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무겁고 단단한 스피커가 소리도 좋다. 피크 컨설트
애주가들이라면 혹시 알지 모르겠지만, ' 보드카 벨트 ' 라는 단어가 있다. 즉, 보드카를 주로 마시는 나라들을 일컫는 말인데, 북구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이 벨트에 속한다. 뭐 이 지역 사람들이라고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지 않겠는가 마는, 아무래도 주종목이 보드카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벨트에 속한 덴마크와 스웨덴은 언어도 서로 비슷하고 게르만족의 한 분파임도 비슷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서로 침략하고 또 침략당해온 오욕의 세월을 갖고 있다. 최근 오디오 업계에도 이 두 나라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바, 특히 덴마크의 기세가 무섭다. 스웨덴이 이쪽 업계에서 분발하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덴마크의 약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과연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필요한 모양이다.
아무튼 이번에 만난 덴마크의 신진 스피커 브랜드 피크 컨설트의 대표 페르 크리스토퍼슨 (Per Kristoffersen)은, 이제 갓 마흔을 넘긴, 한참 일에 몰두하고, 창조력이 정점으로 향하는 시기에 달한 인물이다. 어릴 적부터 스피커 자작에 남다른 취미를 보였고, 한때 군에 재직한 적도 있는, 스키퍼 설계자로서는 다소 이색적인 경력도 있지만, 기본은 역시 엔지니어.
평소 밀도감이 높은 중역을 베이스로 한, 단단하고 야무진 저역과 풍부한 고역을 자랑하는 피크 컨설트의 비밀을 조금이라고 알고 싶었던 필자는, 이번 인터뷰가 무척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인터뷰어 : 이종학
인터뷰이 : 페르 크리스토퍼슨
우선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번이 첫 방한인가요 ?
PK : 네. 그렇습니다. 참 멀리서 왔네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잠깐 해주실까요? 어떻게 스피커 자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PK : 열 살 무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폐차장에 버려진 스피커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야모(Jamo)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기억되는데, 이것을 한번 고쳐서 음을 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닛과 크로스오버를 떼어내고, 새로 인클로저를 짜서 집어넣게 되었죠. 소리나 나는 모양이 흥미롭더군요. 이게 결국 취미로 발전해서, 스피커 제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군에 있었다던데, 약간 이색적인 경력이군요.
PK : 덴마크라는 나라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아서, 정규군 외에 별도의 예비군 제도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예비군이 참가할 수 있게 한 것이죠. 저는 87년부터 94년까지 군에 있었습니다. 일종의 정규군에 들어간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도 여가 시간에는 스피커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형태로 만들어본 다음, 주변에 나눠주는 식이었죠. 혹독한 군 생활에서 이렇게 나 혼자 뭘 꾸물거리며 만든다는 일은 정서면에서도 상당히 유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군을 제대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라도?
PK : 93년도에 보스니아 내전에 참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이듬해 미련 없이 군복을 벗어버렸죠.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뭔가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절실히 하고 싶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스피커 제조를 하게 되더군요.
보스니아 내전이라 ... 뭐, 이 부분은 저도 따로 묻고 싶지 않군요. 그럼 잠깐 음악에 대해 물어보겠습니다. 언제부터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PK : 어릴 적에 라디오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때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 스피커 자작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을 텐데요.
PK : 잘 알겠지만, 스피커에 따라 좋아하는 음악의 표정이 바뀝니다. 바로 그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좀 더 베이스를 나오게 한다거나, 트레블을 올린 음을 만든다거나 ... 그래서 오랫동안 다른 스피커 흉내도 내보고, 짝퉁도 만들어보고, 새로운 컨셉으로 제작도 해본 것이죠.
한때 오디오 관련 컨설턴트로 유명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PK : 피크 컨설트를 창업하면서 보다 이쪽 세계를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싶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컨설턴트라는 것은 단순히 고객에게 이 스피커가 좋다, 저 앰프가 낫다 라고 소개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본은 음악실을 짓는 데부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리스닝 룸 전체를 설계하고, 그 음향을 분석하고, 애호가의 성향을 이해하고 ... 이렇게 큰 그림부터 시작해서 차츰 그에 걸맞는 제품을 찾는 식이죠. 참, 이런 일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룸 어쿠스틱에 관한 공부도 많이 되었고요.
피크 컨설트가 처음 내놓은 제품이 뭐였나요?
PK : 1996년, 인코그니토(Incognito)라는 제품이 데뷔작이었습니다. 이런 작명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전적으로 “익명의, 가명의”라는 뜻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저는 스피커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말하자면 익명의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죠. 또 리얼 우드를 썼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군요. 이런 두 가지 컨셉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우리 제품에 공통된다고 하겠습니다. 일종의 설계 이념인 것이죠.
리얼 우드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까요?
PK : 보통 MDF나 HDF를 스피커 인클로저로 많이 사용합니다. 저는 HDF를 기본으로 하지만, HDF끼리만 접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HDF가 갖고 있는 리조넌스 주파수가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하지만 HDF와 리얼 우드를 접합하면 결국 리조넌스 주파수가 매우 낮아지게 됩니다. 가청 주파수 대역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죠. 즉, 인클로저에서 발생하는 공명을 이런 식으로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피크 컨설트의 제품들을 보면, 우선 인클로저의 만듦새에 놀라게 됩니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아플 정도로 단단하고 또 안길이도 깊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PK : 무엇보다 덴마크의 뛰어난 가구 제조 전통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분야에 장인들이 많이 있죠. 특히 저희 회사에는 경력이 15년 이상 되는 장인들이 꼼꼼하게 인클로저를 제작합니다. 사실 저희가 주로 쓰는 스카닝 드라이버는 기본적으로 상당히 무겁습니다. 이를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선 프런트 배플의 두께가 상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면뿐 아니라, 옆면과 뒷면 모두 두꺼운 HDF를 사용합니다. 또 이를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유닛 주변에 알루미늄 링을 둘러서 나사가 제대로 박히게 만들어야 하고요. 안길이가 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닛이 숨을 쉬게 하자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뒷공간으로 음이 빠지도록 만든 겁니다.
크로스오버는 어떤가요? 특별한 제조 비법이 있다면?
PK : 저희는 각 유닛별로 일종의 챔버를 만들어 연결한다는 컨셉을 갖고 있습니다. 즉, 2웨이면 2개 이상, 3웨이면 3개 이상의 블록을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그 각각의 챔버 뒷편에 해당 주파수 대역을 담당하는 크로스오버를 부착합니다. 이 크로스오버는 듀룬트사의 부품을 중심으로, 최고의 것만을 선정해서 만드는데, 상당히 사이즈가 큽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나눠서 부착하면 공간에 대한 여유도 확보할 수 있을뿐더러, 일종의 크로스 토크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스카닝 유닛을 특별히 고집하는 이유라도?
PK : 개인적으로 스카닝 박사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또 함께 작업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유닛이 세상에서 제일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정확성이 뛰어나죠. 또 제가 주문한 유닛은 직접 제작에 참여해서 원하는 스펙으로 만듭니다. 이러니 스카닝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번에 런칭하는 드래곤 이야기를 해보죠. 언제부터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까?
PK : 실은 서기 2000년경부터 MTM 방식의 스피커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가운데에 트위터를 두고, 그 위아래에 미드레인지를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끝에 이제야 그 결과물이 나온 겁니다.
드래곤 역시 여러 개의 블록으로 이뤄져 있습니까?
PK : 물론입니다. 크게 6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거기엔 제일 밑에 따로 크로스오버만 설치한 챔버도 포함됩니다.
이런 제품을 생산하려면 아무래도 많은 인원이 참여해야 할 텐데요.
PK : 저희 회사엔 약 1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합니다. 그러나 특정 파트를 맡아 콘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일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일단 각 제품마다 생산 책임자를 선정합니다. 그리고 그가 전체 공정을 지휘해서 다른 이의 협조를 받아 완제품을 생산하고, 그 뒤에 직접 사인을 합니다. 나중에 고장이 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가 책임을 지고 고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유닛을 보니 가운데에 조금씩 구멍이 나 있군요?
PK : 일종의 공명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스카닝에 특주했습니다.
두 개의 6인치 미드레인지와 두 개의 11인치 우퍼는 모두 스카닝제이군요. 그럼 트위터는 어느 회사 제품입니까?
PK : 스캔스픽제로, 듀얼링 레디에이터라는 모델을 특주한 것입니다. 사실 본 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그 결과, 트위터 블록만 따로 떼어내어 재보면 무려 36Kg에 육박합니다.
대단하군요. 미드레인지 역시 챔버 구성이 독특하군요. 위에는 리얼 우드를 댔고, 옆에는 HDF에 색을 칠한 형태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PK : 디자인적인 요소보다는, 이렇게 오거닉과 논 오거닉 소재를 함께 쓰면 여기서 발생하는 레조넌스 주파수가 밑으로 뚝 떨어집니다. 즉, 중역대에서 재생하는 주파수 대역과는 무관해지는 것이죠. 참고로 본 기의 모든 인클로저는 앞면, 옆면, 뒷면 할 것 없이 모두 6Cm 두께의 HDF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크고, 무거울수록 좋은 소리가 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엄청난 제품이 탄생한 것이죠.
시청을 해보니 그간 얼마나 힘들여 제작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아무쪼록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이 있기를 기원하며,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합니다.
PK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