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서 날아온 멋진 음악 선물
때는 1986년. 당시 B&W의 사장이었던 로버트 트룬츠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뭔가 중요한 모티브를 찾고 있었다. 소규모 공방에서 시작한 회사는 이제 어엿한 기업이 되어 돈도 많이 벌었다. 명성도 얻었다. 이제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다. 그래서 뭔가 자신의 흥미를 강하게 유발시킬 동기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레코딩에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음악이 시작되는 곳을 한번 파고 들어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스위스 태생인 로버트는, 이미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의 중요한 스폰서였다. 여기서 많은 녹음을 실시했다. 그러다 넬슨 만델라가 등장하고, 인종 차별을 철폐한 남아공에 관심이 갔다. B&W의 스피커를 세일즈하는 일도 관련이 있었다. 1993년도에 처음 방문했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에어토 모레이라, 플로라 퓨림과 같은 남미 재즈 뮤지션과 알게 되어, 함께 공연도 가고, 클럽도 다녔다. 클럽에선 아프리카 토속 연주인들과 즉석 잼도 이뤄졌다. 이 열띤 현장이 로버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돈은 벌 만큼 벌었다. 오디오계에서 얻을 만큼 명예도 얻었다. 이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
결국 그는 케이프타운 시에 국제 재즈 페스티벌을 열자는 제안을 한다. B&W라는 막강한 스피커 회사의 후원이 있었으므로 곧 이 행사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2000년엔 아예 회사를 나와 남아공에 이주하기에 이른다. 스위스, 영국 다음에 이제 남아공이 홈 타운이 된 것이다. 이미 이 지역의 명사였으므로 곧 많은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그런 어느 날, 일군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모두 자기 사업체를 갖고 있는 그들은 음악 애호가들이기도 해서 로버트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순수한 남아공 제작의 스피커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B&W 출신인 로버트이므로 이런 제안은 느닷없는 것도 아니었다.
또 남아공은 당시 수입세가 250%나 된다. 정상적으로 외국산 스피커를 수입하면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 그럴 바에야 자체 제조하는 편이 낫다는 인식도 팽배했다. 그러다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즉시, 로버트는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조사한다. 무엇보다 그에게 전가의 보도는 로렌스 디키. 마침 그도 B&W를 나와 유닛을 개발하고 PA쪽 일도 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프리랜서가 된 것이다. 다짜고짜 남아공으로 오라고 전화했다. 이유 불문이다. 다행이 즉시 그가 달려와 줬다. 상황 파악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옛 용사가 뭉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비비드 오디오가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번 인터뷰의 주체는 로렌스 디키. 그러나 이런 배경 설명이 없이는 비비드 오디오에 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힘들다. 덧붙여 한 가지 더 설명하자면, 남아공의 풍부한 공업 인프라다. 더반과 요하네스버그를 근거지로, 도요타, 르노, 벤츠, 닛산, 현대 등의 자동차 OEM이 행해지고 있고, 그밖에 다양한 산업 기반을 갖고 있다. 주로 금 광산으로 유명하지만, 화학이나 기계, 선박 수리 등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1인당 GDP는 채 1만불이 안 되고, 실업률도 25%에 육박한다. 인종 차별의 문제도 안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우리와 비슷할 정도로 많고, 면적은 무려 다섯 배가 넘는 사이즈를 자랑한다. 기호도 온난해서 와인의 생산지로도 최근 각광받고 있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국가라 할 만하다. 이런 곳에서 스피커 하나쯤 만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인터뷰 : 이종학
인터뷰이 : 로렌스 디키
우선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
LD : 영국의 중부 도시인 노팅엄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LP와 CD의 컬렉터일 만큼 음악을 좋아했다. 탄노이와 쿼드 세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오디오가 작동하는가에 많은 관심이 갔던 것 같다. 그래서 10대에는 KEF의 드라이버를 사용해서 트랜스미션 라인을 가진 스피커를 자작하기도 했다. 이때 사용하고 있던 오디오는 야마하의 CA-1100이라는 앰프였다. 스피커뿐 아니라 턴테이블도 자작해서 사용했는데, SME 암을 달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빌 브러포드, 킹 크립슨, 필 콜린스, 캔, 스티브 힐리지 등의 음악을 즐겼다.
턴테이블도 직접 만들어서 썼단 말인가?
LD : 그렇다. 원래부터 과학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대학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이런 기반을 갖고 84년도에 B&W에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액티브 스피커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자공학을 한 사람이 결국 스피커 디자이너로 유명해진 부분이 흥미롭다.
LD : 스피커는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다. 음향, 전자, 심리학, 디자인, 소재 공학… 이런 요소들을 규합해서 스피커로 초점을 모으는 것이 재미있다. 그래서 스피커 제작에 많은 흥미를 가졌던 것이다.
당시 B&W에서 결국 액티브 스피커를 개발했는가?
LD : 일단 파워 앰프는 만들었다. 작은 큐브 형태의 것으로, 모노 블록 구성에 800W가 나온다. 로버트는 아직도 이 앰프를 자택에서 사용하고 있다. 액티브 스피커도 시제품까지는 만들었다. 존 바우어스 액티브 1이라는 모델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B&W는 액티브 스피커나 앰프보다는, 캐비닛의 소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내가 만든 파워 앰프는 로텔에 팔았다. 여기서 MPA-10이라는 모델로 정식 발매되었다.
그 이후에 어떤 작업을 했는가?
LD : 당시 셀레스천에서 SL6000이라는 스피커를 개발했다. 캐비닛 내부의 구조를 보니, 마치 와인 박스처럼 복잡했다. 여기서 착안을 해서 매트릭스 구조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결국 86년에 본격적으로 매트릭스 구조를 가진 스피커가 나왔다. 이후, B&W의 창업주 중 한 명인 바우어스가 나를 음향 연구 쪽으로 임명했다. 이후, 바우어스가 죽고 로버트가 후임 사장이 되었지만, 연구는 계속되었다. 이래서 나온 게 노틸러스라는 스피커다.
그렇다면 B&W에서 액티브 1, 매트릭스, 노틸러스 등의 작업에 참여했다는 뜻인가?
LD : 그렇다.
노틸러스 이야기를 잠깐 하자. 어떻게 이런 발상으로 스피커를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LD : 처음에는 프로페셔널용으로 제작하려 했다. 유닛 하나에 파워 앰프 하나를 할당하는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음향학적 고려에서 숱한 도면 작업과 시제품 제작을 통해 결국 노틸러스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나중에 전용 케이블과 파워 앰프도 만들 생각이었다. 한데 미국 쪽 딜러들이 반대했다. 이 스피커를 하나 팔면, 파워 앰프를 넉 대(모노 블록이면 무려 8대)를 팔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전용 파워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장삿속으로만 보면 그쪽이 더 낫다. 결국 파워 앰프의 제조 계획은 중단되었다. 단, 노틸러스에 장착되어 있는 유닛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라 보면 된다. 이후 내가 스스로 유닛을 개발해서 비비드에 적용한 것은, 상당히 개선된 모델인 것이다.
B&W를 나온 다음에 비비드에 합류할 때까지의 행보가 궁금하다.
LD : B&W는 97년에 퇴사했다. 이후 드라이버 연구를 시작하면서 PA쪽에 관심을 갖고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PA쪽은 아무나 쉽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다. 명성도 있어야 하고, 연줄도 있어야 한다. 그러다 99년쯤 원하는 형태의 드라이버가 완성되어 스폰서를 찾았지만, 워낙 새로운 형태의 제품이어서 돈도 많이 들고, 생산도 쉽지 않아 답보 상태에 머물고 말았다.
그 즈음 영국에서 PA를 전문으로 하는 터보 사운드에서 제안이 왔다. 여기서 파트타임으로 컨설팅을 하면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정보도 얻고, 그쪽 엔지니어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일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대규모 콘서트에 관여한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터보 사운드와는 간간이 프로젝트별로 일을 하는 편이다. 이후, 로버트가 남아공에 이주한 후에 연락이 와서 비비드 오디오를 창업하기에 이른 것이다.
비비드 오디오의 초창기 이야기를 해달라.
LD : 처음 남아공에 갔더니 미국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도시에 들어가면 최첨단 시설과 쾌적한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지만, 도시를 나가면 바로 숲이다. 원시적인 형태의 숲이 그대로 놓여 있다. 도시만 나가면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는 미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천천히 시작했다. 작은 창고를 얻어 캐비닛 제조업자도 고용하고, 드라이버 제조도 시작했다.
그런데 원하는 만큼 캐비닛이 나오지 않았다. 마무리 공정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작업도 늘 문제가 되었다. 결국 하나씩 직접 해결하다 보니 사이즈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마침내 2004년에 본격적인 창업을 한 후, 규모가 큰 공장에서 모든 공정을 다 커버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드라이버 제조부터 인클로저, 도장 등 스피커의 A부터 Z까지 인하우스 팩토리 시스템으로 완성하게 된 것이다.
직접 드라이버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LD : 모두 수공업으로 한다. 공구도 그리 복잡하지 않다. 나는 B&W에 있으면서 유닛 제조부터 모든 공정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직접 유닛을 제조하는 일이 결코 낯설지 않다.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드라이버는 처음 노틸러스에서 사용한 제품에서 많은 진화를 이룩한 제품이다.
G1에 투입한 드라이버의 특징은 무엇인가?
LD : 우선 유닛의 뒷부분에 길게 원통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소음 구조를 이루도록 했다. 유닛 내부는 냉각 시스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를테면 멤브레인을 감싸는 새시도 둥글게 원을 그리되, 꽉 막히게 하지 않았다. 12개의 얇은 기둥이 감싸는 형태로 만들어 방열하도록 만든 것이다. 보이스 코일과 멤브레인을 연결하는 코일 포머에도 많은 구멍을 내서 일체의 열이 머물지 않도록 했다. 멤브레인은 메탈 돔을 사용했다. 드라이버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를 경량화해서 발열도 용이하게 하고 감도도 높인 것이다.
G1의 인클로저 옆면 양쪽에 우퍼를 각각 배치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LD : 두 개의 우퍼가 서로 연동 작용을 하면서 역시 자연스럽게 소음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두 우퍼의 드라이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입력되는 신호에 따라 똑같이 동작하고 유닛 뒤에서 발생하는 음을 무리 없이 감쇄하도록 했다.
인클로저는 어떤가?
LD : 우선 커다란 성형판을 만든다. 여기에 카본 파이버, 폴리에스테르 등이 혼합된 복합 소재를 넣어서 몰딩한다. 대개는 앞뒤 판을 따로 성형해서 나중에 샌드위치처럼 붙이는 형태로 인클로저를 완성한다.
드라이버만 따로 판매할 계획이 있는가?
LD : 예전에 바우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드라이버를 판매하게 되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온다. 나쁘게 디자인된 스피커만 시장에 판치게 되니까, 절대로 드라이버만 따로 판매하지 말라.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쓰기에도 바쁜 실정이다.
이제 더 이상 앰프는 만들지 않은가?
LD : 스피커 제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단, 언젠가는 액티브 타입의 스피커를 제작하고 싶기는 하다.
크로스오버를 간결하게 구성한 것 같은데, 1차 오더 네트워크를 쓴 것은 아닌가?
LD : 아니다. 1차 오더는 문제가 많다고 본다. 우선 비대칭적이고, 크로스오버 포인트에 가면 각각의 주파수가 90도로 급격히 꺾여지는 단점이 있다. 또 저출력 파워 앰프를 쓸 경우에도 문제가 있다. 잘못해서 볼륨을 크게 올리면 트위터가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간략한 형태의 크로스오버를 사용할 뿐이다.
현재 몇 명의 인원이 비비드 오디오에 있는가?
LD : 오피스에 3명 그리고 공장에 10명 정도 있다.
특별히 추천하는 파워 앰프가 있는가?
LD : 입력 감도가 91dB나 되는 스피커다. 최소 50W만으로도 구동된다. 그러니 특별히 가리는 앰프가 없다. 취향에 따라 매칭하면 된다.
앞으로 사업이 번창해서 더욱 좋은 제품이 나오길 기대하겠다.
화가나 음악가처럼 꽁지머리를 한 로렌스의 인상은 매우 개성적이고 또 호감이 간다. 말도 재미있게 해서, 인터뷰 내내 즐겁게 대화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영국에 머물면서 16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남아공에 가서 일을 한다. 그 과정이 힘들지 않느냐고 하니 오히려 즐겁다고 한다. 낯선 문화에 적극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떤 형태의 음악이던 가리지 않고 즐길 줄 아는 마음에서 역시 타고난 오디오장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사실 노틸러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음 설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일본의 저명한 오디오 평론가 후 노부유키는 자택에 이 스피커를 들이면서 그간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는 노틸러스의 후속기를 강하게 열망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마 그런 심경을 가진 애호가들도 많을 것이다. 솔직히 넉 대분의 스테레오 파워 앰프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이번에 소개되는 G1을 비롯한 비비드 오디오의 라인업은 오리지널 노틸러스의 설계자가 오랜 연구와 노력 끝에 만들어낸 선물이다. 여기엔 많은 파워 앰프도 필요 없고, 복잡한 세팅도 요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욱 개량된 기술이 동원되어, 하이 스피드하고, 일체의 스트레스가 없으며, 발군의 밸런스를 자랑하는 음이 나온다.
자신이 뿌린 씨를 자신이 거두어들이듯, 로렌스는 결국 노틸러스로 던진 화두에 걸맞는 진정한 답안을 역시 내놓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에 관해선 호불호가 갈릴 만큼 파격적이지만, 여기서 재현되는 음의 상쾌함과 높은 퀄리티는 매우 특필할 만한 것이라 생각된다. 비비드의 행보에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