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최신예 빈필의 폭발적 향연
젊은 독일계 지휘자 크리스티안 틸레만(Christian Thielemann)이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알프스 교향곡(Alpine Symphony)입니다. (DG 469 519-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동시대를 살았던 말러와 마찬가지로 관현악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했던 작곡가였습니다. 이 알프스교향곡은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또다시 확대편성하여 연주하도록 작곡된 것으로 그러한 그의 성향을 잘 반영하는 곡입니다.
이를테면 호른은 20대나 동원된다고 하며 파이프오르간이 등장하고, 무대밖에도 16명의 관악주자가 추가로 필요할 정도입니다. 천둥소리와 바람소리를 내는 기계장치. 관악기 연주자들이 음을 끊지 않고 이어서 레가토로 연주하면서도 숨을 들이쉴 수 있게 하는 장치 등도 사용된다고 하니, 사실 실연이나 DVD를 보기 전에는 어떻게 연주하는지 제대로 알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이미 오케스트레이션의 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초연 리허설때 "이제서야 오케스트레이션이 뭔지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초연은 1915년 10월 베를린에서 그 자신의 지휘로 이뤄졌습니다. 그가 알프스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1911년. '장미의 기사' 초연 무렵입니다.
하지만 이내 한쪽으로 밀어두고는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등 오페라 작곡에 몰두하다 1914년말부터 다시 알프스교향곡에 손을 댔고, 완성은 몇달만에 해치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교향시입니다.
악장의 구분은 없습니다. 다만 전체가 22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섹션이라는 것도, 잠시 곡이 끊기는 부분(pause)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등정의 과정에 관한 표제를 슈트라우스가 악보에
적어놓은 것에 따른 것입니다. 곡은 꾸준히 진행되는데 "아 여기서부터는 초원이군" "음 빙하가 시작되는구나.."
하면서 듣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음반마다 곡의 트랙수가 다 다릅니다.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하나의 흐름이라고 생각되는 섹션들을 묶어서 하나의 트랙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소개하는 틸레만 판의 경우 17개 트랙이고, 비교대상으로 삼았던 카라얀의 81년 녹음은 11개 트랙으로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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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크페라인 잘(비엔나 악우협회 홀)에서의 공연모습 |
섹션별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밤(Nacht)
현악군의 커튼이 밤을 묘사합니다. 이 교향곡은 하루동안의 등산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등정을 시작하는 날, 해뜨기 전입니다. 트롬본
소리는 멀리 보이는 산을 형상화합니다. 틸레만은 이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상궤를 벗어난 저음트롬본의 시작부를 보십시오. 놀랍지요. 서서히 내려앉는 이부분, 현악기는 거의 소리를 안내는 가운데 나오는 트롬본의 저역...슈트라우스는 이런걸 어떻게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요? 이건 놀라운 음악이예요."
2. 일출(Sonnenaufgang)
엄청난 파워의 총주와 함께 빛덩어리 태양이 떠오르고, 만물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밤'에서 '일출'로 넘어가는 부분은 뭔가 압도적인
것이 다가오는 느낌이 점차적으로 고양되다가 투티로 폭발하도록 돼 있습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굉장히 멋진 부분인데, 요것만 듣기 위해 리모콘으로 트랙2를 바로 누르면, 간 떨어집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3. 등반(Der Anstieg)
- 저음현악기군이 올라가는 힘찬 발걸음을 묘사합니다."등반(Ascent)"은 정력적인 새 주제로 시작합니다.
멀리서 들리는 금관의 팡파르는 저 멀리 우뚝 서서 등반자를 굽어보는 거대한 산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한편으로는 등반 과정에 닥칠
여러가지 어려움과 위험도 암시합니다.
4. 숲에 들어감(Eintritt in den Wald) - 5.시냇가를 거닐다(Wanderung neben dem Bache)
(합쳐서 4번트랙)
- 어두컴컴하고, 때로는 새도 지저귀는 숲속의 분위기가 묘사됩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계속 위로 위로 전진함에 따라 '등반'의
주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물'을 상징하는 음악의 분위기로 넘어가며 'wandering by the brook'(시냇가를
거닐다)가 나옵니다. 틸레만은 이부분으로 접어들때 템포를 많이 늦춰서 잠시 쉬어가는 분위기를 내어 줍니다.
6. 폭포에서(Am Wasserfall) - 7.. 무지개 (Ersheinung) (합쳐서 5번트랙)
"폭포에서" 등반자는 위험을 감지하는 한편 물보라의 무지개 속에서 알프스 요정의 "환영(apparition)"을
봅니다. 미끄러지듯 글리산도 처리된 바이올린과 트라이앵글류의 금속타악기가 빚어내는 고음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섹션 마지막에, 이상주의적인 새 주제 - 정상에서 산주위를 둘러볼때 나오는 - 가 처음으로 짧게나마 모습을 드러냅니다.
8. 꽃핀 풀밭 (Auf blumigen Wiesen)
9. 산위 목초지에서 (Auf der Alm)
- '등반'이 '꽃핀 풀밭에서'재개되고, '산위 목초지에서'에서도 이어지며, 여기서는 쇠방울소리, 목동들의 뿔피리 소리도 들려옵니다.
아주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10. 덤불숲을 지나 길을 잘못들어 오히려 내려가다.(Durch Dickicht und Gestrupp auf Irrwegen)
11. 빙하(Auf dem Gletscher).
위력적인 트럼펫이 빙하의 장엄한 광경과 등반자의 위험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12. 위험한 순간들(Gefahrvolle Augenblicke)
13. 정상에서 (Auf dem Gipfel)
여러 어려움을 뚫고 드디어 선 정상. 벅찬 감격에 앞서 등반자는 먼저 명상적인 경외감에 빠져듭니다. 이 정서를 오보에 독주가 묘사합니다. 좌우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가며 자신의 성취와 자연의 신비감을 음미하는데, 루바토로 선율을 끊었다 이었다 하는 것은 등반자가 숨차 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틸레만 판이 카라얀판보다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14. 전망 (Vision)
산아래 전경을 그리는 "vision"에서 오르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정상에서'의 오보에 독주에 이어 펼쳐지는
정상정복의 힘찬 주제가 더욱 발전되어 전개됩니다.
15. 피어오르는 안개(Nebel steigen auf) - 16. 서서히 해가 진다(Die Sonne verdustert sich allmahlich) - 17. 엘레지(Elegie) - 18,폭풍전의 고요(Stille vor dem Sturm).
19. 폭풍우와 하강 (Gewitter und Sturm, Abstieg)
아마 관현악으로 묘사된 가장 강력한 폭풍일 것입니다. 여러가지 특수효과(?)도 사용됩니다. 등산객들은 발걸음을 되돌리며 물러나다
다시 전진하기도 하는데, 앞서 나온 등반의 모티프가 폭풍우속에 뒤섞여 등장합니다.
20. 일몰 (Sonnenuntergang)
21. 결말 (Ausklang). 에필로그입니다. 하루동안의 힘들지만 감동적이었던 여정을 기억속에 갈무리합니다.
22. 밤 (Nacht).
음악을 들으며 읽어보시면 느끼시겠지만, 한편의 잘 짜여진 기-승-전-결 구조이면서 또한 소나타형식의 단일악장이기도 합니다. 도입-제시-전개-발전-재현부-코다 등의 구성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베를린 독일오페라 음악감독인 틸레만은 지난해 10월초 비엔나의 무지크페라인 홀에서 바로 이 곡으로 비엔나 필 데뷰 연주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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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레만이 리허설 중 뭔가 생각하는 모습 |
이 음반은 이미 이시대의 대표적인 슈트라우스 해석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비엔나 필 데뷰' 라이브이기도 합니다. (2000년 여름 바이로이트에서 마이스터징거로 성공적인 데뷰를 한 이후 바그너쪽으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곡의 세부내용을 설명하면서 이 곡이 마치 유람여행기의 성격인 양 비쳐진 감이 있는데, 사실 이 곡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니체의 철학을 음악으로 담아낸 것입니다.
원래 슈트라우스가 붙이려 했던 이 곡의 제목은 '반(反)그리스도 (Anti-Christ)' 였습니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서 제목을 따려했던 것입니다.
슈트라우스는 "나는 이 곡을 "반그리스도"라 부를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도덕적 정화가 담겨있다. 노동을 통한 해방과, 영광스럽고 영원한 자연에 대한 숭배도 담겨있다. "고 말한 바도 있었지만, 결국 물의를 빚지 않고 암시만 하는 쪽으로 결정을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을 들을때는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잘 묘사돼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주인공 등반자의 땀과 노력,투쟁, 이에 따르는 긴장감과 고양감, 성취의 감동 등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 판단기준이 될 것입니다.
슈트라우스에 관한 한 부동의 레퍼런스로 제가 생각하는 카라얀의 연주와 틸레만의 연주를 비교해 보자면 전체적인 인상 차이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카라얀 연주에서의 알프스는 '정복과 투쟁'의 대상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반면 틸레만 쪽은 '있는 그대로의 대자연'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이 잘 드러나는 좋은 예로서,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 직전까지 점증되는 긴장감과 일출의 찬란함 등은 카라얀 판이 강력한 반면 '정상에서'와 '전망'의 장중함은 틸레만 판이 오히려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 부분을 비교해 들어보면 카라얀 연주에서는 현악군과 관악군 모두 고역쪽으로 힘이 집중된 사운드인 반면 틸레만 연주에서는 두터운 중저역 위에 고역이 진하게 스카이라인을 그리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연주자체가 그런 탓도 있을 것이고, 녹음 탓도 있을 듯합니다.
틸레만 판은 연주도 카라얀-베를린필과 막상막하일 정도로 훌륭하지만 녹음도 매우 뛰어납니다. 공간감과 음색 모두 최고 수준입니다.
카라얀 판과 비교해 또하나의 장점은 로젠카발리어(장미의 기사) 조곡이 같이 수록돼 있다는 것입니다.
로젠카발리어 조곡은 슈트라우스가 직접 작곡을 하지는 않고, 슈트라우스의 악보를 출판하던 출판업자가 원작 오페라의 주요부분을 발췌해 조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문에 부분간 연결이 좀 매끄럽지 못한 구석도 있지만, 오페라의 매력적인 왈츠 등이 그대로 살아있고, 상당부분에서 성악파트를 다른 악기로 대체하지 않고 그냥 들어냈는데도 원곡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재미있는 곡입니다.
알프스 교향곡과 장미의 기사 조곡을 통틀어, 무지크페라인 잘에서의 비엔나 필만이 들려줄 수 있는 농밀한 색채의 사운드는 정말 일품입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관심은 없어도 오디오의 대편성 관현악 재생능력 체크용으로도 훌륭합니다.
올해 상반기에 출반된 교향곡 음반 가운데 최고 가운데 하나로 꼽힐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별은 다섯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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