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말러와 함께 후기 낭만주의 시기 교향곡을 대표하는 대가입니다. 그의 교향곡, 특히 맨 뒤의 3곡인 7,8,9번은 말러 교향곡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엄청난 스케일과 감동을 선사하는 대작으로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브루크너 교향곡과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명반이 출시되어 왔습니다. 카라얀이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첼리비다케 등의 지휘자들의 음반이 이미 베스트셀러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올해 상반기 필립스 그레이트50 시리즈와 함께 국내 음반시장을 강타한 BBC legend 시리즈를 통해, 필청해야 할 음반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음반은 야샤 호렌슈타인(Jascha Horenstein)이 지휘한 8번과 9번의 라이브 음반(2CD)입니다. 한때 조금 들어왔다가 브루크너 매니아들에 의해 순식간에 동이 났고, 저는 최근 재수입된 것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호렌슈타인은 흔히 '평생 한번도 상임지휘자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는 비운의 대가'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호렌슈타인은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낯선 지휘자이지만 구미에서는 말러와 브루크너의 대표적 해석가로서 정평이 있는 지휘자입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걸출한 말러 지휘자를 배출한 미국의 평단에서 '60년대 유럽에 과연 말러가 있었냐'고 목에 힘을 주면서도 예외로 인정을 해 주는 지휘자가 바로 존 바비롤리 경과 호렌슈타인입니다.
그는 1899년 러시아 키에프에서 우크라이나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고 12세때부터는 비엔나에서 음악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브루크너 평생의 애증이 깃든 도시에서 음악수련을 했다는 것은 호렌슈타인이 브루크너의 명 해석가가 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로 양분된 19세기 비인 음악계에서, 브루크너는 바그너파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당대 비엔나 음악계의 거두인 비평가 한슬릭 (골수 브람스파입니다.)으로부터 늘상 핍박을 당했습니다. 브루크너의 일생은 그런 어려운 처지속에서 구도자의 자세로 자신의 작품을 절차탁마해가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튼 그의 음악에서는 확실히 바그너 사운드의 냄새가 납니다. 그렇지만 양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베토벤이 확립해 놓은 고전주의 교향곡의 틀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하지만 음향적으로는 바그너적이어도 내용적으로는 바그너와 확연히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바그너는 게르만 신화를 바탕에 깔고 죽음과 증오,복수,사랑 등 원초적인 감정을 다뤘다면 브루크너는 기독교의 신과 자연에 대한 경배와 귀의로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압도적인 특징 중 하나는 신에게 바치는 찬송과도 같은 금관악기군의 거대한 합창입니다. 특히 7,8,9번에 이르면 이런 브루크너의 지향성을 얼마나 잘 살려냈느냐가 중요한 평가의 잣대가 됩니다.
다른 대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루크너에게 있어서도 9번은 백조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끝내 9번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4악장에 대하여 그는 상당히 진척된 스케치를 남기긴 했지만 이것을 이리 수정하고 저리 수정하다 숨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별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테 데움'을 4악장 대신 연주해 달라는 유지를 남긴채 말입니다.
브루크너는 8번을 작곡한지 6주 뒤부터 죽기 전까지 10년이나 9번을 다듬고 또 다듬었습니다. 작고하는 날도 9번을 놓고 작업하다 숨졌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평생공부와 작업을 신을 위한 음악의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 생각했던 브루크너입니다. 적어도 숭고함과 경건함이 깃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9번 연주가 아닐 것입니다.
브루크너 8번과 9번에 대해서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 쟁쟁한 거장들이 좋은 녹음을 많이 남겼습니다.
줄리니와 번스타인은 비엔나필로 녹음을 남긴 경우입니다. 두 사람 모두 DG에서 음반이 나왔고, 80년대말-90년대초의 디지탈 레코딩 기술로 녹음되어 사운드가 뛰어납니다. 특히 줄리니 9번에서 금관의 질감 포착은 탁월합니다.
카라얀은 빈필과 베를린필 두 악단과 함께 브루크너 연주를 남겼습니다. 베를린필과의 녹음 중 4번과 9번은 염가 기획시리즈인 DG panorama시리즈로 다시 나왔습니다. 호렌슈타인의 연주는 이보다 6년 앞선 것으로, 녹음 측면에서는 가장 불리합니다.
그러나 호렌슈타인의 BBC legend반은 간과할 수 없는 장점이 있는데, 바로 실황연주라는 것입니다.
8번의 연주는 70년 9월10일 런던의 로얄 알버트홀에서였습니다 (Haas판 사용). 악단은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 이 연주의 대성공으로 3개월뒤 호렌슈타인은 다시 런던에 초빙됐습니다. 이번에는 BBC 심포니를 지휘하여 브루크너 9번을 녹음합니다.(오리지널 판본.). 12월 2일 로얄 페스티벌 홀에서였습니다.
2CD (가격이 2for 1인 것은 아닙니다만.)인 이 음반의 CD1은 브루크너 9번 (1,2,3악장)과 8번 1악장이 수록되어 있고 CD2에는 8번의 2,3,4악장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9번을 봅니다.
BBC 심포니의 연주는 우리나라 애호가들에게 크게 어필하여 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제대로 된 음반의 보급이 늦어졌을 뿐이고, 사실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이 음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트랙인 9번 1악장부터 현악군이 조성하는 긴장감과 호른군의 웅장함(호른이 8대 등장하는데, 9번에서 가장 활약이 큰 악기가 바로 호른입니다.)은 대단합니다. 소릿결이 곱지는 않아도 매우 강렬한 표정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악장에서는 절절한 감정을 실어 토해내는 듯한 현악군과 두툼한 관악군의 소리가 어우러져 숭고하고 대담한 앙상블이 빚어집니다.
2악장은 우아한 현악군의 트리오와 기괴한 금관의 포효가 부조화속의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음악입니다. 거대하고 심각한 1악장과 3악장 사이에 마치 햄버거 패티처럼 끼어있는 악장입니다. 여기서는 무게감의 설정이 중요한 해석의 포인트가 됩니다.
레너드 번스타인과 빈필의 연주의 경우, 굉장히 무겁고 심각하게 진행합니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압도적인 연주인데, 과연 2악장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으냐를 놓고 감상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최고의 2악장이라고 하는 반면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호렌슈타인은 파워풀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고 스피디한 전개를 택했습니다. 템포는 상당히 빠른 편입니다.
템포 얘기가 나온 김에 비교를 좀 해볼까요?
* 9번교향곡 지휘자별 연주시간 *
1악장
2악장
3악장
호렌슈타인
24분51초
10분37초
24분33초
카라얀
24분54초
10분37초
25분51초
줄리니
28분02초
10분39초
29분30초
번스타인
26분58초
12분14초
26분56초
이런 연주시간차는 각 지휘자가 만들어낸 음악의 특성을 대표하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2악장의 경우 말씀드린 대로 번스타인이 가장 느립니다. 반면 1악장과 3악장은 카라얀과 호렌슈타인이 거의 비슷한 반면 ( 쾌도난마의 스타일로 오케스트라의 기능성을 극대화시키는 데 있어 카라얀을 따라올 사람이 없죠.) 쥴리니가 압도적으로 느립니다. 줄리니의 해석은 템포를 느릿하게 잡고 리타르단도 (ritardando.점점 느리게)를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장대한 스케일을 더욱 확장시키는 쪽입니다.
호렌슈타인의 해석은 그보다는 좀더 솔직담백한 쪽입니다. '본질을 꿰뚫다'라는 표현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그런 연주입니다.
이런 성향을 호렌슈타인의 '전공'과 관련지어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지휘자로 나서기 전에 비엔나 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바 있었고, 인도철학의 영향을 평생 지대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힘, 내적 에너지가 충만한 실연을 항상 추구한 경향을 그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세르쥬 첼리비다케와 매우 비슷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는 좀더 심오한 내면적 성찰의 분위기가 나고 호렌슈타인의 브루크너는 좀더 정서를 고양하는 쪽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두 지휘자는 스튜디오 녹음 혐오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9번 3악장 해석도 2악장처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3악장의 끝은 포효하는 투티가 아니라 들릴듯 말듯 한 약음입니다.(악상기호로는 ppp에서 p까지입니다.) 이의 해석은 끝없는 논란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혹자는 이를 '우주적 종말과 소멸' 로 파악합니다. 9번3악장이 구도자 브루크너 평생의 마지막 작품이었다는 점에 근거한 해석이며, 굳이 분류하자면 줄리니의 연주는 이쪽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반면 브루크너 자신이 4악장을 상당한 정도로 진척시켰고, 끝내 완성하지 못하자 '테데움'을 대신 연주하라고까지 지시한 점을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테 데움'은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어우러진 웅장한 곡으로,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찬미가 내용입니다.
따라서 3악장의 조용한 결말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지상에서의 죽음에 그쳐야 하며 가장 중후장대한 대단원을 예비하기 위한 폭풍전야의 고요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호렌슈타인의 3악장 결말은 이쪽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어느쪽이 옳은가, 결론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각각의 해석에 있어서 완성도가 어느정도인가를 따질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줄리니와 호렌슈타인 모두, 각자의 노선에서는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8번교향곡도 9번 못지않은 절차탁마의 산물입니다. 브루크너가 8번교향곡에 대한 스케치를 시작한 것은 1884년 60살때부터입니다. 초연이 이뤄진 것은 1892년 12월 18일. 이 기간중 브루크너는 곡 전반에 대한 대수술을 여러차례 거쳤습니다.
황제 프란츠 요세프1세에게 헌정되어 그의 비용부담으로 악보가 출판된 8번 교향곡의 초연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휴고 볼프는 '그의 이전 교향곡들을 영적 차원에서나 착상의 규모에서 모두 초월하는 것'이라고 격찬했고, 한슬릭조차도 이 곡의 위대함을 인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8번의 규모도 9번 못지 않습니다. 호렌슈타인 연주로 보면 1악장 15분45초, 2악장 15분03초, 3악장 25분52초, 4악장 25분22초입니다. 9번이 미완성이긴 하지만 9번보다 더 길고 스케일이 큽니다. 오히려 9번은 '백조의 노래'적 성격이 있어 규모를 과시하지 않지만 8번은 정말로 규모지향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호렌슈타인은 이 연주에서 런던심포니를 지휘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름값이라는게 있는 모양인지, 세부표현력은 BBC심포니보다 우위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솔직담백하며 거침없이 대담하다는 특질을 9번연주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통렬하면서도 강인한 금관, 윤기있지만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처절한 현악군, 3악장의 정화된 분위기, 그리고 지축을 뒤흔드는 벽력과도 같은 간결한 코다.
이 연주가 끝난 뒤 청중은 발악 또는 비명이라고 해도 될만한 환호성과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마지막 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기립박수를 보내는 청중의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입니다. 라이브 음반치고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적인 환호성입니다.
8번이 연주된 로얄 알버트홀은 100년전인 1871년 브루크너 자신이 파이프오르간 즉흥연주를 벌여 런던음악계를 놀라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청중은 몰랐을지 몰라도 호렌슈타인은 깊이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이 배가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반적으로 보아 녹음은, DG에서 나온 빈필 녹음(줄리니,번스타인 등)의 풍윤한 맛은 좀 부족하지만 장대한 음향구조물의 세부를 투명하게 들여다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정도입니다. 9번 악보를 갖다놓고 듣는 중 아무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브루크너 해석사에 있어, 호렌슈타인은 19세기말-20세기초의 해석, 그러니까 브루크너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세대에 속합니다. 브루크너는 1824년에 태어나 1896년에 세상을 떠났고 호렌슈타인은 1899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둘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는 대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가 있었습니다.
니키쉬는 브루크너의 60세때 7번을 지휘하여 처음으로 비엔나 음악계에서의 진정한 성공을 그에게 안겨준 바 있었던 사람이고, 비엔나에서 자란 호렌슈타인은 니키쉬의 브루크너 연주를 들으며 대지휘자로서의 미래를 준비했었으니까요.
이런 역사적 의미만으로도 이 음반은 브루크너를 듣는 분들에게 필청음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별 다섯개(★★★★★) 만점으로 구입추천합니다.
p.s.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을 보면 '노왁(Nowak)' '하스(Haas)' 등의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판본(edition)의 표시입니다.
여전히 한슬릭 휘하 평단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1887년, 브루크너는 3년간의 노작의 결실인 8번의 초고를 당대 유명지휘자이자 자신의 지지자였던 헤르만 레비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레비는 이 악보에 대해 '말도 안된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절망상태에 빠진 브루크너는 다시 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개작을 1890년경까지 하게 됩니다.
당초 1악장의 코다가 ff로 끝났던 것을 지금의 조용한 엔딩으로 바꾸었고 2악장 중간의 트리오를 새로 썼으며, 3악장의 클라이맥스를 C장조에서 E플랫 장조로 조옮김했습니다. 그리고 제자였던 요셉 샬크의 충고를 받아들여 3,4악장을 상당폭 잘라냈습니다.
최초의 8번 판본은 그러므로, 1892년 샬크가 펴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음반과 연주에서 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하스판과 노왁 판입니다.
로버트 하스(Robert Haas)는 1939년 브루크너 협회가 교향곡 결정판 악보를 펴낼 때 책임편집자였습니다. 이때 하스는 브루크너의 당초 의도를 살린다는 취지아래 삭제된 페이지 가운데 일부를 복원해 넣었습니다.
기본적으로 1887년의 무삭제 버전으로 돌아간다는 취지였지만 1890년 브루크너 자신의 수정 중 일부사항(이를테면 1악장 끝이 포르티시모가 아니라 피아노로 끝나는 것)은 반영했습니다. 이것이 하스 판이며, 호렌슈타인이 사용한 판본입니다.
하지만, 삭제 역시 브루크너 자신이 결정하여 한 것인만큼 1890년의 수정.삭제작업을 충실히 반영한 악보가 진정한 결정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1955년, 브루크너협회가 새로운 결정판 악보를 내놓을때 이를 주도한 사람이 레오폴트 노왁입니다. 노왁 판은 줄리니의 8,9번, 번스타인의 9번 등에서 채택되었습니다.
9번에 여러 판본이 형성된 과정은 8번의 경우와는 또다릅니다. 9번의 작곡은 브루크너로서는 당대 비엔나 음악계에 대한 일종의 소극적 항거였습니다. 자신의 지지자였던 레비로부터 8번 작곡때 일격을 받은 일도 있고 해서, 브루크너는 말년에 끊임없이 9번을 이리바꾸고 저리바꾸는 수고를 계속하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도 제자였습니다. 그의 추종자인 페르디난드 뢰베가 엄청나게 왜곡되고 삭제된 버전의 판본(일명 뢰베판)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학자 알프레드 오렐(Alfred Orel)에 의해 1934년 원본이 복원되기까지 유일한 판본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정확히 확인해보진 못했습니다만, 모노시절의 일부 녹음은 뢰베판에 의거해 이뤄져 있을 수 있습니다.
이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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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렌슈타인은 흔히 '평생 한번도 상임지휘자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는 비운의 대가'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호렌슈타인은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낯선 지휘자이지만 구미에서는 말러와 브루크너의 대표적 해석가로서 정평이 있는 지휘자입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걸출한 말러 지휘자를 배출한 미국의 평단에서 '60년대 유럽에 과연 말러가 있었냐'고 목에 힘을 주면서도 예외로 인정을 해 주는 지휘자가 바로 존 바비롤리 경과 호렌슈타인입니다.
그는 1899년 러시아 키에프에서 우크라이나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고 12세때부터는 비엔나에서 음악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브루크너 평생의 애증이 깃든 도시에서 음악수련을 했다는 것은 호렌슈타인이 브루크너의 명 해석가가 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로 양분된 19세기 비인 음악계에서, 브루크너는 바그너파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당대 비엔나 음악계의 거두인 비평가 한슬릭 (골수 브람스파입니다.)으로부터 늘상 핍박을 당했습니다. 브루크너의 일생은 그런 어려운 처지속에서 구도자의 자세로 자신의 작품을 절차탁마해가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튼 그의 음악에서는 확실히 바그너 사운드의 냄새가 납니다. 그렇지만 양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베토벤이 확립해 놓은 고전주의 교향곡의 틀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하지만 음향적으로는 바그너적이어도 내용적으로는 바그너와 확연히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바그너는 게르만 신화를 바탕에 깔고 죽음과 증오,복수,사랑 등 원초적인 감정을 다뤘다면 브루크너는 기독교의 신과 자연에 대한 경배와 귀의로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압도적인 특징 중 하나는 신에게 바치는 찬송과도 같은 금관악기군의 거대한 합창입니다. 특히 7,8,9번에 이르면 이런 브루크너의 지향성을 얼마나 잘 살려냈느냐가 중요한 평가의 잣대가 됩니다.
다른 대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루크너에게 있어서도 9번은 백조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끝내 9번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4악장에 대하여 그는 상당히 진척된 스케치를 남기긴 했지만 이것을 이리 수정하고 저리 수정하다 숨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별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테 데움'을 4악장 대신 연주해 달라는 유지를 남긴채 말입니다.
브루크너는 8번을 작곡한지 6주 뒤부터 죽기 전까지 10년이나 9번을 다듬고 또 다듬었습니다. 작고하는 날도 9번을 놓고 작업하다 숨졌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평생공부와 작업을 신을 위한 음악의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 생각했던 브루크너입니다. 적어도 숭고함과 경건함이 깃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9번 연주가 아닐 것입니다.
브루크너 8번과 9번에 대해서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 쟁쟁한 거장들이 좋은 녹음을 많이 남겼습니다.
줄리니와 번스타인은 비엔나필로 녹음을 남긴 경우입니다. 두 사람 모두 DG에서 음반이 나왔고, 80년대말-90년대초의 디지탈 레코딩 기술로 녹음되어 사운드가 뛰어납니다. 특히 줄리니 9번에서 금관의 질감 포착은 탁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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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은 빈필과 베를린필 두 악단과 함께 브루크너 연주를 남겼습니다. 베를린필과의 녹음 중 4번과 9번은 염가 기획시리즈인 DG panorama시리즈로 다시 나왔습니다. 호렌슈타인의 연주는 이보다 6년 앞선 것으로, 녹음 측면에서는 가장 불리합니다.
그러나 호렌슈타인의 BBC legend반은 간과할 수 없는 장점이 있는데, 바로 실황연주라는 것입니다.
8번의 연주는 70년 9월10일 런던의 로얄 알버트홀에서였습니다 (Haas판 사용). 악단은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 이 연주의 대성공으로 3개월뒤 호렌슈타인은 다시 런던에 초빙됐습니다. 이번에는 BBC 심포니를 지휘하여 브루크너 9번을 녹음합니다.(오리지널 판본.). 12월 2일 로얄 페스티벌 홀에서였습니다.
2CD (가격이 2for 1인 것은 아닙니다만.)인 이 음반의 CD1은 브루크너 9번 (1,2,3악장)과 8번 1악장이 수록되어 있고 CD2에는 8번의 2,3,4악장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9번을 봅니다.
BBC 심포니의 연주는 우리나라 애호가들에게 크게 어필하여 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제대로 된 음반의 보급이 늦어졌을 뿐이고, 사실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이 음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트랙인 9번 1악장부터 현악군이 조성하는 긴장감과 호른군의 웅장함(호른이 8대 등장하는데, 9번에서 가장 활약이 큰 악기가 바로 호른입니다.)은 대단합니다. 소릿결이 곱지는 않아도 매우 강렬한 표정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악장에서는 절절한 감정을 실어 토해내는 듯한 현악군과 두툼한 관악군의 소리가 어우러져 숭고하고 대담한 앙상블이 빚어집니다.
2악장은 우아한 현악군의 트리오와 기괴한 금관의 포효가 부조화속의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음악입니다. 거대하고 심각한 1악장과 3악장 사이에 마치 햄버거 패티처럼 끼어있는 악장입니다. 여기서는 무게감의 설정이 중요한 해석의 포인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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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번스타인과 빈필의 연주의 경우, 굉장히 무겁고 심각하게 진행합니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압도적인 연주인데, 과연 2악장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으냐를 놓고 감상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최고의 2악장이라고 하는 반면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호렌슈타인은 파워풀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고 스피디한 전개를 택했습니다. 템포는 상당히 빠른 편입니다.
템포 얘기가 나온 김에 비교를 좀 해볼까요?
* 9번교향곡 지휘자별 연주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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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브루크너 자신이 4악장을 상당한 정도로 진척시켰고, 끝내 완성하지 못하자 '테데움'을 대신 연주하라고까지 지시한 점을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테 데움'은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어우러진 웅장한 곡으로,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찬미가 내용입니다.
따라서 3악장의 조용한 결말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지상에서의 죽음에 그쳐야 하며 가장 중후장대한 대단원을 예비하기 위한 폭풍전야의 고요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호렌슈타인의 3악장 결말은 이쪽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어느쪽이 옳은가, 결론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각각의 해석에 있어서 완성도가 어느정도인가를 따질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줄리니와 호렌슈타인 모두, 각자의 노선에서는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8번교향곡도 9번 못지않은 절차탁마의 산물입니다. 브루크너가 8번교향곡에 대한 스케치를 시작한 것은 1884년 60살때부터입니다. 초연이 이뤄진 것은 1892년 12월 18일. 이 기간중 브루크너는 곡 전반에 대한 대수술을 여러차례 거쳤습니다.
황제 프란츠 요세프1세에게 헌정되어 그의 비용부담으로 악보가 출판된 8번 교향곡의 초연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휴고 볼프는 '그의 이전 교향곡들을 영적 차원에서나 착상의 규모에서 모두 초월하는 것'이라고 격찬했고, 한슬릭조차도 이 곡의 위대함을 인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8번의 규모도 9번 못지 않습니다. 호렌슈타인 연주로 보면 1악장 15분45초, 2악장 15분03초, 3악장 25분52초, 4악장 25분22초입니다. 9번이 미완성이긴 하지만 9번보다 더 길고 스케일이 큽니다. 오히려 9번은 '백조의 노래'적 성격이 있어 규모를 과시하지 않지만 8번은 정말로 규모지향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호렌슈타인은 이 연주에서 런던심포니를 지휘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름값이라는게 있는 모양인지, 세부표현력은 BBC심포니보다 우위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솔직담백하며 거침없이 대담하다는 특질을 9번연주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통렬하면서도 강인한 금관, 윤기있지만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처절한 현악군, 3악장의 정화된 분위기, 그리고 지축을 뒤흔드는 벽력과도 같은 간결한 코다.
이 연주가 끝난 뒤 청중은 발악 또는 비명이라고 해도 될만한 환호성과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마지막 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기립박수를 보내는 청중의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입니다. 라이브 음반치고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적인 환호성입니다.
8번이 연주된 로얄 알버트홀은 100년전인 1871년 브루크너 자신이 파이프오르간 즉흥연주를 벌여 런던음악계를 놀라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청중은 몰랐을지 몰라도 호렌슈타인은 깊이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이 배가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반적으로 보아 녹음은, DG에서 나온 빈필 녹음(줄리니,번스타인 등)의 풍윤한 맛은 좀 부족하지만 장대한 음향구조물의 세부를 투명하게 들여다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정도입니다. 9번 악보를 갖다놓고 듣는 중 아무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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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해석사에 있어, 호렌슈타인은 19세기말-20세기초의 해석, 그러니까 브루크너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세대에 속합니다. 브루크너는 1824년에 태어나 1896년에 세상을 떠났고 호렌슈타인은 1899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둘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는 대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가 있었습니다.
니키쉬는 브루크너의 60세때 7번을 지휘하여 처음으로 비엔나 음악계에서의 진정한 성공을 그에게 안겨준 바 있었던 사람이고, 비엔나에서 자란 호렌슈타인은 니키쉬의 브루크너 연주를 들으며 대지휘자로서의 미래를 준비했었으니까요.
이런 역사적 의미만으로도 이 음반은 브루크너를 듣는 분들에게 필청음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별 다섯개(★★★★★) 만점으로 구입추천합니다.
p.s.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을 보면 '노왁(Nowak)' '하스(Haas)' 등의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판본(edition)의 표시입니다.
여전히 한슬릭 휘하 평단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1887년, 브루크너는 3년간의 노작의 결실인 8번의 초고를 당대 유명지휘자이자 자신의 지지자였던 헤르만 레비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레비는 이 악보에 대해 '말도 안된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절망상태에 빠진 브루크너는 다시 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개작을 1890년경까지 하게 됩니다.
당초 1악장의 코다가 ff로 끝났던 것을 지금의 조용한 엔딩으로 바꾸었고 2악장 중간의 트리오를 새로 썼으며, 3악장의 클라이맥스를 C장조에서 E플랫 장조로 조옮김했습니다. 그리고 제자였던 요셉 샬크의 충고를 받아들여 3,4악장을 상당폭 잘라냈습니다.
최초의 8번 판본은 그러므로, 1892년 샬크가 펴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음반과 연주에서 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하스판과 노왁 판입니다.
로버트 하스(Robert Haas)는 1939년 브루크너 협회가 교향곡 결정판 악보를 펴낼 때 책임편집자였습니다. 이때 하스는 브루크너의 당초 의도를 살린다는 취지아래 삭제된 페이지 가운데 일부를 복원해 넣었습니다.
기본적으로 1887년의 무삭제 버전으로 돌아간다는 취지였지만 1890년 브루크너 자신의 수정 중 일부사항(이를테면 1악장 끝이 포르티시모가 아니라 피아노로 끝나는 것)은 반영했습니다. 이것이 하스 판이며, 호렌슈타인이 사용한 판본입니다.
하지만, 삭제 역시 브루크너 자신이 결정하여 한 것인만큼 1890년의 수정.삭제작업을 충실히 반영한 악보가 진정한 결정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1955년, 브루크너협회가 새로운 결정판 악보를 내놓을때 이를 주도한 사람이 레오폴트 노왁입니다. 노왁 판은 줄리니의 8,9번, 번스타인의 9번 등에서 채택되었습니다.
9번에 여러 판본이 형성된 과정은 8번의 경우와는 또다릅니다. 9번의 작곡은 브루크너로서는 당대 비엔나 음악계에 대한 일종의 소극적 항거였습니다. 자신의 지지자였던 레비로부터 8번 작곡때 일격을 받은 일도 있고 해서, 브루크너는 말년에 끊임없이 9번을 이리바꾸고 저리바꾸는 수고를 계속하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도 제자였습니다. 그의 추종자인 페르디난드 뢰베가 엄청나게 왜곡되고 삭제된 버전의 판본(일명 뢰베판)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학자 알프레드 오렐(Alfred Orel)에 의해 1934년 원본이 복원되기까지 유일한 판본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정확히 확인해보진 못했습니다만, 모노시절의 일부 녹음은 뢰베판에 의거해 이뤄져 있을 수 있습니다.
이현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