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도깨비와 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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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수현 기자입니다. '도깨비 스톰'이라고, 들어보신 분들 계실 겁니다. 현대에 나타난 도깨비들의 한판 흥겨운 잔치판을 그려낸, '난타' 같은 비언어 퍼포먼스입니다. '타악'이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난타'와 비슷하지만, 전문 풍물연주자들이 출연해, 좀 더 음악적인 면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올해 초에 국내 공연을 했었고, 얼마 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공연 축제인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습니다.

도깨비(앞으로는 그냥 '도깨비'라고 하겠습니다)의 제작사 '미루 스테이지'의 대표 김성열 씨가 에딘버러에서 돌아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도깨비 김성열입니다!" 저돌적이고 힘찬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습니다. 제가 김대표를 안 지는 벌써 3년이 다 돼 갑니다. 원래 정동극장에서 마케팅 팀장으로 일하다가, '뜻한 바 있어' 독립했습니다. 오랫동안 기획해 온 이 작품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그야말로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여기까지 밀고 왔습니다. '대표'라지만 궂은 일 가릴 여유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죽는 줄 알았죠." 오랜만에 식사를 같이 한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공연 초반 1주일은 손님이 너무 없어 가슴이 타들어갔다는 얘기였습니다. "많으면 20명, 비 오면 10명, 이렇게 관객 놓고 공연하는데, 정말 이래 갖고 한국에 얼굴 들고 돌아갈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작품은 1482개나 됐습니다. '도깨비'가 공연된 극장 한곳만 따져도 하루 40개의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러니 멀리 아시아에서 날아온 '도깨비'는 페스티벌 개막 때 갈라쇼에 참여한 38개 작품 안에 끼었으면서도, 공연 초반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배우들은 열심히 공연하고, 홍보전에도 나섰습니다. 날마다 공연 시간 직전까지 길에서 홍보 전단을 2, 3천장씩 뿌리고 거리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도깨비 분장을 아침부터 한 배우들은 길에서 관광객들의 모델이 돼 주기도 했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된 홍보 강행군에다, 먼저 공연을 본 사람들의 입소문도 퍼져, 공연 시작 2주째부터 서서히 관객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언론들의 호평도 이어졌습니다. 공연 3주째에 접어들면서 좌석은 꽉 차기 시작했습니다. 공연을 보러 왔다 좌석이 없어 돌아가는 손님들도 있었습니다. 도깨비는 페스티벌 폐막 기념쇼에도 초청돼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인 '헤럴드'가 제정하는 '헤럴드 앤젤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묻는 제 질문에 김 대표는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새로 시작해야죠! 이제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습니다." 김대표는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하느라 그동안 벌어놨던 돈을 다 까먹었으니,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배우들이 유스호스텔의 방 하나를 빌려 단체합숙하고, 식사도 직접 준비해 해결하면서 돈을 아꼈지만, 그래도 1억원이 넘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동숭홀에서 열렸던 도깨비의 지난번 국내 공연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7천만원 적자로 끝낸 첫 공연은 뼈아픈 교훈이었습니다. '도깨비'라는 소재를 도입한 것은 신선한 시도라는 평을 받았지만, 배우가 아닌 연주자들의 공연이라 연극적인 긴장감과 구성력이 떨어졌습니다.

저도 이 공연을 봤지만, 이미 타악 퍼포먼스는 기존 작품도 워낙 많은 상황이라, 다른 작품들과 확실히 차별되는 '그 무엇'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이후 김 대표는 전문 뮤지컬 연출가를 영입해 작품을 다듬는 작업에 나섰고, 한편으로는 '돈 버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기업 행사, 고객 사은행사, 상가 개점식 등등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나 달려갔습니다. 몇 달 동안 이런 이벤트성 공연을 100차례 가까이 해서 해외 공연 여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것입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사람들이 색다르다고 좋아해 줬지만, 정말 모자란 게 많아요. 이것 갖고는 안됩니다. 확 뜯어 고쳐야죠." 그는 이번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서양인 관객들과 우리 관객들의 취향이 너무나 다른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습니다. 국내 공연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던 장면에 외국인들이 열광하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김 대표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난주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됐던 발레 '심청'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유니버설 발레단 문훈숙 단장이 심청 역을 한 첫날 공연을 봤는데, 문 단장의 심청 연기가 아주 감동적인 공연이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심청'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공연된 작품입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효녀 심청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적인 것'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발레라는 장르가 서양의 예술장르이고, 발레음악도 서양의 관현악이니,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용궁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져 가게 되는 용궁은 우리 설화에 나오는 용궁의 모습이 아닙니다. 용왕의 모습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 나오는 바다의 왕과 닮았습니다. 삼지창(!)을 들고 숱이 많은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로마 신화 속의 바다의 신 넵튠(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이 들고 있는 바로 그 삼지창입니다. 용궁의 물고기들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습니다. 번쩍번쩍한 비늘과 휘황찬란한 빛깔로 온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용궁 장면이 마치 '리도 쇼'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용왕의 아들, 바다나라의 왕자는 심청을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아주 낭만적입니다. 심청과 왕자의 낭만적인 2인무가 나오게 되죠. 하지만 심청은 왕자의 사랑을 마다하고, 아버지를 찾으러 지상세계로 올라가겠다고 간청합니다. 이런 예는 또 있습니다.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들기 전, 배 위에서 깜빡 잠이 드는 장면이 있는데, 꿈 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심청과 아버지를 만나게 해 줍니다. 이 천사(선녀가 아니라)는 서양 동화에 나오는 그 천사, 또는 요정의 모습입니다. 또 뱃사람들은 아주 강렬한 원색--빨강, 노랑, 파랑으로 눈에 확 띄는 빛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들의 춤은 아주 역동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이 듭니다. 제가 지난해 시카고에서 봤던 '심청'에서는 심청이 용왕이 준 수건, 혹은 스카프를 갖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마법의 스카프'입니다. 이 스카프를 눈에 대면 장님도 눈을 뜹니다. 심봉사 뿐 아니라 궁궐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광명을 되찾습니다. 외국인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좋아합니다(한국 관객들에게는 이런 설정이 부자연스러울 것으로 염려했는지, 이번 국내공연에서는 이 스카프 없이, 모든 사람들이 흥에 겨워 저절로 눈을 뜨게 되는 것으로 설정됐습니다).

발레 '심청'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초연 이후 끊임없는 수정과 개작을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특히 유니버설 발레단의 예술감독 올레그 비노그라도프는 심청의 해외 공연을 앞두고 많은 부분을 서양인들의 취향에 맞도록 대폭 뜯어고쳤습니다. 올레그 비노그라도프는 키로프 발레단의 예술감독 출신입니다. 이 때문에 해외 평론가들은 '심청'에서는 러시아 발레, 그 중에서도 키로프 발레단의 향기가 느껴진다는 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 관객들이 심청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효 사상에 자연스럽게 공감했습니다. 그들은 용궁 장면도 좋아했지만, 특히 마지막 궁궐 장면에서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무대 장치는 날아갈 듯한 기와의 선이 돋보이는, 우리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과시했고, 비록 춤추기 좋게 개량되기는 했지만, 무용수들이 입은 한복의 아름다움도 돋보였습니다. 국내 공연에서도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로 귀중한 창작 발레 '심청'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두서 없이, 갑자기 꺼낸 발레 '심청' 얘기를, 김 대표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아주 열심히 들어줬습니다. "재미있네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우리도 각본을 새로 고치고, 연출 작업도 다시 하려고 해요. 아마 외국인이 참여하게 될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미 '난타'는 외국인 연출자를 데려다 이런 작업을 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작품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도깨비'는 내년에도 95회 정도 해외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해외의 각종 공연 예술제에서 이 공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깨비'의 궁극적인 목표는 런던이나 뉴욕에서 장기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축제 기간에 잠깐 공개되는 이색적인 해외 공연'으로서가 아니라, 공연예술의 중심지에서 관객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영어로 공연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사인 극단 에이콤 대표 윤호진 씨의 얘깁니다. 해외 공연을 나가 보니, 한국어로 공연하고 영어 자막으로 대사를 전하는 방식으로는 외국인 관객과 '소통'하는 데 엄청난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윤대표는 벌써 '명성황후'의 영어 대본까지 따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영어 공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해외 시장을 겨냥한다면 그만큼 '현지화'가 필수적이라는 얘깁니다. '도깨비'의 '귀국 기념 공연'은 "헤럴드 엔젤어워드 수상기념 특별공연'으로 이름을 붙여서 다음달 11일부터 14일까지 열릴 예정입니다. 공연 시간은 11일, 12일은 3시와 6시30분, 13일과 14일은 7시30분입니다. 장소는 대학로에 있는 폴리미디어 씨어터입니다. 문의전화는 2068-0657, 8. 이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도깨비'가 갈 길은 아마도 편안한 길은 아닐 겁니다. 다행히 에딘버러 축제에서의 성공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으니, 이제는 투자자가 나설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도깨비'가 앞으로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김 대표는 계속 '도깨비 김성열'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열심히 뛰어다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 이 글은 SBS뉴스넷의 허가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김수현 기자의 다른 글은 http://news.sbs.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