에 진열된 오디오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무슨 거창한 시스템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보급형 북셀프나 플로어 타입에 인티 앰프가 대부분이었지만, 워낙 매장의 분위기가 좋아 이런 제품들도 꽤 폼 나게 보였다.

이 중 자주 손이 갔던 제품이 B&W의 매트릭스 3이란 제품으로, 나중에 만들어지는 800시리즈와 구분되는, 보급형 플로어 타입의 스피커다. 여기에 네임의 나이트 2와 메리디언의 MCD를 물리면 다소 어둡지만 정갈하고, 깊이가 있는 음이 나왔다. 특히, 클래식에서 발군이었다.

주로 클래식 음반을 파는 매장의 성격과 고색창연한 오페라 하우스 건물과 오버랩이 되어 이 스피커는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고, 결국 귀국해서 손에 넣고 말았다. 그러나 재즈와 록이 메인인 필자에게 이 스피커는 왠지 답답하게 느껴져 결국 방출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좀 더 애정을 가졌다면 꽤 좋은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이후 본격적인 매트릭스 시리즈가 나오면서 B&W는 클래식뿐 아니라, 록과 재즈 등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고, 노틸러스 시리즈로 진화해서는 눈부실 만큼 정보량이 풍부하고, 밸런스가 좋은 스피커들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스피커의 모습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B&W를 좋아한다고 해도 노틸러스 800시리즈는 가격적인 부담이 있다. 물론 대규모 메이커로서 갖는 이점이 발휘되어 내용물에 비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 책정되어 좀 용돈을 줄이고, 술을 덜 마시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기기이기는 하다. 다만, 보다 캐주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제품이 아쉬운데, 이를 인식이라도 하듯 B&W는 800시리즈의 콘셉트를 보다 대중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700시리즈를 만들었고, 이번에는 600시리즈를 발표해서 더욱 친근감 있는 브랜드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번 뮌헨 오디오 쇼에 들었을 때 만난 B&W 부스의 위용은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무대에 올려놓고, 무려 5.1채널로 노틸러스 801을 돌려서 실제 연주와 견줄 수 있는 음향을 제공하는 부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별도로 각종 티셔츠나 캡을 파는 매장도 있을 뿐 아니라, 딜러와 저널을 위한 카페테리아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관계자를 만나 얘기해보니, 현재 B&W는 세게 2위의 스피커 브랜드라고 한다. 처음 마드리드에서 이 브랜드를 대면했을 때만 해도 이토록 성장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지난 20년간 숨가쁘게 달려와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이 성공은 그냥 물량 공세나 홍보만으로 결코 이뤄질 수 없다. 저 까다로운 애비 로드 스튜디오나 데카 스튜디오 등에 납품한 실적이 있을 정도로 프로 세계에서 인정을 받은 바 있고, 그 기술력을 컨슈머 시장에 적절히 대입해서 그야말로 실력 하나로 세계 시장을 석권한 것이다.

실제 이 회사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영어-불어-독어-중국어-일어-러시아-서반아 등 무려 7개국 언어로 정보가 제공된다. 현존하는 오디오 회사 중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서비스하는 업체는 B&W가 유일할 것이다. 아무튼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B&W는 재규어 승용차에 카 오디오를 납품하거나 아이팟용 스피커를 개발하는 등, 여러 부문에서 다각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 메인은 2채널 스피커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런칭된 600시리즈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이 된다. 플로워 스탠딩 타입과 북셀프 타입 그리고 서브 우퍼. 우선 플로어쪽을 보면 683과 684가 눈에 띄고, 북셀프로는 685와 686이 있으며 서브 우퍼로 ASW610XP, ASW610 그리고 ASW608이 있다. 센터 스피커로는 HTM61 그리고 HTM62가 있어 홈 씨어터용 라인업으로 확장할 수 있는 레퍼토리다. 이중 이번에 소개할 683은 600시리즈의 톱 모델이라 하겠다.

스피커의 외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600시리즈가 다른 시리즈와 구별되는 것은, 역시 알루미늄 돔 트위터를 특징으로 하는 독창적인 구성이 아닐까 싶다. 물론 미드레인지는 전통의 케블라 콘을 쓰고 있지만, 알루미늄이란 소재를 사용한 것은 의외이긴 하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우선 케블러 콘부터 설명해보자. 처음 이 소재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4년. 뒤퐁사에서 파이버를 소재로 개발한 이 케블러가 대표적으로 쓰이는 제품이 바로 방탄조끼다. 총알을 맞고도 끄떡없는 소재인 만큼, 그 강도와 신축성에 대해선 두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B&W는 이 소재의 장점을 일찍이 파악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 결국 1976년에 와서 DM6라는 스피커에 처음 채용하기에 이른다. 이후, 현재까지 계속 진화시켜온 것이다.

참고로 PP콘의 스카닝이 주는 진한 맛이나 세라믹 소재의 아큐톤이 내는 투명함과 비교할 때, 케블러의 장점은 처음에 확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기간 사용하다 보면, 매우 솔직담백하게 소스의 정보를 처리하는 부분에서 흥미를 느끼게 된다. 사실 B&W가 표방하는 것은, 일종의 모니터적인 성향이 아닐까 한다. 프로페셔널 세계에서 착색이나 컬러링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 면에서 강한 내입력에 견딜 수 있고, 중립적인 음색을 내는 케블러의 존재는 귀중하기만 하다. 물론 이 소재를 갖고 어떻게 맛을 내는가는 순전히 사용자의 몫에 달렸지만.

본 기의 미드레인지에 채용된 6인치짜리 케블러 콘은 이미 800시리즈에 채용되어 공인을 받은 FST 드라이버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더욱 스피디한 반응을 얻게 되었고, 담당 대역 내에서의 특성 역시 일정하게 되었다.

한편 이와 커플링되는 베이스 콘을 보면 알루미늄 소재로 되어 있지만, 실은 페이퍼와 케블러가 적절히 혼합되어, 일종의 복합 소재로 꾸며져 있다. 물론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제작 과정을 거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저역에 알루미늄 처리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음을 들어본 결과 매우 스피디하면서 순발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고역에 쓰인 알루미늄 콘의 스피드와 중역의 진보된 케블러 콘에 맞추려면 결국 저역에 이런 소재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트위터를 담당하는 알루미늄 콘은 겉보기에는 단순한 유닛 같지만, 노틸러스 시리즈에서 사용된 기술을 응용, 내부에 진동 완충제가 채워져서 공진을 줄이고 있다. 그 결과 무려 50kHz에 달하는 주파수 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참고로 저역은 30Hz까지 커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본기의 입력 감도는 90dB. 매우 양호한 수치로, 웬만한 인티 앰프나 AV 리시버를 붙여도 충분히 소리가 나오도록 했다. 더구나 포트가 정면에 배치되어 뒷벽에 대한 부담도 적어서 하이파이뿐 아니라 홈시어터와 연계해서 다양하게 사용하도록 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전통적으로 B&W는 네트워크 설계를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통상 1차 오더 크로스오버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무엇보다 유닛에서 많은 부분을 해결할 만큼 성능이 뛰어나기 때문인데, 이 점은 필자가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전반적인 밸런스가 매우 빼어난 것에 놀라게 되는데, 일체의 네트워크 장난 없이 이런 마무리를 해낸다는 것은 역시 B&W다운 관록이 아닐까 한다. 본기 역시 이런 노하우가 유감없이 발휘된 경우다.

본기의 시청을 위해 동원한 기기는 CDP로 오디오 리서치의 CD7을 고정한 상태에서 암펜스터의 디퍼 프리 & 파워 앰프를 쓴 다음, 에어 타이트의 ATC-2 프리와 ATM 211 파워로 바꿔서 연결했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CD를 사용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 이작 펄만(vl)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p)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1악장.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빈 필
-마일스 데이비스
-킹크스 <20th Century Man>
-노라 존스 <Don't Know Why>

암펜스터 콤비로 처음 들은 베토벤의 곡에선, 매우 고급스런 질감의 바이올린이 나와 깜짝 놀랐다. 스피커의 가격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퀄리티는 기대하기 힘든데, 가볍게 예상을 뛰어넘는 재생이다. 묵직하게 건반을 누르는 소리도 박력이 있어서, 결코 바이올린에 주눅 들지 않는다. 특히, 두 대가가 주고받으며 음과 음 사이에 구축하는 침묵과 긴장감은 과연 명연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환상 교향곡>의 경우, 각 악기들의 섬세한 음색이나 정위감이 뛰어나고, 휘몰아칠 때의 스케일감도 대단하다. 그러면서 일체의 엉킴이나 딜레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속도도 적당해서 적절한 긴장감을 갖고 시청에 임하게 한다.

다만 마일스에 이르면 더블 베이스 라인이 좀 과장되게 들린다. 아무래도 출력 과잉의 현상이며, 바닥에 스파이크를 대는 것이 필수라는 점을 알려준다. 다소 까칠까칠한 트럼펫이 여기서는 약간 곱게 들리고, 심벌즈의 찰랑거림도 좀 더 두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매칭하는 앰프에 따라 이 부분은 상당히 개선될 것이다.

한편 킹크스에선 어쿠스틱 기타-드럼-일렉트릭 기타-올갠 등이 차례로 더해지면서 곡에 무게감을 더하는 구성인데, 그 진행이 일목요연하게 포착된다. 특히, 초반부에 긁어대는 스틸 기타의 첨예한 음향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음에 몰두하게 한다. 킥 드럼의 박력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이어서 에어 타이트 콤비로 바꿔 다시 킹크스를 들어본다. 약간 날카롭던 스틸 기타의 금속성이 순화되는 대신, 출력의 문제가 대두되어 킥 드럼의 박력은 좀 덜해진다. 그 부분은 어쩔 수 없기는 하다. 또 목소리도 다소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 약간 거친 맛이 아쉽다.

그러나 노라 존스에 오면 이 부분이 장점으로 변한다. 청아하면서 순결한 음성에 요염함이 더해져 과연 211이라는 출력관이 가지는 맛이 듬뿍 반영되어, 이런 여성 보컬 장르를 계속 듣고 싶게 만든다. 스케일은 좀 작아져 전체 밴드의 규모가 좀 축소된 느낌이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제 사이즈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들은 베토벤은, 역시 바이올린의 독특한 맛이 전체를 지배하면서 본기의 또 다른 잠재력을 드러낸다. 피아노의 음향도 낭랑하고 고우며 여운도 좋다.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게 주고받는 모습에서 긴장 일변도의 암펜스터와는 다른 연주가 펼쳐진다.

이런 조합에서 느낀 점은, TR 앰프의 경우 100W 정도면 충분하게 구동할 수 있을 것 같고, 진공관을 사용한다면 EL34 정도에서 큰 재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기본 품성이 뛰어난 스피커이므로, 굳이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추궁한다면 꽤 개성적이고, 흥미 있는 음이 나올 것 같다.

요즘 가격표를 보기가 무서울 만큼 어마어마한 제품이 속출하는 마당에 이런 착한 스피커의 등장은 마냥 반갑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만난 B&W의 신작은, 예전 마드리드에서 마음을 빼앗았던 모델의 최신형 버전이 아닌가 싶고, 그런 면에서 첫사랑을 만난 풋풋한 감상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