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이곳엔 일종의 세트 메뉴를 팔고 있다. 그렇다고 시시한 회전 초밥집은 아니다. 맛깔난 요리를 보다 저렴하게 제공하기 위해 만든 메뉴일 뿐이다. 참치며 다랑어며 여러 형태의 초밥이 나왔는데, 마침 계란말이도 보였다. 개인적으로 계란말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먹었다. 그러나 동행인은 마지막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먹어봐, 기가 막히다니까 ! 여러 번 채근하자 결국 입에 댔는데,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이런 맛이 ...

같은 계란말이 초밥이라도 한국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실제 초밥 요리사를 시험할 때 이것을 갖고 평가한다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가츠오부시 국물에 날계란을 풀고, 전용 후라이팬으로 한 겹 한 겹 시간을 들여 뿌리고 뿌려서 익혀낸 후 칼로 절단했을 때, 복잡하게 엉킨 층이 드러나야 한다. 그랜드 캐넌의 퇴적층이나 파이의 단면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 또 어슬렁거리니, 이번에는 누드 쇼 하는 클럽들이 줄지어 나온다. 전단을 뿌리는 삐끼가 연신 보텀리스를 외치는데, 정말 다양한 국적의 인종들이 다양한 형태의 쇼를 하고 있었다. 결국 롯폰기에 가서 비틀즈 카피 밴드가 출연하는 클럽에 갔는데, 역시 동행인이 놀라는 눈치다. 눈을 감으면 레코드와 똑같은 연주. 악기며 앰프며 복장까지 그리운 비틀즈가 저기에 있다. 비록 짝퉁이지만, 감동은 물밀 듯 밀려온다.

확실히 이런 곳에 오면 일본과 한국은 다르다고 느끼게 된다. 건물 외관이나 간판의 화려함이나 사람 생김새나 옷차림 등은 비슷비슷하지만, 그 내용이 다르다. 훨씬 전문적이고, 다양하며, 깊이가 있다. 그래서 각 분야에 오타쿠들이 포진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을 간과하면 일본의 깊은 속내를 알기가 힘들다.

에소테릭에서 새로 출시한 P05 & D05 콤비를 소개하기 위해 장황하게 서론을 쓴 데엔 이유가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문성이나 오타쿠적인 기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기기의 장점을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 과장되게 말하면, 이 가격에 이런 물량 투입과 퀄리티를 이끌어낼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그것은 에소테릭이 오로지 CDP/SACDP에만 집중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처음 CD가 탄생한 해가 1982년. 마치 꿈의 오디오가 등장한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곧 많은 애호가들이 등을 돌렸다. 디지털 음은 뭘 들어도 똑같아. 이게 바로 당시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티악은 생각이 달랐다. 이 기기에서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본 것이다. 특히, CDP의 트랜스포트 메카니즘에 집중해서, 무슨 첨단 의료 장비를 생산하듯 철저하게 진동 대책이나 안정적인 트레이 구동 방식 등을 연구해 VRDS라는 테크놀로지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게 바로 20년 전의 일이다.

이 선진적인 발상은 많은 오디오 메이커들을 자극해, 특히 와디아의 경우 이 방식을 바탕으로 한때 세계를 주름잡는 CD 플레이어 메이커로 자리잡은 바 있다. 그리고 티악의 연구는 지금까지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필자는 지금도 CD 트랜스포트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에소테릭의 P0s를 꼽는다. 잘 알다시피 에소테릭은 티악이 보다 전문적인 CD 관련 기기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서브 브랜드다. 하이 엔드 지향의 제품만을 내놓는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P0s는 현재 VUK라는 개량형까지 나와있는데, CD 한 장을 돌리기 위해 이렇게 묵직하고, 엄청난 물량이 투입한 트랜스포트는 거의 본 일이 없다. 그냥 보기만 해도 강력한 포스가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엄청난 물건을 만들고도 또 내놓을 물건이 있을까 싶을 때 나온 것이 P01 & D01 콤비. 처음 이 제품을 봤을 때 충격을 받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전작과는 다른 디자인 컨셉에 어마어마한 무게에 질렸고, 초정밀도를 자랑하는 절삭 가공으로 마무리지은 샤시의 예리함에 손을 대기가 겁날 정도였다. 더 놀란 것은, 제품의 내부. 심하게 말하면 수준급의 프리 및 파워 앰프를 만들어도 좋을 만큼의 물량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더구나 이때부터는 CD뿐 아니라 SACD도 재생하게 했다. CD의 음도 SACD급으로 올려주는 역할까지 한 것엔 그저 질릴 수밖에. 그러나 문제는 가격. 도합 5천여만원 이상을 들여야만 이 몬스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아마 이런 가격적인 부분을 의식한 듯, 에소테릭은 그 절반 가격에 P03 & D03를 내놓는다. 그러면 샤시나 음질, 부품 등이 모두 상급기의 절반 수준이냐 되물을 법도 한데, 물론 절대 그렇지 않다. 외관만 보면 좀 작아진 정도지, 특유의 디자인과 묵직함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음질 역시 마찬가지.

아무튼 보다 저렴한 3 시리즈의 등장으로 분리형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또 그 사이에 단품 형태의 CDP도 등장해서, 앞으로 상급기의 기술을 이양받은, 보다 저렴한 가격대의 단품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마치 뒷통수를 치듯, 다시 분리형이 나왔다. 그것도 3시리즈의 반값으로 말이다. 그런데 곳곳에 원가 절감의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P05 & D05 콤비가 내는 포스의 강력함이나 디자인상의 수려함은 전혀 상급기에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음질 역시 결코 밀리지 않는다. 아니, 가격대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물량투입형은 찾아보기 힘들만큼 압도적이라 하겠다.

여기서 제일 놀란 부분은 워드 클록이다. 이마 상급기에서 도입된 바 있고, 별도의 워드 클록 제너레이터라는 컴포넌트를 발매할 만큼, 에소테릭이 워드 클록에 쌓은 노우 하우는 대단하지만, 이 가격대의 제품에도 변함없이 이 기술을 접목시키고 있음은 상당히 양심적이고 또 고무적이다.

D05에 설치된 워드 클록은, P05와의 연동을 전제로 하지만, 외부 클록을 받을 수 있게 별도의 입력단을 갖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고정밀의 수정 발진기에 의해 지토의 저감 및 위상 정합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하이 스피드로 실재감과 델리커시가 풍부한 음질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별도의 워드 클록을 생산하는 에소테릭의 노우 하우가 결집된 부분이어서, 타사의 제품들과 확실히 차별된다 하겠다.

P05에서 제일 주목할 부분은, VRDS-NEO(VMK-5)라 명명된, 턴테이블 파트다. 말 그래도, 디스크를 읽는 부분인데, P05의 핵심 부분이라 하겠다. 우선 CD 및 SACD의 고속 회전에 준민하게 대응하기 위해 불필요한 진동의 원인이 되는 회전 관성을 최소화시켰다. 또 턴테이블면과 동일한 지름의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를 붙여서 레조넌스를 적극적으로 억제한 부분 역시 회전시의 정숙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로딩 부분 역시 주목할 만하다. 트레이를 개폐할 때, 에소테릭 독자 기술을 개발해서 트레이 개폐용 기어와 클램프용 기어가 항상 맞물리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일체의 덜컥거림이 없어 매끄럽고 조용한 디스크 로딩을 실현하고 있다. 또 모터축을 최단화시켜, 회전시의 축 편차를 극소화 한 점도 턴테이블의 고정밀 회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어서 D05를 보면, CD가 입력되어도 DSD 출력으로 바꿔서 SACD급 음질로 올려주는 부분이 특기할 사항이다. 이를 위해 PCM 및 DSD 입력 모두에 대응하는 32비트 DA 변환 장치를 채용했는데, 바로 아사히 화성 일렉트로닉스가 개발한 델터 시그마형 DAC 디바이스 가 그것이다. 이 32비트 칩은 넓은 연상 공간과 빠른 데이터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어 고음질의 출력을 가능케 하고 있다. 1비트형 DAC와 멀티 비트형 DAC의 성격을 골고루 갖춘 본 기는 이를 채널당 한 개씩 사용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출력된 아날로그 신호를 보다 정교하게 출력하기 위해, 매 회로 블록마다 별도의 전원부를 채용한 점이 흥미롭다. 덕분에 디바이스 내부의 크로스토크나 블록간의 간섭이 최대한 억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에소테릭은 iLink 단자의 사용을 적극 추천한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고음질 IEEE 1394 회로는 지터를 저감하는 플로우 레이트 콘트롤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D05의 공정밀도 클록에서 받은 신호를 제어해서 SACD만이 갖는 양질의 음성 신호를 디지털 전송할 수 있는 것이다. P05와 D05를 함께 구입해 사용하려는 분들에게 적극 권장할 만한 단자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동원한 기기는 솔루션 720 프리앰프에 파워 앰프가 내장된 ATC의 100ASL Mark 2를 스피커로 사용했다. 다음과 같은 CD와 SACD를 시청했다.

-Pink Floyd
-게이코 리
-Bill Evans
-Stravinsky 발레리 게르기에프 지휘
-모차르트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은 SACD의 매력이 극한으로 발휘되었다. 처음에 바닥을 두드리는 심장 박동 소리나 서서히 음향이 고조되면서 공중에 화려하게 터트려지는 심벌즈의 음향, 하이 톤의 보컬 등에 이르기까지 이 그룹이 스튜디오에서 만들 때 의도한 부분이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심하게 말하면, ATC에 수퍼 트위터를 추가해서 고역의 성분이 더 늘어난 느낌이다.

게이코 리는, 처음에 스튜디오에 혼자 나직이 노래하는데, 침을 삼키거나 숨을 내쉬거나 혀가 입천장에 닿는 등 무척 세밀한 부분이 절묘하게 포착된다. 특유의 허스키한 컬러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녹음 공간의 넓이나 잔향이 느껴질 정도로 리얼한 맛이 일품이다. 중간에 따스하면서 적절히 돌출하는 아트 파머의 트럼펫도 매력이 넘친다.

빌 에반스는 CD임에도 SACD처럼 정보량이 늘은 느낌이다. 빌리지 뱅가드의 실황인 만큼, 시작 부분의 웅성거림이나 기침 소리 등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50년 전의 뉴욕에 돌아간 듯하고, 이어지는 피아노 트리오의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연주는 듣는 이를 강하게 흡인한다. 특히, 왼쪽 채널을 가득 채운 화려한 브러쉬 웍은 스네어의 질감이 두드러지게 돌출될 뿐 아니라, 심벌즈를 잠깐씩 두드릴 때의 엑센트도 절묘하게 포착된다. 침을 삼키고 라이브에 온 듯한 기분으로 감상에 임하게 된다.

스트라빈스키의 다채로운 음향 효과와 복잡한 편성은 이미 악명이 높은데, 여기서는 제대로 정돈이 되어 일목요연하게 악상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다. 초반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묘사에서 점차 기지개를 켜고 클라이맥스로 돌진할 때의 기세에 이르기까지, 그 드라마틱한 움직임이 절묘하다. 마치 악보를 보면서 듣는 듯, 명쾌한 재생음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모차르트는, 특히 바이올린에서 리얼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음향이 흘러나와 잠시 멍하게 한다. 원래 그뤼미오를 좋아하지만, 여기서는 박력 만점의 재생이 압권으로, 우아하며 고상한 하스킬의 연주와 대비되어, 이 명연의 맛이 한층 강화된다. 특히, 고역으로 뻗을 때 전혀 에너지가 죽지 않는 바이올린의 음향은, 과연 SACD로 출력해주는 본기의 장점이 확연히 드러난 대목이라 하겠다.

본 기는 가격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음질적으로 메리트가 상당한 제품이다. 향후 워드 클록 부분을 더 강화한다면, 본 콤비가 가진 기능은 놀랍도록 향상할 것으로, 이 점에서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가진 제품이라 하겠다. 오로지 디지털 소스에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에소테릭이 얄팍한 애호가들의 사정을 감안해서 내놓은 일종의 선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