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의 명가 ATC를 찾아서
아마도 오디오파일 중에 한번쯤 ATC 스피커를 사용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분은 없을 것이다. 그 중에 상당수는 적어도 SCM10이나 20 정도를 사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ATC의 핵, 소프트 돔 미드레인지가 달린 SCM50 이상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실 90년대 중반 이후, ATC는 우리 오디오계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스피커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스튜디오 모니터 출신이라는 태생이 갖는 강인함과 내구성에 맞물려 패시브 및 액티브 버전의 제공으로 인한 다양한 사용상의 편의성이 더해져, 이제는 단순 2채널이 아닌 멀티채널까지 커버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이다. 소니 스튜디오나 텔락, THX 등에 ATC가 런칭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거듭된 유닛의 개량으로 사운드 면에서 보다 스위트하고 부드러워져서 이른바 명품 마케팅에도 성공하고 있다. 말하자면 엄청난 다이내믹스를 요하는 오케스트라나 해비 메탈부터 섬세한 뉘앙스를 중시하는 클래식의 소편성이나 보컬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전천후 스피커 시스템으로 거듭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대부분이 인하우스(Inhouse) 제작이라는 것.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유닛을, 비파에 특주한 트위터만 제외하곤 오로지 자체 생산한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트위터마저 자체 개발하기에 이르렀으니 풀 ATC 유닛의 시스템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현재 준비 중인 인티 앰프, CDP, 튜너 등을 생각하면 대체 ATC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다행히 이번에 DST 코리아의 협조로 영국 글로스터셔(Glocestershire)에 있는 ATC 본사를 방문할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 되었다.
뮌헨에서 열린 하이엔드 오디오 쇼의 취재를 마치고 영국 런던에 도착한 것은 4월 28일 저녁 8시경. 혼잡한 스탠스테드 공항을 나오니 ATC 관계자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리차드라고 밝힌 이 분은, 현재 ATC에서 인클로저 공정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멀리 글로스터셔에서 직접 차를 몰고 공항에 나와 준 것이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서글서글한 인상이 이내 친근감을 갖게 했다.
인근 호텔에 여장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은 후 룸에 돌아오니 피곤이 밀려왔다. 일행이 머문 래디슨 호텔(Radisson Hotel)은 별 다섯 개 클래스로서, 어마어마한 높이의 홀 한 가운데 무려 4천여 병의 와인을 채워놓은 창고를 설치한 바(BAR)로 유명하다. 실제 와인을 꺼내기 위해 피아노 줄을 매단 여성이 곡예를 하듯 자유자재로 그 높은 곳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아마 이런 곳에서 와인을 마시다가 울컥 속이 뒤집히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아무튼 한국에서 온 기자의 취재를 위해 이런 고급 호텔을 준비한 ATC의 배려에 고맙기도 하고, 그간 꾸준히 ATC 런칭에 힘을 기울여 온 DST 코리아의 위상을 역으로 읽을 수 있어서 흐뭇하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9시에 로비에 나가보니 리차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도착할 때부터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출발 당일에도 비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ATC의 본사와 공장이 위치하고 있는 글로스터셔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3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조금만 더 가면 웨일스가 나오므로, 거의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접경 지대에 있다고 보면 된다. 창밖으로 푸르게 펼쳐진 장대한 녹지대를 바라보며, 가끔 풀을 뜯는 양떼를 만나기도 하고 일정한 색깔의 지붕과 벽을 유지한 채 점점이 놓여있는 인가들을 지나치면서, 참 공기 좋고 조용한 지역이구나 생각했다. 여기에 계속 빗방울이 떨어지니 영국의 전형적인 날씨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벽난로 앞에서 아가사 크리스티를 읽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리차드에 따르면 작년 6~7월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고 한다. 마치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듯 쉴 새 없이 내려 일부 지역은 아예 마을 전체가 침수되는 현상도 빚었다고 한다. 이때 ATC도 전기가 끊어져 1주일간 통조림만 먹으며 촛불을 켜놓고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고 한다. 참, 목가적인 풍경 이면에는 이런 살벌한 자연의 야성(?)이 도사리고 있으니, 결코 사물의 한 면만 바라봐선 안 되는 모양이다.
ATC로 가는 길에 리차드와 자연스럽게 이 회사의 역사며 창업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ATC가 발족한 것은 1974년으로, 빌 우드맨(Billy Woodman)이라는 사람이 프로페셔널 음향에 납품할 유닛 드라이버를 제조하면서 시작했다. 그 최초의 모델은 PA 75-314로, 12인치 유닛이었다. 파워 핸들링이 높고, 디스토션이 적은 고성능 덕분에 이내 이 유닛은 프로의 세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고 이에 우드맨의 연구는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76년은 ATC의 역사를 논할 때 획기적인 해에 속한다. 바로 이때 ATC의 자랑인 소프트 돔 미드레인지 유닛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소프트 돔은 그 성격상 트위터에 국한시킬 수밖에 없는데, 이를 어떤 착상으로 미드레인지에 도입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유닛이 그려내는 자연스런 음향과 뛰어난 다이내믹 레인지는 스튜디오 모니터계에 혁신을 몰고 왔다.
당시 핑크 플로이드나 슈퍼 트램프가 공연을 펼칠 때면 이 ATC 유닛을 중심으로 한 PA 스피커를 사용했다고 한다. 음향에 있어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들이 ATC를 선택한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한편 이 유닛은 현재 ‘SM 75-150S’로 진화했다.
소프트 돔 미드레인지 이후 ATC의 또 다른 도약은 스피커를 액티브화한 것이다. 여기는 단순히 파워 앰프를 물린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두 개 이상의 유닛이 일체감을 갖고 움직이려면, 위상을 정확히 컨트롤할 수 있는 크로스오버가 필수적이다. ATC는 ‘EC 23’이라는 액티브 크로스오버를 개발, 이른바 ‘페이즈 코렉션’(Phase Correction)에 있어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이런 결과 탄생한 SCM50A와 100A는 당초 덴마크의 한 라디오 방송국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방송국의 성격상, 이동이 용이하고, 액티브 타입이어야 하며, 어떤 녹음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는 내구성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었는데, ATC는 이에 부합된 답안을 내놓은 것이다.
또 트위터, 미드레인지, 우퍼에 각각 출력이 다른 파워 앰프를 세 개나 독립해서 물린 것도 대단한 성과라 하겠다. 물론 이 모델들은 민생용으로도 발표되어 한동안 많은 애호가들이 파워 앰프에 대한 가격적인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스피커로 사랑받은 바 있다. 개인적으로도 패시브 타입보다는 액티브 타입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ATC의 세 번째 도약은 일렉트로닉스 계열의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이뤄진다. 1996년의 일로써, 본격적인 분리형 앰프를 낸 것이다. SCA2 프리와 SPA2-150 파워가 그 주인공이다. 그간 패시브 타입의 ATC를 사용하던 애호가들에게 딱 맞는 제짝 앰프가 등장하면서 더욱 ATC의 사용성이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한편 파워 앰프는 현재 SIA2-150으로 진화했다.
ATC 스피커의 비밀 중의 하나는 SL 테크놀로지라는 독자적인 기술이다. 이것은 10～15Hz에서 100Hz에 이르는 저역부와 3kHz 언저리의 고역부를 중점적으로 코렉션에서 이 부분에 나타날 수 있는 왜곡을 제거하는 데에 있다. ATC 스피커가 아무리 거대화되고 유닛 구성이 복잡해져도 마치 단 하나의 유닛에서 나오는 듯한 통일성과 정확성을 유지하는 데엔 SL 테크놀로지라는 독자 기술이 개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ATC에 관계된 자료를 읽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글로스터셔에 도착했다. 참고로, 리차드란 친구는 대단한 스피드광이어서 평균 시속 150km로 질주하는데,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로수나 수풀이 쌩쌩 스쳐간다. E.A.R.의 주재자 팀 데 파라비치니도 소문난 스피드 애호가로, 직접 비행기까지 몬다. 과연 스피드를 추구하는 현대 오디오와 제작자의 취향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잉글랜드에선 캠브리지 지역에 많은 오디오 회사들이 밀집해 있다. 굳이 메리디언이나 B&W, E.A.R. 등을 논하지 않아도 말이다. 반면 글로스터셔 지역은 1차 대전 때만 하더라도 군수 산업의 중심지여서 철강, 자동차 등이 융성했다고 한다. 인근에 ATC 말고도 어쿠스틱 에너지며 네임 오디오 등이 자리 잡은 것을 보면, 런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결코 얕잡아봐선 안 된다.
아니, 인하우스 팩토리를 지향한다면 이렇게 도시에서 떠나 세속과 담을 쌓고 제조 공정에 집중하는 편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많은 하이엔드 메이커들의 공장이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몇 백 년 전에 쌓아 놓은 돌담길을 따라 비좁은 시골 도로를 달리다 보니 드디어 ATC 마크가 보였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건물 세 개가 놓여 있는 곳으로, 시간에 맞춰 창업자 빌리 우드맨과 현 경영 담당 CEO 밥 폴리(Bob Polley)가 마중을 나왔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인사하다 보니, 두 분 모두 전형적인 영국 신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한 콤비 복장에 가디건 차림까지, 마치 대학 교수를 연상케 하는 풍모다.
현재 ATC 본사 및 공장은 크게 세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편의상 맨 앞에 있는 것부터 A,B.C 순으로 나눠서 설명하겠다. 우선 A동으로 말하면, 일종의 유닛 생산 공장이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유닛 제조에 관련한 코일이며 드라이버 등의 부품들로 가득 차 있다. 맨 뒤의 C동은 인클로저 제조 공장으로, 우리를 안내한 리차드가 활약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가운데 B동은 일종의 본사인데, 여기엔 마케팅이며 해외 세일즈에 관한 사무뿐 아니라 유닛과 인클로저를 조립해서 완성품을 생산하는 공간이 있고, 일렉트로닉스 관련 제조 공정도 있으며, 전용 리스닝 룸도 있다. 한 마디로 ATC의 중추 신경이 모인 곳이라 하겠다.
일단 점심시간이었으므로 인근 식당에서 환담을 나누며 식사를 했다. 지어진 지 500년쯤 되어 보이는 저택을 개조한 레스토랑인데, 별도의 룸에 테이블을 세팅했으므로 다른 손님들과 부딪히지 않고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엔 빌리와 밥 외에 벤이라는 분이 함께 자리했는데, 그는 빌리가 유닛을 설계하거나 스피커를 디자인할 때 보조하는 일 외에 일렉트로닉스 생산에도 관여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ATC에서 전가의 보도로 활약하는 셈이다. 아직 젊고 팔팔한 나이여서, 향후 빌리가 은퇴하면 벤이 그 자리를 이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런 자리에 동석시킨 것이 아닐까? 아무튼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임엔 분명하다. 공교롭게도 셋의 이름이 모두 B로 시작하는 이들은 취미도 모두 낚시다. 당연히 화제는 낚시로 시작해서 날씨 이야기며, 여행, 음악 등으로 이어지다 ATC에 이르렀다. 마침 ATC는 새롭게 플래그십 모델을 준비 중에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개발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은 뒷부분에 따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현재 ATC에는 18명의 인원이 근무하고 있다. 전술했듯 빌리가 회장이고, 밥이 경영을 맡고 있으며 벤이 프로덕션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한편 일렉트로닉스 쪽은 예전에 팀 아이삭 (Tim Isaac)이 담당했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피트 거피(Pete Guppy)란 인물이 총괄하고 있다.
이 중 드라이버 제조에 6명이 투입되고 있으나, 실제 이들은 드라이버만 제작하지 않는다. 때론 인클로저도 만들고, 또 조립도 한다. 즉, 그때그때 필요한 공정이 생기면 움직이는 방식인데, 한 가지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처음 방문한 A동은, 커다란 홀을 중심으로 두 개의 작은 룸과 끝 쪽에 각종 공작 기기를 배치해놓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밥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대개의 스피커는 콘, 코일 그리고 마그넷으로 구성된다. ATC의 특징은, 코일을 감은 드라이버의 움직임을 보다 원활히 하고, 폭을 크게 하기 위해 숏 보이스 코일에다 강력한 마그넷 장착을 골자로 한다. 물론 이런 발상을 한 유닛 메이커는 꽤 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무엇보다 ATC가 갖고 있는 마그넷에 관한 원천 기술을 쫓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ATC는 미국 국방성과 연계해서 방위 산업에 필요한 마그넷 관련 기술을 자문해주고 있고, 컨티늄 오디오도 자기 부양 턴테이블을 처음 구상할 때 ATC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이 부분은 공개될 수도 없으려니와, 설령 알아낸다고 해도 이쪽 관련 기술이 전무한 필자에겐 그림의 떡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처음 방문한 곳은 A동의 입구에 면한 작은 룸이다. 가보니 50대 아주머니 한 분이 코일을 감고 계셨다. 그런데 코일의 형상이 독특하다. 일반적인 원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스퀘어 타입이다.
실은, 원형의 코일을 감게 되면, 그 단면을 살펴볼 때 코일과 코일 사이에 미세하게나마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음이 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직사각형으로 하면 코일 사이에 결코 틈이 있을 수 없다. ATC의 비밀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갭에 코일을 감고 있는 이 아주머니는 수(Sue)라는 이름을 가진 분인데, 벌써 수 십 년간 이 공정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정교한 손놀림은 스위스의 시계 장인을 보는 듯해서 시작부터 긴장감을 안겨주고 있다.
다른 룸에 가보니 코일을 감은 갭을 검사하는 파트가 있다. 매우 세밀하게 테스트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오차가 발생하면 나머지 공정을 마쳤을 경우 입게 되는 피해는 심각하다. 밥에 따르면 ATC의 유닛은 제조 단가가 많이 들기 때문에 불량품의 생산을 최대한 억제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현재의 불량률은 0.5%. 그러니까 1,000개에 하나 꼴로 불량품이 나온다니, 거의 무시해도 좋을 수치다. 실은 ATC의 유닛은 일부러 좌우 페어를 맞출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아무리 크게 봐도 유닛 간에 0.5dB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숙련된 장인의 손길을 거쳐 완전 수공업으로 생산되는 공정이 자동화된 공정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스파이더를 콘에 붙이는 작업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 소프트 돔의 비밀을 또 발견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소프트 돔의 앞면은 매우 부드럽고 또 약해 보인다. 그런데 내부를 보니 역시 숏 보이스 코일로 제조했지만, 매칭된 마그넷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겉은 유해도 속은 강한,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스타일인 셈이다.
왜 소프트 돔이 음질상 유리한가? 구조상 넓은 방사 패턴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약 80도 정도의 방사각은 음의 분산 면에서 매우 뛰어난 효과를 지닌다. 거기에 플랫한 주파수 특성을 가지는 것도 큰 강점이다. 한번 소프트 돔 중역에 중독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빌리가 구상한 소프트 돔 트위터의 시제품을 만져볼 수 있었는데, 미드레인지와 비슷한 구조이되 모양은 작았다. 앞으로 어떤 활약을 펼치지 자못 기대가 된다.
이어서 맨 끝 쪽의 공구가 밀집한 지역을 이들은 ‘툴 룸’(Tool Room)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공장 하면 연상하는 공작 기기들이 가득했다. 특히, 이 기계를 다루는 분의 기름때가 가득한 얼굴을 보니, 아무나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설치된 기구 중 하나는 앞으로 ATC가 발표할 인티 앰프의 프런트 패널을 만들고 있었다. 일종의 선반으로 정밀하게 모양을 깎고 또 다듬는데, 얼핏 봐도 보통의 솜씨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100% 인하우스 제작을 표방하는 ATC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어서 C동으로 갔다. 여기는 캐비닛을 실제 제조하는 공장으로, 문을 여니 선반 가득 이미 만들어 놓은 인클로저가 가득했다. 마침 앞으로 시연할 ‘EL 150’이란 모델을 만날 수 있었는데, 적층 합판과 MDF 그리고 버 마그놀리아(Burr Magnolia) 무늬목 등을 교묘하게 배합해서 절묘한 형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런 결과물을 얻기까지 이 공장에서 얼마나 많은 인클로저가 제작되었을지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탁 막힌다.
맨 끝엔 목공실이 있었는데, 안내를 맡은 밥이 먼지 좀 뒤집어쓸 각오를 하라고 한다.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우주인처럼 특수 복장을 한 남자가 연신 자동 톱으로 합판을 깎고, 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동작을 멈추더니 헬멧을 벗었다. 그가 바로 리차드였다.
어쩌면 스피커 제작에서 가장 하드한 일이 바로 인클로저 제작이 아닐까 싶다. 가장 노동집약적인 분야로, 한국에서는 아예 이런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십 년 이상 뼈를 깎으며 이런 일을 맡은 리차드를 보니 갑자기 존경심이 솟아나고 말았다. ATC 하면 궤짝과 같은 인클로저를 연상하지만 워낙 모양이 투박해서 상대적으로 유닛의 존재감에 가려지고 마는데, 막상 리차드가 하는 일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앞으로 El 150이라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클로저까지 만들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B동은 크게 두 파트로 구분되어 있다. 한쪽엔 조립 공정과 연구실이 있고 또 한쪽엔 일렉트로닉스 관련 부스와 시청실이 있다. 시간 관계상 연구원들과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현재 런칭 중인 EL 150과 앞으로 개발할 CDP, 튜너 등으로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한편 일렉트로닉스 쪽에 가보니, 젊은 여성이 열심히 기판에 납땜중이다. 여성이 이런 일을 하는 게 흔치 않아서 살펴보니 최근에 개발된 인티 앰프를 제작하고 있었다. 각종 부품이 가득한 선반이며 정리함으로 미뤄볼 때 일일이 손으로 앰프를 만드는 것인데, 이 역시 많은 시간과 공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무튼 이 모든 견학을 마치고 시청실에 들어오니 문제의 EL 150이 인티 앰프와 매칭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클래식이며 재즈 등을 골고루 들어봤는데, 예전의 ATC와는 확연히 다른, 매우 질감이 좋고, 나긋나긋하며, 스피디한 음을 들을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약 열 댓 평의 공간에 심플하게 장식된 인테리어가 큰 부담 없이 음악에 몰두하게 한다. 그 한 구석에 빌리가 소파에 점잖게 앉아 있었는데, 드러내지 않지만 상당한 위엄과 권위를 느끼게 한다. 하긴, 스피커 유닛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종합 오디오 메이커로 발돋움한 기업을 우뚝 세운 인물이니, 저런 권위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이 스피커의 형상이 기존 박스형과 너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이번에는 라운드 형태의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또 명품 마케팅에도 관여하는 ATC인지라 이런 세련된 디자인의 스피커도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기존의 박스형은 절대로 포기한 것이 아니며, 여기에 라운드 스타일이 추가된 것이라 한다.
전면에서 보면 상당히 커 보이지만, 두께가 얇고, 인클로저의 색도 밝고 화사해서, 기존의 남성적 이미지에서 많이 탈피한 모양새를 갖고 있다. 고급스런 가구와 어울린다면, 장식적인 면도 대단하리라 여겨졌다.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ATC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A동 입구에 보면 낡은 사진 하나가 액자에 담겨 있다. 모두 젊은 남녀들로, 어느 공장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다. 알고 보니 초기 ATC에 재직했던 인물들이 단체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중 몇은 아직도 이곳 공장에서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이 사진을 보면, 장차 힘차게 뻗어나갈 ATC의 기세를 읽을 수 있다. 젊고, 에너지가 넘치며, 뭔가를 이룩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하다. 그런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사진 속에서 읽혔다. 그리고 빌리는 아직도 그 열정을 잃지 않고 트위터를 개발하고, 신 모델을 분주히 발표하고 있다. ATC의 신화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 기백과 창의성에 큰 경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