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 아이다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이 오페라 도시에서는 인문학자들의 모임인 피렌체 카메라타에 의해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고자 1598년에 첫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후 경제적, 문화적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토스카나 지방은 그 주도권을 다른 도시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라노, 베니스, 토리노, 나폴리 등지가 새로운 오페라 중심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유서 깊은 테아트로 델라 페르골라에서는 여러 모차르트 오페라의 이탈리아 초연을 비롯하여 1847년에는 베르디 자신의 지휘로 ‘맥베스’가 초연되어 그 사그러들지 않는 명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르노 강에 위치한 이 유구한 르네상스 도시의 진정한 영광은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다시금 재건될 수 있었다. 1933년 지휘자 비토리오 구이가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재단을 설립하여 오페라 페스티벌을 운영하면서부터다. 오페라 장르의 발생지로서의 명성을 계승하려는 듯 이 피렌체의 오페라 페스티벌 역시 이탈리에서 열린 최초의 오페라 페스티벌로 기억된다. 처음에는 2년에 한 번 개최되다가 1937년부터는 매년 5월과 6월에 페스티벌이 열려 많은 오페라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특히 명작들을 무대에 올리는 것 외에 신작들을 초연하여 그 음악성과 실험성 모두를 충족시킨다는 것 또한 이 페스티벌만의 특징이다.
2009년에는 중앙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이 삭감되어 두 편의 오페라가 취소되는 상황도 있었지만, 1985년부터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는 주빈 메타의 풍부한 경험과 노련한 운영 덕분에 이러한 난관을 잘 헤쳐나가고 있다. 올해에도 신작을 포함하여 아홉 편의 오페라가 무대에 오를 뿐만 아니라, 여덟 편의 발레 작품을 비롯하여 라두 루프와 파비오 비온디의 연주회를 포함한 다수의 연주회가 올려질 예정이다. 한편 상업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DVD와 같은 영상물을 적극 발매하기 시작하여 페르골라 극장의 탁월한 음향효과와 예술적인 무대, 성악진들의 탁월한 가창과 연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음반 시장이 위축되고 그 수요가 AV쪽으로 몰리게 되면서 오페라 영상쪽의 각축전은 전세계 음반회사 및 오페라 극장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미 메트나 라 스칼라, 비엔나 국립 오페라 같은 경우 오래 전부터 이러한 작업을 해왔고 HD 시대에 접어들며 그 위세를 맹렬하게 떨치고 있는 반면, 다른 극장들은 이제 그 시장의 파이를 셰어하고자 차근차근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역시 가세하여 지금까지 TDK 레이블을 통해 굵직한 영상물들을 몇몇 발매한 바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시몬 보카네그라’나 주빈 메타의 ‘팔스타프’, 리카르도 프리차 지휘의 롯시니 ‘탄크레디’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페스티벌의 기간이 한정되어 있는만큼 아직 많은 양의 영상물을 만나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페스티벌의 자체 기획이 아니라 RAI에서 촬영한 것을 발매하는 만큼 그 폭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에 발매된 주빈 메타 지휘의 2011년 ‘아디아’ 영상물은 이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의 역사적 분기점이 될 수 있을 만한 파괴력과 완성도를 갖고 있어 각별한 주의를 끈다. 물론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의 월드 베스트 셀링 영상물로 RCA에서 발매된 ‘투란도트’에서 이미 오페라 무대 스케일의 극한과 이 오케스트라의 최대치를 보여준 바 있지만, 이번 ‘아이다’는 페르골라 극장에서의 공연으로서 최고의 무대 최상의 배역,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지휘, 이렇게 삼박자가 균형잡힌 조화를 이룬 무대로 그 가치가 높다. 최근 발매된 리카르도 샤이-라 스칼라-프랑코 제페렐리의 더 이상 호화로울 수 없는 황금빛 ‘아이다’의 완성도를 뛰어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적어도 로베르토 알라냐는 이 프로덕션의 마르코 베르티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우선 터키-이탈리아 출신의 영화감독인 페르잔 오즈페텍의 탁월한 연출은 오페라 무대에 진출한 다른 영화, 연극 감독들의 무대보다 훨씬 드라마적인 리얼리티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테크니컬러’(technicolor) 기법에 의한 색감이 두드러진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밤의 깊은 코발트색과 새벽녘의 자주빛 붉은 색감이 무대 뒤 배경과 조명을 통해 은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동시에 인물들과 무대장치의 입체감을 부각시킨다. 특히 세트 디자이너인 단테 페레티의 스펙타클한 무대도 놀라운데, 특히 전막을 통해 실내라는 한정된 무대를 벗어나 외부 사막으로 공간을 개방시켜 내부와 외부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시청자로 하여금 원근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2막 1장에서 기둥 사이로 사막의 거인상이 보이고 거울을 든 하녀들이 등장하여 암네리스의 자아도취를 강조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고, 1막에서는 새벽의 어슴프레한 붉은 빛이 실내로 들어오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것을 거쳐 거대한 여신상이 등장하는 2장 개선 장면은 완전히 야외를 연상케하며 무대에 점층적인 확산감을 더한다. 개선장면에는 화려한 전리품들이 등장하지 않아 아쉬움을 토로할 사람들도 있을 법한데, 한 포로 소녀의 죽음을 통해 이디오피아인들의 처참함을 드러내는 효율적인 효과를 의도했다(오케스트라 템포도 장송곡처럼 아주 느린 편이다). 호수가의 푸르스름한 배경이 장관인 3막도 훌륭하고 야외와 이어져 있는 지하감옥의 구도적인 균형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중국 소프라노 후이 히는 그 목소리의 깊이감과 무게감이 탁월하여 1막과 3막에서의 괴로운 감정을 잘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3막에서 루치아나 딘티노와의 2중창은 단연 압권이고 1막에서 ‘이기고 돌아오라’에서의 격정적인 내적 토로 또한 수준급이다. 연기적인 측면은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적어도 성악적으로는 최고 수준으로 꼽을 만하다. 아름다운 톤과 스핀토적인 기운을 갖고 있는 베르티는 ‘청아한 아이다’와 같은 결정적인 아리아에서 기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다소 보여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라다메스에 어울리는 무게감과 단호함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4막에서 아이다와 함께 부르는 2중창의 호소력과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성악진들은 일말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호흡과 극적인 고양감, 드라마적인 긴장감을 훌륭하게 만들어가는 반면, 이를 이끌어가는 메타의 지휘가 전체적으로 가장 커다란 아쉬움을 남긴다. 디테일이나 서정적인 멜로디의 흐름에서는 발군의 표현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템포의 변화가 느슨하고 다이내믹 또한 극단적이지 않아 베르디 특유의 고전적인 완결성을 드러내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대목만큼은 라 스칼라의 샤이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한다.
‘아이다’의 새로운 이미지와 연출을 원하는 애호가들에게 최선의 선택으로 추천할 수 있는 이 영상물은 DVD와 블루레이 두 가지 포맷으로 나왔다. 두 미디어 모두 한글 자막을 포함하고 있고 1080i의 Full-HD화질로서 무대의 시원스러운 색감이 정묘하게 전달된다. 단 DVD는 DTS 사운드 없이 PCM과 돌비 5.1만을 지원하는만큼 되도록 DTS HD-Master Audio 5.1을 지원하는 블루레이를 구입하기를 권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