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스페셜리스트로 성가가 높고, 현대음악에 대한 진취적 태도로 각광받고 있는 뉴밀레니엄 마에스트로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필 상임지휘자 정식 취임에 앞서 먼저 베토벤 사이클에 불을 당겼습니다.
비엔나필과 함께 베토벤 5번교향곡을 발매한 것입니다. 더구나 커플링은 정경화 선생과 협연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음악팬들은 라이센스기는 하지만 이 음반을 거의 세계 최초로 구입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직 외국에서는 이 음반의 발매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고, 인터넷으로 오리지날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안나왔으니까요.
제가 들어본 바로는, 래틀은 토스카니니처럼 "이것은 '운명'이 아니다. 다만 알레그로 콘 브리오일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정서를 쏟아내고 있다기보다는 악보 그대로를 다이내믹하게 표현하려고 한 듯한 연주입니다.
프레이징은 짧게 짧게 가져가는 스타일입니다. 강약의 변화가 매우 다채롭고 급격하며 변화의 폭도 큰 편입니다. 이런 특징은 1악장부터 뚜렷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디오파일로서 재생음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악보상의 세부표현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드는 힘이 1악장부터 배어나옵니다.
특이한 것은 팀파니의 활약입니다. 밑에 깔리는 게 아니라 맺고 끊음이 또렷이 전달될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팀파니 사운드가 부각되어 있습니다.
데이빗 진만(David Zinman)과 톤할레(Tonhalle)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가 꼭 이런 식이었는데, 매우 흥미로운 연주스타일입니다.
2악장은 제게는 다소 무덤덤하게 들렸습니다. 아마 '객관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카라얀이 베를린필과 남긴 80년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에 수록된 5번의 경우 좀 더 장중하고 유장한 맛이 있는데, 적어도 2악장은 이런 연주가 더 마음깊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3악장에서 4악장에 이르는 후반부는 1악장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특히 4악장에서는 목관악기의 고음처리가 매우 강렬합니다. 4악장 도입부부터 그렇습니다.
다른 지휘자들의 연주에서는 전체 오케스트라의 음향에 살짝 색채를 입히는 눈화장 정도의 역할을 했었다면 여기서는 선율표현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꽃장식 모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아바도-베를린필의 연주도 이런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극대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하나, '도!미!솔! 파 미레도레 도!"로 시작되는 4악장의 제시부를 반복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이것은 지휘자들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지난번에 소개한 베를린필과의 전집에서의 아바도나 빈필과의 5번,7번연주에서의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이 반복을 합니다. 80년대 전집에서의 카라얀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사해 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안하는 지휘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마지막 코다에 진입할때 들어갈때 현악군이 드드득하고 활이 현위에서 튀는 효과를 내도록 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래틀의 청취자에 대한 마지막 팬 서비스가 아닐까 합니다.
래틀의 오케스트라 다루는 솜씨가 어느정도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한판입니다. 이런 식으로 운명을 지휘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도 있습니다. 아주 잘 만든 요리를 먹는 것처럼 곳곳에 다른 맛이 숨어 있습니다.
세부에 재미있는 들을 거리를 많이 배치해 놓아서, 꼭 먹다보면 입안에서 과즙 캡슐이 터지는 과자를 먹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속도도 상당히 빠른 편인데, 4악장을 들으면서는 '칙칙폭폭 달리는 폭주기관차'의 이미지가 연상되었습니다.
대신, 논란의 여지도 상당히 큽니다. 베토벤 5번교향곡은 그래도 '운명'교향곡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앙꼬없는 찐빵'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래틀이 의도한 바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말러 2번 하고는 그런점에서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듭니다. 베를린필 상임이라는 보위에 오르는 순간을 눈앞에 두고, 그는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의 아류가 되는 대신 그들과 정면승부를 하기로 맘먹은 듯이 보입니다.
정경화 선생의 브람스 협주곡은 최근 그의 연주경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풍만하고 여유로우며 표정이 다채로운, 그런 것입니다.
일전에 카르미뇰라의 비발디 4계를 소개하면서 정경화의 4계를 같이 말씀드렸는데, 그 연주의 느낌과 같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정경화가 출산 이후 예전과 같은 '무녀(巫女)의 신기(神氣)'를 잃었다고 하시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확실히 DECCA에서 내놓은 협주곡 음반들과 같은 열기와 긴장감은 없어졌지만, 저는 또다른 단계의 원숙미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2악장의 아름다움은 그러므로 안네소피 무터와 카라얀의 연주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각별합니다. 무터의 그것이 풋풋한 과일내음 나는 청순한 아름다움이라면 정경화의 2악장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요.
오케스트라의 서포트는 뛰어나긴 하지만 카라얀의 베를린필보다는 중후함과 리듬감에서 조금 밀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많은 이들이 브람스 협주곡의 레퍼런스로 꼽는 오이스트라흐(저는 키릴 콘드라신/ USSR Radio Large Symphony orchestra와 협연한 것으로 가지고 있습니다.)를 꺼내어 다시 들어봤습니다.
독주는 온기 머금은 광채와 적절한 긴장감이 조화된 최고의 것이지만 모노인 녹음탓도 있어서 아무래도 오케스트라의 서포트가 좀 불안하게 들립니다.
정경화-래틀의 3악장은 좋긴 한데, 제 입장에서 좀 아쉬운게 두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경화 바이올린의 사운드가 오케스트라에 약간 밀리는 듯 하다는 점, 또하나는 마지막 코다로 고양되어 갈때 의도적으로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 하다는 점입니다. 좀 더 몰아부쳐도 좋을 것 같은데 거장들의 생각은 다른가 봅니다.
베토벤 5번교향곡에 대해서는 별 4개 반(★★★★☆)을 주고자 합니다. 반 개는 '감동'의 몫입니다. 푸르트뱅글러의 전쟁중(43년) 녹음에서와 같이 가슴속에서 눈물샘까지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래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연주로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의 베토벤 5번(레이블 Erato)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세부는 거칠고 특히 금관이 가끔 삑사리에 가까운 불안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거침없이 내지르는 므라빈스키의 해석은 십년묵은 체증도 싹쓸이 할듯 후련한 쾌감을 선사해 줍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별4개(★★★★)를 주고자 합니다. 좋은 연주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레퍼런스가 등장했다'고 외치기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현식.
 정경화-래틀 베토벤.jpg)
제가 들어본 바로는, 래틀은 토스카니니처럼 "이것은 '운명'이 아니다. 다만 알레그로 콘 브리오일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정서를 쏟아내고 있다기보다는 악보 그대로를 다이내믹하게 표현하려고 한 듯한 연주입니다.
프레이징은 짧게 짧게 가져가는 스타일입니다. 강약의 변화가 매우 다채롭고 급격하며 변화의 폭도 큰 편입니다. 이런 특징은 1악장부터 뚜렷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디오파일로서 재생음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악보상의 세부표현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드는 힘이 1악장부터 배어나옵니다.
특이한 것은 팀파니의 활약입니다. 밑에 깔리는 게 아니라 맺고 끊음이 또렷이 전달될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팀파니 사운드가 부각되어 있습니다.
데이빗 진만(David Zinman)과 톤할레(Tonhalle)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가 꼭 이런 식이었는데, 매우 흥미로운 연주스타일입니다.
2악장은 제게는 다소 무덤덤하게 들렸습니다. 아마 '객관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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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이 베를린필과 남긴 80년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에 수록된 5번의 경우 좀 더 장중하고 유장한 맛이 있는데, 적어도 2악장은 이런 연주가 더 마음깊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3악장에서 4악장에 이르는 후반부는 1악장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특히 4악장에서는 목관악기의 고음처리가 매우 강렬합니다. 4악장 도입부부터 그렇습니다.
다른 지휘자들의 연주에서는 전체 오케스트라의 음향에 살짝 색채를 입히는 눈화장 정도의 역할을 했었다면 여기서는 선율표현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꽃장식 모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아바도-베를린필의 연주도 이런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극대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하나, '도!미!솔! 파 미레도레 도!"로 시작되는 4악장의 제시부를 반복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이것은 지휘자들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지난번에 소개한 베를린필과의 전집에서의 아바도나 빈필과의 5번,7번연주에서의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이 반복을 합니다. 80년대 전집에서의 카라얀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사해 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안하는 지휘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마지막 코다에 진입할때 들어갈때 현악군이 드드득하고 활이 현위에서 튀는 효과를 내도록 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래틀의 청취자에 대한 마지막 팬 서비스가 아닐까 합니다.
래틀의 오케스트라 다루는 솜씨가 어느정도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한판입니다. 이런 식으로 운명을 지휘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도 있습니다. 아주 잘 만든 요리를 먹는 것처럼 곳곳에 다른 맛이 숨어 있습니다.
세부에 재미있는 들을 거리를 많이 배치해 놓아서, 꼭 먹다보면 입안에서 과즙 캡슐이 터지는 과자를 먹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속도도 상당히 빠른 편인데, 4악장을 들으면서는 '칙칙폭폭 달리는 폭주기관차'의 이미지가 연상되었습니다.
대신, 논란의 여지도 상당히 큽니다. 베토벤 5번교향곡은 그래도 '운명'교향곡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앙꼬없는 찐빵'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래틀이 의도한 바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말러 2번 하고는 그런점에서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듭니다. 베를린필 상임이라는 보위에 오르는 순간을 눈앞에 두고, 그는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의 아류가 되는 대신 그들과 정면승부를 하기로 맘먹은 듯이 보입니다.
정경화 선생의 브람스 협주곡은 최근 그의 연주경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풍만하고 여유로우며 표정이 다채로운, 그런 것입니다.
일전에 카르미뇰라의 비발디 4계를 소개하면서 정경화의 4계를 같이 말씀드렸는데, 그 연주의 느낌과 같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정경화가 출산 이후 예전과 같은 '무녀(巫女)의 신기(神氣)'를 잃었다고 하시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확실히 DECCA에서 내놓은 협주곡 음반들과 같은 열기와 긴장감은 없어졌지만, 저는 또다른 단계의 원숙미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2악장의 아름다움은 그러므로 안네소피 무터와 카라얀의 연주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각별합니다. 무터의 그것이 풋풋한 과일내음 나는 청순한 아름다움이라면 정경화의 2악장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요.
오케스트라의 서포트는 뛰어나긴 하지만 카라얀의 베를린필보다는 중후함과 리듬감에서 조금 밀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브바협 비교음반.jpg)
많은 이들이 브람스 협주곡의 레퍼런스로 꼽는 오이스트라흐(저는 키릴 콘드라신/ USSR Radio Large Symphony orchestra와 협연한 것으로 가지고 있습니다.)를 꺼내어 다시 들어봤습니다.
독주는 온기 머금은 광채와 적절한 긴장감이 조화된 최고의 것이지만 모노인 녹음탓도 있어서 아무래도 오케스트라의 서포트가 좀 불안하게 들립니다.
정경화-래틀의 3악장은 좋긴 한데, 제 입장에서 좀 아쉬운게 두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경화 바이올린의 사운드가 오케스트라에 약간 밀리는 듯 하다는 점, 또하나는 마지막 코다로 고양되어 갈때 의도적으로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 하다는 점입니다. 좀 더 몰아부쳐도 좋을 것 같은데 거장들의 생각은 다른가 봅니다.
베토벤 5번교향곡에 대해서는 별 4개 반(★★★★☆)을 주고자 합니다. 반 개는 '감동'의 몫입니다. 푸르트뱅글러의 전쟁중(43년) 녹음에서와 같이 가슴속에서 눈물샘까지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토벤 5번교향곡비교 copy.jpg)
래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연주로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의 베토벤 5번(레이블 Erato)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세부는 거칠고 특히 금관이 가끔 삑사리에 가까운 불안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거침없이 내지르는 므라빈스키의 해석은 십년묵은 체증도 싹쓸이 할듯 후련한 쾌감을 선사해 줍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별4개(★★★★)를 주고자 합니다. 좋은 연주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레퍼런스가 등장했다'고 외치기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현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