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네 : 마농 - 할리우드 영화와 프랑스 오페라의 만남
프랑스 오페라에 웬 마릴린 먼로? 작년 봄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올려졌던 마스네 오페라 (마농)의 DVD 출시분은 재킷 사진만으로도 보는 이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속사정을 알고 보면 관심을 끄는 대목은 더욱 많다.
우리 시대 최고의 오페라 스타 가수인 안나 네트렙코와 롤란도 비야손이 함께 출연했으며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를 맡았다. 여기에 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안무와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연출자로 잘 알려져 있는 빈센트 패터슨의 파격적인 연출까지 더해져 그 시너지 효과가 무려 1000 유로를 웃도는 고가의 티켓 가격으로 나타났던 화제의 공연이다.
패터슨이 설정한 무대의 시간적 배경은 1950년대. 원작에서 이백년 이상을 뛰어넘었다. 전주곡이 연주되는 동안 기차를 기다리며 영화 잡지를 탐독하는 마농의 모습을 통해 유별난 연출 방향은 미리 예고된다. 영화 속의 스타처럼 화려한 삶을 꿈꾸는 철부지 소녀 마농은 천진난만한 오드리 헵번의 모습으로 등장해 관능적인 마릴린 먼로를 거쳐 비극적 분위기의 잉그리드 버그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한다.
2막에서 데 그리외를 희롱하는 섹시한 짧은 속옷 차림의 마농은 민망할 만큼 파격적이며, 4막의 호텔 도박장 장면에서는 섹스 심볼인 마릴린 먼로와 쇼걸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퇴폐적인 부르주아적 사회상을 직설적으로 묘사했다.
다분히 미국적이며, 지극히 할리우드적인 무대는 마농의 변신 외에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전막을 관통하는 ‘스포트라이트'의 움직임을 주시해야할 필요가 있다. 마농의 심리 변화에 따라 조명 기사를 대동하고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는 스포트라이트는 패터슨 연출의 핵심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마농의 끊임없는 변덕과 욕망을 영화에 빠진 소녀의 망상과 나르시시즘으로 치환시킨 연출자의 시각은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마농의 덧없는 허영심을 끈질기게 조명한다. 마농이 잘못을 참회하고 데 그리외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5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덩그러니 서 있는 스포트라이트는 끝내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의 영화적 허영심도 끝나버린 것이다.
마농을 열연한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모든 장면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것은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늘씬한 몸매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한 영화적 캐릭터로 변화를 가능케 한 화려한 의상과 분장 때문만도 아니다. 오페라 가수 본연의 재능인 연기력과 가창력에 있어서 네트렙코는 압도적인 광휘를 발산한다.
특히 네트렙코의 취약점으로 여겨졌던 가창력의 성장은 눈부시다. 이전의 벨칸토 오페라에서 드러냈던 기교와 고음 처리의 문제는 마스네의 관능적 선율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네트렙코의 음성은 때로 비야손을 압도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
비야손은 앞서 출시된 맥비카 연출의 (마농) (Virgin, 2007년)에서 드세이의 상대역으로 훌륭한 데 그리외를 선보인 바 있다. 여전히 그는 열정적인 가창과 능란한 연기로 무대를 누빈다. 3막의 유명한 아리아 “가거라, 달콤한 환상이여”는 비야손의 열창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으로 기억될 것이다.
바렌보임의 지휘는 어떨까? 바렌보임을 아는 이라면 그가 결코 이런 류의 오페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 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실제로 본 공연의 예정된 지휘자는 베르트랑 드 빌리였다. 드 빌리의 중도하차로 별안간 지휘봉을 넘겨받은 바렌보임은 극적으로 단 열흘 만에 스코어를 익혀 포디엄에 올랐다. 그리고는 마치 예전부터 (마농)을 즐겨 지휘해 온 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음악을 이끌어간다. 바렌보임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경이로운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진지한 오페라 애호가가 아니라면 마스네의 (마농)은 접근하기 쉽지 않은 작품일 수도 있다. 마스네의 음악적 코드에 익숙하지 않다면 3시간에 육박하는 공연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상물은 그런 부담을 떨쳐버려도 좋을 가장 대중적인 (마농)의 해법이 담겨 있다.
오락성과 작품성의 균형을 갖춘 쉽고 흥미로운 전개, 스타 가수들의 열창과 거장 지휘자의 노련한 리드, 그리고 한글 자막이라는 도우미까지. 이 영상을 보고도 (마농)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당신은 이 오페라와 영원히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