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노 카르미뇰라는 파비오 비온디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탈리안 바로크에 있어서는 그에 못지않은 젊은 대가입니다. 이탈리아 트레비소에서 태어난 카르미뇰라는 베니스지방의 유력 음악가문 출신입니다. 처음에는 아버지 안토니오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나중에는 루이지 페로, 나탄 밀스타인, 헨릭 셰링에게 사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메인스트림, 즉 현대식 바이올린 연주로 여러 국제상을 받으며 세계음악계에 데뷔했으나 이후 바로크 음악과 해석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력으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비발디입니다. 비발디 음악이 베니스 지방 특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원래 그는 94년 디복스(Divox)레이블에서 발표한 "사계" 음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만 - 우리나라에서는 97년에 히트한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지난해 가을 소니 클래시컬 (sony classical)로 이적하면서 첫 음반으로 "사계"를 새로 녹음했습니다.
당시에는 악단이 '소나토리 데 라 지오이오사 마르카 (sonatori de la Gioiosa Marca, 즐거운 마르카의 음악가들)'였는데 이번에는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 (이하 VBO로 약칭)로 바뀌었습니다.
전작에서도 나타났던 바, 카르미뇰라 사계의 특징은 다이내미즘입니다. 94년 Divox반에서도 파비오 비온디에 맞먹는 다이내미즘과 파격적인 해석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었는데 이번 버전에서는 그러한 면이 더욱 강화되어 있으며, 장식음의 사용 등에 있어서도 더욱 능수능란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는 사계절의 모습을 그린 소네트 (서양 詩 형식의 일종) 내용을 음악으로 옮긴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소네트 내용을 펼쳐놓고 그런 풍광과 정서가 얼마나 잘 그려지고 있느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됩니다.
소네트는 누가 쓴 것이라고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대개의 전문가들은 비발디 자신이 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비발디는 이 소네트 외에도, 악보 곳곳에 이건 새 소리, 이건 개 소리 하는 식으로 상세한 각주를 달아 연주자들이 참고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 일찍 언급하자면, 실제 사계에는 개 소리가 등장합니다. 봄2악장에서 솔로 바이올린이 춘곤증의 졸음을 묘사 (미~도~라~ 미레미~~)하고 있으면 비올라가 '~깽깽 ~깽깽' 하고 받쳐주는데, 이때 비올라가 묘사하는 것이 개짖는 소리입니다.
어딘가에 나온 강동석씨 인터뷰를 보면 '짖는 개를 어떤 종으로 할까'를 놓고 악단원들과 토론을 열심히 했다고 농담삼아 얘기하고 있는데, 아무튼 이런 것이 사계를 듣는 재미입니다.
봄1악장의 주제는 '봄~이 왔네 봄이 와-!'를 새들이 즐겁게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봄날씨의 변덕 때문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번개가 치기도 하지만 결국 대세는 새들의 봄노래의 승리입니다.
봄2악장은 말씀드린대로 초원에서 졸고 있는 목동과 그 옆의 양치기 개입니다. 배경에서는 현악기군이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소리를 묘사합니다.
봄3악장은 님프와 요정들의 흥겨운 봄맞이춤입니다.
여름 악장은 작열하는 태양, 땡볕을 받으며 일하는 시골사람들의 무기력함, 산비둘기와 뻐꾸기들의 한가로운 울음소리, 거친 폭풍우 등을 그립니다. 여름 2악장에서는 봄철 개 짖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졸던 목동이 이번에는 붕붕대며 달려드는 파리떼와 말벌 때문에 잠을 설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가을은 포도수확의 즐거움, 포도주에 만취함, 사냥 등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겨울에서는 강추위속에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위를 질주하는 사람들, 따뜻한 난롯가에 앉아 처마밑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아늑함 등등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카르미뇰라의 해석은 아주 활달하고 경쾌하며 격렬합니다. '봄'에서부터 연주 전체의 특성이 다 드러납니다. 베니스 토박이인 카르미뇰라의 '사계해석론'은, 소네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투박하고 노동의 땀에 절었지만 건강한 촌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런 측면을 리얼하게, 인간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족들이 소위 '목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원'의 모습으로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카르미뇰라 연주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약동하는 리듬감입니다. 늘어지는 곳이라곤 한군데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연주입니다. 비발디의 악보를 회화적으로 재현할 뿐 아니라 연극적으로 극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큰 활약을 하고 있는 존재가 안드레아 마르콘(Andrea Marcon) 입니다.
안드레아 마르콘은 소나토리 델라 지오이오사 마르카 시절부터 카르미뇰라와 호흡을 맞춰 온 바로크 음악가입니다. 쳄발로도 치고 지휘도 하며 악보 연구도 합니다. 많은 정격연주가를 배출해낸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의 합시코드와 오르간 교수이기도 합니다. 마르콘이 있음으로해서 이 연주는 균형과 무게중심을 갖는 듯 합니다.
카르미뇰라 자신은 종종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종달새처럼 극단으로 치달을듯한 기미를 보이는데, 선박의 닻과도 같은 역할을 마르콘이 맡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악단 전체의 오디오적 대역밸런스'도 매우 잘 잡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적절할때 받치고 나오는 저역 현 파트의 활약은 이 연주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입니다.
이런 포인트들은 정경화 버전에 대한 아쉬움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호프 정경화 여사가 올들어 내놓은 '사계'는 협연악단이 St.Luke's Chamber Ensemble입니다. 북미에서는 그런대로 알아주는 악단이라고 속지에 소개되어 있는데, 제가 듣기에는 그냥 그런 수준입니다.
정경화의 연주 자체는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격연주는 전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정격연주, 원전연주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영어에서는 그냥 periodic style이라고 하더군요. '그 시대 스타일로' 정도에 국한되는 말인데, 우리말로 '원전' '정격' 하면 원어에는 없었던 권위가 부여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경화는 결혼 이후 음악이 많이 바뀌었다고들 하죠. 소품집인 'Con Amore' 와 'Souvenirs' 를 놓고도, 최근작인 후자는 뭔가가 빠진 것 같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고 한층 원숙하고 편안해진 음악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경화의 사계 연주는 후자의 속성을 잇고 있습니다.
빠른 템포나 과도한 다이내믹스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증 없이 - 그렇다고 까르미뇰라가 강박증적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만 - 유연하고 풍성한 음색으로 풀어나갑니다.
그러므로 봄은 훨씬 따뜻하게 느껴지며 여름의 노곤함은 더욱 노곤하게 느껴집니다. 졸음이 몰려오는 계절, 아늑한 집안의 모습 (겨울 2악장)같은 것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의 표현력은 정경화편이 까르미뇰라보다 앞선다고 해야겠습니다.
정경화의 톤은 우아하고 화사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이내믹한 면이 떨어지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템포가 빠르지 않을 뿐입니다.
문제는 받쳐주는 악단입니다. 성 루크 체임버 앙상블의 기량은 안드레아 마르콘이라는 확실한 리더가 인도하는 VBO에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렇게 들리는 이유중의 하나로 저는 저역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정경화 버전만 그냥 듣고 있으면 그리 크게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카르미뇰라 버전과 한트랙씩 비교해 들어보면 확연한 차이는 바로 저역입니다. 음악해석상으로야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오디오파일의 입장에서는 카르미뇰라 버전으로 손이 더 많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카르미뇰라 판과 정경화판 가운데 전자쪽에 손이 더 가게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커플링입니다. 카르미뇰라 판에는 비발디의 후기 바이올린 협주곡 3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이것들은 음반으로는 처음 세상에 선보이는 것들(premiere recording)입니다.
죠르지오 치니 재단(Giorgio Cini Foundation)이 보유하고 있는 비발디 친필 악보 가운데 녹음된 바 없는 50여개의 협주곡을 안드레아 마르콘이 직접 뒤져서 골라낸 곡들(RV 257,376,211)입니다. 왜 진작 이런 곡들이 연주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과 찬탄이 동시에 나오게 되는 아름답고 활기찬 곡들입니다. 선율이 굉장히 풍부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곡들인데, 솔로 바이올린에게 대단한 활약을 요구하는 곡들입니다.
솔로 바이올린이 제2바이올린,비올라 등 다른 악기들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시기에서, 솔로 바이올린과 다른 악기들의 역할이 주연과 조연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들이 지금까지 거의 연주되지 않았고 녹음되지 않은 이유는 '연주하기가 어려워서'라는게 영국 그라마폰지의 해설인데, 카르미뇰라와 마르콘 콤비는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스피디하게 전곡을 몰아부칩니다.
정경화판은 2 for 1입니다. CD 2는 해설과 비디오트랙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경화가 해설하고 연주들려주고..하는 식으로 되어 있고 인터뷰 동영상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렇게 사돈 남말하듯 쓰냐하면, 이 해설판 씨디를 노트북 컴퓨터의 CD롬에 넣자 CD롬이 고장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이 껌벅껌벅하면서 씨디를 읽으려 노력하는 것 같은데 이게 한정없이 계속되고 이젝트 버튼을 눌러도 듣지를 않으며, 컴퓨터가 씨디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재부팅을 해도 똑 같은 현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양 백양 비디오를 비롯 온갖 잡CD를 넣어도 없던 일이라 씨디 불량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컴퓨터 고수님들의 도움을 바랍니다.) 정경화 판은 EMI 라이센스입니다.
굳이 또하나 문제를 삼자면, 정경화판의 케이스 (앞뒤로 열고 가운데 해설책자가 들어있는 2 CD용)도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제것만 그렇기를 바라지만, 씨디 가운데 구멍과 케이스 뚜껑이 딱 맞질 않아서 케이스만 열면 CD 1이 뒤집힌 채 가운데의 해설지 위로 떨어집니다. 씨디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불쾌하죠.
흠을 너무 많이 잡아버렸는데, 정경화판도 매우 좋은 연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영국의 그라모폰 3월호는 이 연주를 이달의 10대 추천음반 가운데 하나로 손꼽고 있으며 나이젤 케네디나 안네소피 무터의 최근 사계 녹음에 전혀 뒤지지 않는 좋은 연주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바로크 음악의 경우 원전연주를 선호하는 취향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 오디오파일적인 관점을 더하여 두 음반을 비교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합적으로 보아 저의 점수는 카르미뇰라 신녹음 별5개 만점, 정경화판은 별4개입니다.
이현식.
이런 이력으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비발디입니다. 비발디 음악이 베니스 지방 특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원래 그는 94년 디복스(Divox)레이블에서 발표한 "사계" 음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만 - 우리나라에서는 97년에 히트한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지난해 가을 소니 클래시컬 (sony classical)로 이적하면서 첫 음반으로 "사계"를 새로 녹음했습니다.
당시에는 악단이 '소나토리 데 라 지오이오사 마르카 (sonatori de la Gioiosa Marca, 즐거운 마르카의 음악가들)'였는데 이번에는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 (이하 VBO로 약칭)로 바뀌었습니다.
전작에서도 나타났던 바, 카르미뇰라 사계의 특징은 다이내미즘입니다. 94년 Divox반에서도 파비오 비온디에 맞먹는 다이내미즘과 파격적인 해석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었는데 이번 버전에서는 그러한 면이 더욱 강화되어 있으며, 장식음의 사용 등에 있어서도 더욱 능수능란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는 사계절의 모습을 그린 소네트 (서양 詩 형식의 일종) 내용을 음악으로 옮긴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소네트 내용을 펼쳐놓고 그런 풍광과 정서가 얼마나 잘 그려지고 있느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됩니다.
소네트는 누가 쓴 것이라고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대개의 전문가들은 비발디 자신이 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비발디는 이 소네트 외에도, 악보 곳곳에 이건 새 소리, 이건 개 소리 하는 식으로 상세한 각주를 달아 연주자들이 참고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 일찍 언급하자면, 실제 사계에는 개 소리가 등장합니다. 봄2악장에서 솔로 바이올린이 춘곤증의 졸음을 묘사 (미~도~라~ 미레미~~)하고 있으면 비올라가 '~깽깽 ~깽깽' 하고 받쳐주는데, 이때 비올라가 묘사하는 것이 개짖는 소리입니다.
어딘가에 나온 강동석씨 인터뷰를 보면 '짖는 개를 어떤 종으로 할까'를 놓고 악단원들과 토론을 열심히 했다고 농담삼아 얘기하고 있는데, 아무튼 이런 것이 사계를 듣는 재미입니다.
봄1악장의 주제는 '봄~이 왔네 봄이 와-!'를 새들이 즐겁게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봄날씨의 변덕 때문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번개가 치기도 하지만 결국 대세는 새들의 봄노래의 승리입니다.
봄2악장은 말씀드린대로 초원에서 졸고 있는 목동과 그 옆의 양치기 개입니다. 배경에서는 현악기군이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소리를 묘사합니다.
봄3악장은 님프와 요정들의 흥겨운 봄맞이춤입니다.
여름 악장은 작열하는 태양, 땡볕을 받으며 일하는 시골사람들의 무기력함, 산비둘기와 뻐꾸기들의 한가로운 울음소리, 거친 폭풍우 등을 그립니다. 여름 2악장에서는 봄철 개 짖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졸던 목동이 이번에는 붕붕대며 달려드는 파리떼와 말벌 때문에 잠을 설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가을은 포도수확의 즐거움, 포도주에 만취함, 사냥 등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겨울에서는 강추위속에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위를 질주하는 사람들, 따뜻한 난롯가에 앉아 처마밑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아늑함 등등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카르미뇰라의 해석은 아주 활달하고 경쾌하며 격렬합니다. '봄'에서부터 연주 전체의 특성이 다 드러납니다. 베니스 토박이인 카르미뇰라의 '사계해석론'은, 소네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투박하고 노동의 땀에 절었지만 건강한 촌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런 측면을 리얼하게, 인간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족들이 소위 '목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원'의 모습으로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카르미뇰라 연주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약동하는 리듬감입니다. 늘어지는 곳이라곤 한군데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연주입니다. 비발디의 악보를 회화적으로 재현할 뿐 아니라 연극적으로 극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큰 활약을 하고 있는 존재가 안드레아 마르콘(Andrea Marcon) 입니다.
안드레아 마르콘은 소나토리 델라 지오이오사 마르카 시절부터 카르미뇰라와 호흡을 맞춰 온 바로크 음악가입니다. 쳄발로도 치고 지휘도 하며 악보 연구도 합니다. 많은 정격연주가를 배출해낸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의 합시코드와 오르간 교수이기도 합니다. 마르콘이 있음으로해서 이 연주는 균형과 무게중심을 갖는 듯 합니다.
카르미뇰라 자신은 종종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종달새처럼 극단으로 치달을듯한 기미를 보이는데, 선박의 닻과도 같은 역할을 마르콘이 맡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악단 전체의 오디오적 대역밸런스'도 매우 잘 잡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적절할때 받치고 나오는 저역 현 파트의 활약은 이 연주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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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포인트들은 정경화 버전에 대한 아쉬움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호프 정경화 여사가 올들어 내놓은 '사계'는 협연악단이 St.Luke's Chamber Ensemble입니다. 북미에서는 그런대로 알아주는 악단이라고 속지에 소개되어 있는데, 제가 듣기에는 그냥 그런 수준입니다.
정경화의 연주 자체는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격연주는 전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정격연주, 원전연주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영어에서는 그냥 periodic style이라고 하더군요. '그 시대 스타일로' 정도에 국한되는 말인데, 우리말로 '원전' '정격' 하면 원어에는 없었던 권위가 부여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경화는 결혼 이후 음악이 많이 바뀌었다고들 하죠. 소품집인 'Con Amore' 와 'Souvenirs' 를 놓고도, 최근작인 후자는 뭔가가 빠진 것 같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고 한층 원숙하고 편안해진 음악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경화의 사계 연주는 후자의 속성을 잇고 있습니다.
빠른 템포나 과도한 다이내믹스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증 없이 - 그렇다고 까르미뇰라가 강박증적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만 - 유연하고 풍성한 음색으로 풀어나갑니다.
그러므로 봄은 훨씬 따뜻하게 느껴지며 여름의 노곤함은 더욱 노곤하게 느껴집니다. 졸음이 몰려오는 계절, 아늑한 집안의 모습 (겨울 2악장)같은 것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의 표현력은 정경화편이 까르미뇰라보다 앞선다고 해야겠습니다.
정경화의 톤은 우아하고 화사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이내믹한 면이 떨어지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템포가 빠르지 않을 뿐입니다.
문제는 받쳐주는 악단입니다. 성 루크 체임버 앙상블의 기량은 안드레아 마르콘이라는 확실한 리더가 인도하는 VBO에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렇게 들리는 이유중의 하나로 저는 저역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정경화 버전만 그냥 듣고 있으면 그리 크게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카르미뇰라 버전과 한트랙씩 비교해 들어보면 확연한 차이는 바로 저역입니다. 음악해석상으로야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오디오파일의 입장에서는 카르미뇰라 버전으로 손이 더 많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카르미뇰라 판과 정경화판 가운데 전자쪽에 손이 더 가게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커플링입니다. 카르미뇰라 판에는 비발디의 후기 바이올린 협주곡 3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이것들은 음반으로는 처음 세상에 선보이는 것들(premiere recording)입니다.
죠르지오 치니 재단(Giorgio Cini Foundation)이 보유하고 있는 비발디 친필 악보 가운데 녹음된 바 없는 50여개의 협주곡을 안드레아 마르콘이 직접 뒤져서 골라낸 곡들(RV 257,376,211)입니다. 왜 진작 이런 곡들이 연주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과 찬탄이 동시에 나오게 되는 아름답고 활기찬 곡들입니다. 선율이 굉장히 풍부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곡들인데, 솔로 바이올린에게 대단한 활약을 요구하는 곡들입니다.
솔로 바이올린이 제2바이올린,비올라 등 다른 악기들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시기에서, 솔로 바이올린과 다른 악기들의 역할이 주연과 조연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시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들이 지금까지 거의 연주되지 않았고 녹음되지 않은 이유는 '연주하기가 어려워서'라는게 영국 그라마폰지의 해설인데, 카르미뇰라와 마르콘 콤비는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스피디하게 전곡을 몰아부칩니다.
정경화판은 2 for 1입니다. CD 2는 해설과 비디오트랙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경화가 해설하고 연주들려주고..하는 식으로 되어 있고 인터뷰 동영상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렇게 사돈 남말하듯 쓰냐하면, 이 해설판 씨디를 노트북 컴퓨터의 CD롬에 넣자 CD롬이 고장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이 껌벅껌벅하면서 씨디를 읽으려 노력하는 것 같은데 이게 한정없이 계속되고 이젝트 버튼을 눌러도 듣지를 않으며, 컴퓨터가 씨디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재부팅을 해도 똑 같은 현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양 백양 비디오를 비롯 온갖 잡CD를 넣어도 없던 일이라 씨디 불량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컴퓨터 고수님들의 도움을 바랍니다.) 정경화 판은 EMI 라이센스입니다.
굳이 또하나 문제를 삼자면, 정경화판의 케이스 (앞뒤로 열고 가운데 해설책자가 들어있는 2 CD용)도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제것만 그렇기를 바라지만, 씨디 가운데 구멍과 케이스 뚜껑이 딱 맞질 않아서 케이스만 열면 CD 1이 뒤집힌 채 가운데의 해설지 위로 떨어집니다. 씨디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불쾌하죠.
흠을 너무 많이 잡아버렸는데, 정경화판도 매우 좋은 연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영국의 그라모폰 3월호는 이 연주를 이달의 10대 추천음반 가운데 하나로 손꼽고 있으며 나이젤 케네디나 안네소피 무터의 최근 사계 녹음에 전혀 뒤지지 않는 좋은 연주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바로크 음악의 경우 원전연주를 선호하는 취향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 오디오파일적인 관점을 더하여 두 음반을 비교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합적으로 보아 저의 점수는 카르미뇰라 신녹음 별5개 만점, 정경화판은 별4개입니다.
이현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