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프게니 키신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
예프게니 키신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
예프게니 키신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에 도전했다. 키신은 12년 전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협주곡 2번과 5번을 녹음했었다(Sony).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특출한 감각이 십분 발휘된 그 레코딩도 좋았지만, 이번 레코딩은 거기에서 진일보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특유의 잘 여문 타건과 제대로 숙성된 해석이 콜린 데이비스가 이끄는 런던 심포니의 감성 풍부한 서포트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일구어냈기 때문이다.
"군소 예술가들에게 유희와 기교는 순간의 덧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 그것은 가장 심오한 예술의 실체로 길을 열어주었다."
이번 음반 내지에서 리처드 오스본이 언급한 위 구절을 응용한다면, 키신의 1, 2번 연주야말로 유희를 예술로 승화시킨 대가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젊은 베토벤의 패기와 재치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들 초기작에서 키신은 경탄할 만큼 잘 다듬어낸 터치와 한 단계 여과시킨 해석을 들려준다.
둘 중 키신에게 보다 어울리는 쪽은 1번인데, 1악장에선 베토벤 특유의 장쾌함이 확고한 균형감 위에서 부각되고 있으며, 2악장의 깊고 풍부한 뉘앙스 표현도 인상적이다. 다만 3악장에선 악곡에 스며있는 장난기와 익살스러움이 다소 무겁게 표현되는 경향이 있는데, 텍스트의 반짝임을 가릴 정도는 아니며 앞선 악장들과의 연결성을 감안하면 납득이 간다. 그런가 하면 갈랑적인 경쾌함과 우미함이 두드러지는 2번에서는 시프나 페라이어 류의 수채화풍 터치가 못내 그립기도 하지만, 키신의 유화풍 연주도 충분히 자족할 만한 수준이다.
키신의 스타일과 연령을 감안할 때, 그에게 가장 잘 맞는 레퍼토리는 3번이 아닐까 싶었다. 이 과도기적 걸작에서 키신의 접근법은 일견 과단성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곰곰 음미해보면 그것은 신중한 숙고와 적절한 여과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그가 2악장에서 피워내는 그윽하고 겸허한 아우라는 가히 일품이며, 전편에 걸쳐 느껴지는 진지한 자세와 신중한 몰입의 설득력도 대단하다. 약주부의 내밀한 뉘앙스와 강주부의 의연한 위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사뭇 중후한 멋을 풍기는 수연이라 하겠다.
한편 4번에서 키신은 1악장을 매우 부드럽게 다루고 있는데, 그 가지런한 터치와 유려함 흐름의 아름다움은 각별하지만, 조금 더 바란다면 '가슴 벅찬 설렘'이라는 덕목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2악장의 착 가라앉힌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내는 정묘한 뉘앙스 표현과 극적 고조의 설계는 빼어나며, 3악장의 활기찬 흐름과 세련된 터치도 멋지다.
마지막으로 5번. 필자가 보기에 이 곡의 성격과 내용은 '황제'라기보다는 '영웅'이라는 단어에 더 어울리는 것이지만, 키신 정도의 연주라면 '황제'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지 않을까. 그만큼 당당한 풍격과 고귀한 기품, 드문 수준의 절제가 한 데 어우러진 절연으로, 길렐스나 루빈스타인의 위대함에 비견해도 큰 실례는 아닐 것 같다. 무엇보다 2악장에서 그와 악단이 빚어내는 명상적 호흡과 사색적 표정은 3번의 2악장과 더불어 이번 전집의 백미라 할 만하다.
-llhtml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