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 쉬프/ECM
언드라스 쉬프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7, 8집
이제 언드라시 쉬프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사이클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 동안 길고 힘든 여정을 거치며 각 작품마다의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다. 비엔나적인 향취와 시대음악적인 새로운 디테일, 현대적 피아니즘의 표현력과 새로운 낭만성에 대한 실험 등등, 쉬프는 지금까지 완결했던 그 어떤 사이클보다 훨씬 강도 높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 마지막 힘을 다해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를 마무리 지은 그는, 위대한 베토벤 해석가 대열의 마지막에 합류하며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이며 베토벤의 서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브렌델과 폴리니 이후, 바렌보임과 오피츠와 더불어 우리 시대의 베토벤 해석의 3대 천왕으로 등극한 쉬프의 업적에 감히 ‘역사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여본다.
27번 소나타 첫 악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성격대비다. 흐드러지듯 질주하는 프레이징과 포르테로 통통 튀며 상승 하강하는 악구, 강한 듯 사뿐한 스타카토와 명징한 스케일 등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작품에 다채로움을 실어올린다. 2악장에서의 투명한 쉬프의 오른손 톤과 절묘한 아고긱, 왼손의 탄력적인 리듬감을 통해 살아나는 특유의 리리시즘과 절묘한 페달링 덕분에 피어나는 환상적인 분위기 또한 훌륭하다. 이 작품에 슈베르트를 연상시키는 듯한 섬세하되 확고한 목소리가 숨어있었는지 새삼 깨닫게끔 한다.
28번 소나타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의 시작으로서 쉬프의 놀라운 분석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1악장 조금 빠르게, 그리고 열렬한 감정을 가지고에서 쉬프는 뒤에 이어질 행진곡 풍의 리듬과의 대비를 염두에 둔 듯 과도하지 않은 낭만성과 적절한 암시를 부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고, 다음 악장에서의 앙징맞은 듯 효과적인 화성 연타와 붓점 리듬이 그 덕분에 우아함을 잃지 않은 생동감을 머금게 된다.
이 악장에서 쉬프가 컨트럴하는 세분화된 음의 길이와 잔향의 길이(특히 3분대의 경과부)의 일정함에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보통 ‘행진곡'으로 일관하는 해석과 비교하자면 쉬프의 해석은 실로 세련미 넘치고 고귀하기까지 하다. 3악장의 함축적인 푸가는 후기 소나타들 고유의 형식 해체를 예견하는 대목으로서, 쉬프가 기울이는 고도의 집중력과 대위법적 정교함은 이후 네 곡의 후기 소나타들의 장대한 푸가 악장들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4악장의 날아갈 듯한 비상감과 아기자기한 리듬감은 고도의 수수께끼를 거친 뒤의 시원한 종결로서 손색이 없다.
29번 ‘함머클라비어'는 그 작품 자체의 독보적인 위상 때문인지 쉬프는 대단히 다이내믹하고 추진력 높은 해석으로 첫 악장을 시작한다. 곧이어 쉬프 특유의 감각적인 터치와 윤기가 흐르는 프레이징 처리가 2주제에서 흘러내리며 악장 전체의 진행을 탄력적으로 이끌어간다. 특히 포르테와 피아노의 대비를 통해 음향에 입체적인 요철을 주는 해석이 이채롭다. 바렌보임이나 브렌델의 연주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인상, 혹은 쉬프의 개성이 돋보인다.
3악장의 몽환적이면서 서사적인 연주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4악장 푸가에서 쉬프의 존재감은 단연 환상적이다. 그동안 바흐를 통해 선보였던 푸가 예술의 모든 디테일과 가능성을 모조리 보여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히터가 보여주었던 바그너적인 위풍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바 있는 "God is in the detail"이라는 격언을 충분히 연상시킬 수 있을만큼 치밀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지극히 베토벤답다.
30, 31, 32번 소나타 앨범은 클라우디오 아라우와 루돌프 제르킨 사후 가장 주목할 만한 연주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다. 아마 이 한 장의 음반으로도 베토벤 해석에 있어서 쉬프의 역사적인 가치는 영원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시대별로 베토벤의 개성과 음악적 특징을 고려하여 음색과 프레이징, 디테일 등에 조금씩 다른 성격을 부였던 그는, 이 세 개의 소나타에서는 완전히 작곡가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고전과 낭만을 잇는 가교로서의
베토벤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30번의 레고블럭 같은 1악장과 부를레스케와 같은 2악장에서 보여주는 신선한 매력은 가장 중요한 3악장 변주를 설득하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 디아벨리 변주곡의 축약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 3악장에서 펼쳐지는 여섯 개의 변주에서 쉬프는 평화로움과 자연스러움, 일말의 고뇌와 이에 대한 도전, 그리고 환희가 한 편의 영화처럼 스펙타클하게 펼쳐진다.
특히 마지막 변주에서 불가사의할 정도의 마력을 발산하는 왼손 트릴과 단호한 오른손의 시그널적 음향이 주는 고양감과 마지막 반복 주제의 평화로움은 극적이다 못해 서럽기까지 하다. 베토벤식 변주의 모든 것을 뿌리뽑은 쉬프는 31번에서 베토벤식 푸가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처연한 분위기로 충만한 아다지오를 거쳐 상승주제 푸가와 하강주제 푸가의 데칼코마니적 완결성을 쉬프는 완성한다.
첫 번째 푸가에서 각 성부는 또렷이 숨쉬고 대위적 긴장감은 내면으로 응축되어 들어간다. 중간 브릿지에서 쉬프는 흐릿한 음향을 바탕으로 또렷한 멜로디 라인(쉬프다운 미묘한 템포 루바토가 인상적)을 뽑아내며 두 번째 푸가로의 심오한 이행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푸가의 장대한 크레센도와 분절을 섞어 추진력을 더하는 피날레는 곧바로 환희로 이어지기보다는, 이후 32번 소나타 첫 악장에서의 카오스를 암시하는 듯 얼마간의 허무함이 배어있다.
32번 소나타의 단호하면서도 절망적인 마에스토소와 격렬함과 고통을 호소하는 알레그로는 쉬프가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서른 한 개의 소나타에 대한 경이로운 오마쥬라고 말할 수 있다. 대위법적인 것과 화성적인 것의 기묘한 화해를 절묘한 줄타기를 통해 보여주는 쉬프는 혼심의 힘을 다해 이 1악장을 가다듬는다. 31번에서 이루지 못한 피안의 세계를 향한 염원은 아리에타 악장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매 순간 격렬하되 더 나아가지 못하는 발걸음, 쉬어가되 앉아만 있을 수 없는 초조함, 17여분에 이르는 그 기나긴 여정을 거친 뒤 천상의 하프 소리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현실 너머의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해방감. 그리고 푸른 하늘에 남겨둔 한 조각 구름과 같은 진한 여운. 쉬프는 이 작품에서 감각과 구조, 해석과 직관을 하나로 통합한 베토벤의 음악적 이상을 너무도 완벽하게 보여준다.
누가 뭐래도 베토벤을 스타일 혹은 모드에 부응하여 해석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무릇 베토벤은 연주자의 확고한 신념과 오랜 통찰에 의한 산물이어야 하고, 또한 피아노 예술에 대한 초감각적인 선이해를 수반해야 한다. 시대 정신, 악기, 전통, 혹은 개성 등등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라는 텍스춰를 조명하는 도구일 뿐 본질이 될 수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베토벤에 대한 연주가의 헌신 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집념이랄까. 마치 언드라시 쉬프처럼 말이다.
그라모폰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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