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그런데, 막상 실제로 해보면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바흐의 칸타타 같은 경우도 감상을 하려면 독어-영어 대역 대본을 놓고 눈으로 따라가며 음악을 들어야 하지만 이 경우는 그래도 실제 연주장면이 어차피 서서 노래부르는 것일테니 그래도 낫습니다.

오페라는 극반 음악반인 종합예술입니다.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처럼 줄거리도 유명하고 아리아 몇곡만 알면 흐름을 따라가기도 쉬운 작품이라면 좀 괜찮습니다.

하지만 모짜르트의 "마술피리"처럼, 전문가들조차 모순투성이 줄거리라고 인정하는 오페라, 더구나 상당량의 非음악性 대사가 등장하는 '징슈필'(singspiel. 영어로는 sing + play)인 경우라면 문제가 커집니다.

이런 작품을 귀로만 듣고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죠. 그동안은 제대로 된 공연을 접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지만 이제 첨단 테크놀러지의 등장과 함께 세상이 좋아졌습니다. DVD가 등장한 것입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DVD는 제임스 레바인 지휘로 1991년에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공연의 실황입니다. 올들어 DG에서 발매된 클래식 DVD시리즈 가운데 하나입니다.

악단은 물론 메트로폴리탄 극장 전속 오케스트랍니다. 배역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밤의 여왕에 루치아나 세라 (Luciana Serra).

밤의 여왕의 딸 파미나(Pamina)역에 캐슬린 배틀(Kathleen Battle.)

파미나를 사랑하는 왕자인 타미노(Tamino)역에는 프란치스코 아라이자(Francisco Araiza).

타미노와 함께 파미나를 찾으러 나서고, 극의 양념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새잡이 파파게노 역에 만프레드 헴(Manfred Manfred Hemm).

파파게노의 짝인 파파게나에는 바바라 킬더프 (Barbara Kilduff).

파미나를 납치해 간 악당으로 1막에 나오지만 나중에는 진정한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로 드러나는 자라스트로(Sarastro)역에 쿠르트 몰(Kurt Moll).

자라스트로의 부하지만 비열하고 음흉하며 나중에는 밤의 여왕과 손을 잡았다 파멸하는 모노스타토스 역에 하인즈 제드닉(Heinz Zednik) 등입니다.

DVD영상이 시작되면 먼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인 링컨센터의 외경과 내부 모습이 나옵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91년초 시즌때 입석표를 구해 너댓번 메트 오페라를 직접 본 추억이 있습니다.

자라스트로 역의 쿠르트 몰

매주 토요일 아침 9시부터 메트에서는, 그날밤 공연부터 다음주 금요일 공연까지 1주일치의 입석표를 팔았습니다. 1층 맨 뒷자리 (머리위에 2층 객석이 있어서, 여기 서서 무대를 보면 위가 약간 짤려 보입니다.)가 12달러, 저 멀리 맨 꼭대기 자리가 9달러였습니다. 이걸 사느라고 토요일마다 아침7시부터 나가서 달달 떨며 줄을 섰더랬는데,가난한 학생 신분에 그렇게나마 표를 구해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로 감사하고 행복한 기회였습니다.

아무튼, 서곡을 지휘하는 레바인의 모습은 참 유쾌해 보입니다. 곡 자체가 유쾌한 분위기라 그랬겠지만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춤추듯 지휘하는 레바인의 모습은 곡의 분위기를 동작으로 보여주는 무용에 가깝습니다. 우선 시각적으로 매우 즐겁죠. 연주도 경쾌하고 강약대비가 뚜렷해서 이어질 본공연에 대해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서곡이 나오는 동안 무대위에서는 막이 올라가고, 카메라는 배경세트의 모습을 여러가지 컷으로 비춰줍니다. DVD화면을 캡춰해 올릴 장비가 없어서 보여드릴 수는 없는게 유감인데, 배경은 매우 단순화된 디자인입니다. 비슷한 시기 메트에 올랐던 라 트라비아타나 라 보엠이 고전풍의 화려한 무대디자인을 선보였던 것에 비하면 매우 미니멀리스틱한 접근입니다. 동화풍의 디자인이라고 표현해야겠습니다.

이어 타미노 왕자가 산속에서 용을 만나 기절하고, 그 용을 밤의 여왕의 신하들이 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 등장하는 용(서양식 드래곤)은 모여라 꿈동산식으로 코믹하게 처리가 돼 있습니다.

'마술피리'에는 마술에 관한 장면이 꽤 많이 나오는데, 전편에 걸쳐 다 이런 식입니다. 단순하고 코믹하며 동화적입니다. 밤의 여왕도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으며, 그냥 무대위를 걸어다닙니다.

하지만 유치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신화속의 이야기같은 내용이라곤 해도 바그너식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 이런 연출도 꽤 납득이 갑니다.

타미노 왕자 역의 프란치스코 아라이자는 용이 죽고 난 뒤 밤의 여왕의 시녀들로부터 받은 파미나의 초상을 들고 사랑에 빠져든 심정을 노래합니다. 타미노 왕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중요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아쉽게도 아라이자는 제게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무난한 가창이긴 했지만 고음역으로 가면 목소리가 불안정해지고, 이때문에 가슴뛰는 애절한 심정을 십분 표현해 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전편에 걸쳐서 이런 경향은 계속됩니다.

전반적으로 보아 아라이자의 타미노 왕자는 '범생이' 입니다. 원래 역할이 그런 면이 있습니다만, 아라이자의 타미노 왕자는 연기의 깊이가 떨어지고 가창도 별다른 감동을 전해주지 못합니다. 이 DVD의 다른 배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캐스팅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좌로부터 타미노와 파미나 - 모노스타토스 - 파파게노와 파파게나

이번엔 밤의 여왕입니다. 돌산을 가르고 처음 등장해서, 딸이 납치되어 간 이야기를 하며 딸을 구해달라고 타미노에게 명하는 장면. 밤의 여왕의 첫 아리아인데, 루치아나 세라는 목소리는 초고음의 처리가 상당히 힘찹니다. 음정도 매우 정확하며 빠른 기교가 구사되는 패시지도 무난하게 처리합니다.

그러나 아라이자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깊지 못합니다. 힘과 기교의 측면에서 타미노 역의 아라이자보다는 낫지만 연기력으로 보면 아라이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습니다.
나중에 나오는 복수의 아리아 (자라스트로에게 설득당한 딸 파미나를 찾아가, 자라스트로를 죽여 자신의 복수를 해 줄 것을 명하는 장면으로서, 너무나 유명한 바로 그 아리아)를 들어보면 이런 점이 더욱 확연해 집니다. A급이긴 하되 특급은 아니랄까요. 목소리로 연기하는 능력은 차라리 세 시녀가 더 나은듯 합니다. 앙상블도 좋고, 파파게노와 함께 코믹한 연기로 극의 감초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파파게노 역의 만프레드 헴은 대단히 인상깊은 명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노래도 훌륭하거니와 그 수많은 대사의 처리와 코믹한 푼수연기가 일품입니다. 그저 먹고 놀기 좋아하며 철부지 어린애같은 캐릭터인지라, 자칫 오페라 가수를 직업으로 하는 성인 성악가가 연기하기가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는데, 웬만한 연극배우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미나 역의 캐슬린 배틀도 훌륭합니다. 사실 마술피리는 누가 주인공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 곤란한 오페라라는게 제 생각인데, 이 공연을 보고 있으면 주인공은 파미나와 자라스트로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캐슬린 배틀의 파미나에는 순진무구한 소녀의 이미지에 약간의 교태가 더해져 있습니다. 사랑의 기쁨과 연인의 변심에 대한 절망 등 누구보다도 표현해야 할 감정의 진폭이 큰 배역인데, 배틀의 연기는 이를 소화해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내용적으로 보아 마술피리는 요즘같은 '정치적 올바름(우리말로 하면 영 낯선데, 미국에서 말하는 political correctness)'의 시대에 보기엔 좀 껄끄러운 구석이 있습니다. 아마도 모짜르트의 시대에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었겠지만, 여성과 흑인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가 바로 그것입니다.

파파게노 역의 만프레드 헴

극 전체에서 제일 나쁘고 비열한 놈인 모노스타토스는 흑인이며, 자신의 검은 피부에 대한 컴플렉스가 빛나는 하얀 피부의 파미나를 탐내는 주요한 동기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 파미나 역할을 흑인인 캐슬린 배틀이 맡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점입니다.

영상물로 보니 캐슬린 배틀이 왜 엄청난 공주병 - 같이 일하는 스탭들은 아주 넌더리를 낸다는 설이 있습니다. - 에도 불구하고 스타로 군림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자라스트로와 파미나가 이 공연의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쿠르트 몰의 가창은 정말 이 공연의 백미입니다. 몰이 그려내는 자라스트로는 위엄과 지혜를 갖춘 절대자 현인의 모습입니다. 자라스트로의 모습이 과연 이것뿐이냐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 설정을 인정하고 나서 보면 몰의 자라스트로는 최고입니다.

깊고 묵직하며 부드러운, 때로는 힘찬 음성으로 등장인물 전체를 압도하고 감싸는 쿠르트 몰은 무대위의 닻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이 내려진 후의 커튼 콜에서도 가장 큰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별로 정리하자면, 자라스트로와 파미나, 파파게노 별 5개, 밤의 여왕 별4개, 타미노 3개 반을 매기고 싶습니다.

프로젝터를 구비하고 있지 못한 관계로, 화질은 거실의 30인치 TV로 본 바를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선명도나 색상 등은 매우 깔끔합니다. 아트하우스 DVD에서 나오는 DVD전용의 최근작들만큼은 못합니다. 그러나 91년 공연물임을 감안하면 별 불만이 들지 않으며, 웬만한 TV방송물 수준은 됩니다.

최근 유니버설 DVD라며 홍콩이나 대만에서 찍혀 나오는 DG레이블 공연물들이 많이 돌아다니는데, 이것들보다는 훨씬 나은 화질입니다. (이것들은 과거 VHS물 그대로이며, 전혀 화질보완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PCM스테레오로 들은 음질도 대략 이 수준이어서, 일반 CD로 듣는 음악과 비슷합니다.

(본격 서라운드 시스템을 갖춰놓지도 않고 DVD에 대해 글을 올리고 있는 점, 읽는 분들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는 파이오니아 DV 535K -> 킴버 디지털케이블 -> 링크 DAC -> 플리니우스 SA100 mk3 -> 소너스 파베르 미니마아마토르 (케이블은 Nirvana)의 조합에서 DVD를 2채널로 듣고 있습니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DVD제품으로서의 만듦새입니다. 일반적으로 CD의 속지가 대본과 함께 해설문을 싣고 있는 데 반해, 이 DVD의 속지는 트랙별 장면설명만 하고 있습니다. 권위있는 해설논문이 한편쯤 실려있다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자막은 독일어 영어 불어 중국어입니다. 다만, 대사는 충실하게 바로바로 자막이 나오는 데 비해, 아리아의 경우 반복구 등에서 자막이 종종 생략됩니다. 이 경우, 프린트된 대본이 있다면 찾아가면서 들을 수 있지만 영상물인지라 그게 안되어 답답할때가 좀 있었습니다.

장면선택 기능이 취약한 점도 아쉬움입니다. 영화DVD들과 달리 chapter selection메뉴로 가면 1막/2막 밖에 고를 수 없고 별도의 부록도 없습니다. 물론,플레이중의 ff /rw 말고 트랙 ff/rw 버튼을 눌러 장면을 건너뛰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DVD 이용의 재미와 편리가 덜합니다.

전체평점은 공연내용 별4개반(★★★★☆), DVD제품으로서의 측면 3개반(★★★☆)입니다. '마술피리'의 구입가능한 영상물로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면서도 구하기가 비교적 쉽고, 공연도 일정수준 이상이라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이현식.

p.s. 글을 쓰다가 문득 느낀 것인데, 이제 우리 음악/오디오계도 점차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0여년 전만해도 이 오페라를 '마적(魔笛)'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때문에 초심자가 '만주벌판 휘젓던 도적떼 (馬賊)'를 연상하는 웃지못할 일도 많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