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러시아 피아니즘의 가장 주목받는 계승자 가운데 한사람인 미하일 플레트네프.
그가 많은 선배들의 미국 정복 전진기지가 되었던 카네기 홀에 입성했습니다. 지난해 11월 1일 열린 그의 카네기홀 공연은 지금 CD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습니다.
(너무 잘 팔리다보니 국내에서도 수입물량이 고갈되어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은게 흠입니다만, 메이저 레이블인 DG의 음반이니 곧 물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플레트네프는 1957년생입니다. 13세때 유소년 초기 음악교육을 담당하는 Central Moscow music school 입학했다가 불과 4년만에 모스크바 콘서바토리로 월반했고, 1978년 모스크바 콩쿨 우승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습니다.
1990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를 창립했습니다. 고르바쵸프의 후원을 받은 이 악단은 소련 최초의 독립 오케스트라입니다.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미국연주여행을 여러차례 가졌고, 카네기홀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주자로서 카네기홀 연주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 자신이나 음반사,평론가 모두 카네기홀 '데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휘와 피아노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똑같이 중요한 그의 양면입니다. 플레트네프는 한세대 전의 거장 피아니스트들처럼 작곡도 합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와 "호두까기인형 (the Nutcracker)"을 피아노편곡하기도 했습니다. (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전람회의 그림"과 함께 그 자신의 연주로 커플링돼 나온 음반도 있습니다. 레이블은 virgin classics로, 폭발적인 명연주입니다. )
그 외 유리 바쉬메트가 초연한 비올라 협주곡 등의 관현악곡도 작곡했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클라리넷용으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플레트네프 연주의 특징은 주관적 몰입의 제어를 중시하는 현대의 경향에 비추어 볼때, 주관과 개성이 대단히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는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대한 신념이 너무나 깊고 확고해 감상자의 선입견을 완전히 버리게 만든다.'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습니다.
연주회 프로그램은 바흐 / 베토벤 / 쇼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부조니가 편곡한 바흐의 샤콘느 -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 op.111 -
쇼팽의 스케르쪼 4곡이 연주되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굉장한 에너지소모를 요하는 레퍼토리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첫 곡인 샤콘느. 원래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일부인 것을 부조니가 오르간적 음향구조로 바꿔 피아노로 편곡한, 복잡한 성격의 곡이죠.
본란에서 언급한 바 있었던 백건우의 샤콘느 연주와 비교해 보면 빠른 패시지의 처리가 백건우보다 더욱 빠르고 변화무쌍합니다.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듣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루바토 경향도 강해서, '바흐보다는 부조니군..'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백건우 버전이 좀 더 무겁고 심각하게 들립니다. 백건우의 연주가 장년의 회한과 번뇌같은 정서에 닿아있다면 플레트네프의 연주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그것같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로 가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처럼 연주합니다.
일반적인 피아노소나타와 달리 2악장으로만 구성된 이 곡은 베토벤 음악인생의 총정리이자 인간과 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하여 모든 음악인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곡입니다.
플레트네프는 샤콘느에서의 격정에 고삐를 매고, 악보가 지시하고 암시하는 모든 디테일을 다 들려주겠다는 듯 세심하게 컨트롤된 행보를 이어갑니다. 플레트네프는 평론가 롭 코완과의 인터뷰에서, "이 소나타가 이날 프로그램의 중심"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설득력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쇼팽 스케르쪼 연주에서는 다시 샤콘느를 연주하던 플레트네프로 돌아갑니다.
영국의 음악잡지 '그라모폰'의 리뷰어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악마'라는 표현을 써 가며 플레트네프가 자신의 기교와 격정에 도취되는 바람에 스케르쪼의 잔잔한 시적 표현들이 가려졌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제 소감은 그런 측면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라이브 연주가 되었다는 쪽입니다.
플레트네프의 피아노 공연은 음향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합니다. 오케스트라에 버금간다는 피아노의 다양한 음향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이를 콘서트홀 어디에 있는 청중이든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플레트네프의 연주 철학입니다.
이를테면 스케르쪼 3번 같은 경우. 열손가락 모두로 쾅쾅대는 코다와 마치 '피아노에 해머가 존재하지 않는 듯' (드뷔시가 지향하는 소리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별빛처럼 흘러내리는 영롱한 스케일은 같은 악기에서 나는 소리가 맞는지를 의심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성격은 보너스 씨디로 넘어가면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제게 있어서, 이번 음반의 진짜 매력은 사실 베토벤 소나타보다는 이 보너스 씨디입니다.
이날 청중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고, 플레트네프는 무려 다섯곡의 앵콜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이 앵콜이 웬만한 연주회의 정규 프로그램을 찜쪄먹습니다.
앵콜곡 리스트입니다.
1. 라흐마니노프 Etude-tableau op.39 no.5
2. 스크리아빈 Poeme op.32. no.1
3. 스카를라티 소나타 D단조. K.9
4. 모즈코프스키 Etude de virtuosite.
마지막 앵콜은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입니다.
여기서부터 플레트네프는 완급을 완벽히 조절해가며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리아빈의 짙은 서정을 진하게 표현해 냅니다. 3번트랙 스카를라티 소나타에서는 날렵하고 가볍게 끊어치는 터치의 청각적 쾌감이 일품입니다.
모즈코프스키의 곡은 제목 그대로 '비르투오조란 이런 것'이라고 과시하는 소품입니다. 길이가 1분37초로 짧기도 하지만,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고 영롱한 터치가 경이롭습니다.
기교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몰아치기 때문에 디테일이 살아있으면서도, 곡의 뼈대가 어떤 것인지 큰 윤곽을 쉽고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 플레트네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정말 연주회장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몸이 달아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 '이슬라메이'에 가면 완전히 오르가즘입니다.
이제까지 열거한 곡을 다 연주해 내고서도 난기교 백과사전같은 8분짜리 곡을 조금도 지친 기색없이 쾌도난마처럼 해치우는 플레트네프는 슈퍼맨이라고밖에 달리 할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현장에서 이 상황을 마주쳤으면 저는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까짓 미스터치가 중요하냐 음악의 굵은 선이 더 중요하지..'라고 플레트네프 자신이 그랬지만 마지막 코다에서의 약간의 미스터치를 빼고는 기술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연주입니다.
음반을 다 듣고, 플레트네프를 "현존 피아니스트 가운데 가장 크고 강한 상상의 날개를 단 사람" 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기가 오를 듯한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살려준 녹음도 우수합니다. 별 다섯개 만점(★★★★★)입니다.
이현식.
플레트네프는 1957년생입니다. 13세때 유소년 초기 음악교육을 담당하는 Central Moscow music school 입학했다가 불과 4년만에 모스크바 콘서바토리로 월반했고, 1978년 모스크바 콩쿨 우승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습니다.
1990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를 창립했습니다. 고르바쵸프의 후원을 받은 이 악단은 소련 최초의 독립 오케스트라입니다.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미국연주여행을 여러차례 가졌고, 카네기홀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주자로서 카네기홀 연주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 자신이나 음반사,평론가 모두 카네기홀 '데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휘와 피아노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똑같이 중요한 그의 양면입니다. 플레트네프는 한세대 전의 거장 피아니스트들처럼 작곡도 합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와 "호두까기인형 (the Nutcracker)"을 피아노편곡하기도 했습니다. (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전람회의 그림"과 함께 그 자신의 연주로 커플링돼 나온 음반도 있습니다. 레이블은 virgin classics로, 폭발적인 명연주입니다. )
그 외 유리 바쉬메트가 초연한 비올라 협주곡 등의 관현악곡도 작곡했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클라리넷용으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플레트네프 연주의 특징은 주관적 몰입의 제어를 중시하는 현대의 경향에 비추어 볼때, 주관과 개성이 대단히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는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대한 신념이 너무나 깊고 확고해 감상자의 선입견을 완전히 버리게 만든다.'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습니다.
연주회 프로그램은 바흐 / 베토벤 / 쇼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부조니가 편곡한 바흐의 샤콘느 -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 op.111 -
쇼팽의 스케르쪼 4곡이 연주되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굉장한 에너지소모를 요하는 레퍼토리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첫 곡인 샤콘느. 원래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일부인 것을 부조니가 오르간적 음향구조로 바꿔 피아노로 편곡한, 복잡한 성격의 곡이죠.
본란에서 언급한 바 있었던 백건우의 샤콘느 연주와 비교해 보면 빠른 패시지의 처리가 백건우보다 더욱 빠르고 변화무쌍합니다.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듣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루바토 경향도 강해서, '바흐보다는 부조니군..'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백건우 버전이 좀 더 무겁고 심각하게 들립니다. 백건우의 연주가 장년의 회한과 번뇌같은 정서에 닿아있다면 플레트네프의 연주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그것같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로 가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처럼 연주합니다.
일반적인 피아노소나타와 달리 2악장으로만 구성된 이 곡은 베토벤 음악인생의 총정리이자 인간과 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하여 모든 음악인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곡입니다.
플레트네프는 샤콘느에서의 격정에 고삐를 매고, 악보가 지시하고 암시하는 모든 디테일을 다 들려주겠다는 듯 세심하게 컨트롤된 행보를 이어갑니다. 플레트네프는 평론가 롭 코완과의 인터뷰에서, "이 소나타가 이날 프로그램의 중심"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설득력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쇼팽 스케르쪼 연주에서는 다시 샤콘느를 연주하던 플레트네프로 돌아갑니다.
영국의 음악잡지 '그라모폰'의 리뷰어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악마'라는 표현을 써 가며 플레트네프가 자신의 기교와 격정에 도취되는 바람에 스케르쪼의 잔잔한 시적 표현들이 가려졌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제 소감은 그런 측면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라이브 연주가 되었다는 쪽입니다.
플레트네프의 피아노 공연은 음향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합니다. 오케스트라에 버금간다는 피아노의 다양한 음향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이를 콘서트홀 어디에 있는 청중이든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플레트네프의 연주 철학입니다.
이를테면 스케르쪼 3번 같은 경우. 열손가락 모두로 쾅쾅대는 코다와 마치 '피아노에 해머가 존재하지 않는 듯' (드뷔시가 지향하는 소리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별빛처럼 흘러내리는 영롱한 스케일은 같은 악기에서 나는 소리가 맞는지를 의심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성격은 보너스 씨디로 넘어가면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제게 있어서, 이번 음반의 진짜 매력은 사실 베토벤 소나타보다는 이 보너스 씨디입니다.
이날 청중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고, 플레트네프는 무려 다섯곡의 앵콜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이 앵콜이 웬만한 연주회의 정규 프로그램을 찜쪄먹습니다.
앵콜곡 리스트입니다.
1. 라흐마니노프 Etude-tableau op.39 no.5
2. 스크리아빈 Poeme op.32. no.1
3. 스카를라티 소나타 D단조. K.9
4. 모즈코프스키 Etude de virtuosite.
마지막 앵콜은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입니다.
여기서부터 플레트네프는 완급을 완벽히 조절해가며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리아빈의 짙은 서정을 진하게 표현해 냅니다. 3번트랙 스카를라티 소나타에서는 날렵하고 가볍게 끊어치는 터치의 청각적 쾌감이 일품입니다.
모즈코프스키의 곡은 제목 그대로 '비르투오조란 이런 것'이라고 과시하는 소품입니다. 길이가 1분37초로 짧기도 하지만,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고 영롱한 터치가 경이롭습니다.
기교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몰아치기 때문에 디테일이 살아있으면서도, 곡의 뼈대가 어떤 것인지 큰 윤곽을 쉽고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 플레트네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정말 연주회장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몸이 달아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 '이슬라메이'에 가면 완전히 오르가즘입니다.
이제까지 열거한 곡을 다 연주해 내고서도 난기교 백과사전같은 8분짜리 곡을 조금도 지친 기색없이 쾌도난마처럼 해치우는 플레트네프는 슈퍼맨이라고밖에 달리 할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현장에서 이 상황을 마주쳤으면 저는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까짓 미스터치가 중요하냐 음악의 굵은 선이 더 중요하지..'라고 플레트네프 자신이 그랬지만 마지막 코다에서의 약간의 미스터치를 빼고는 기술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연주입니다.
음반을 다 듣고, 플레트네프를 "현존 피아니스트 가운데 가장 크고 강한 상상의 날개를 단 사람" 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기가 오를 듯한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살려준 녹음도 우수합니다. 별 다섯개 만점(★★★★★)입니다.
이현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