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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글자막 DVD가 라이센스는 물론이려니와 수입으로도 다수 발매되다보니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의 몇몇 오페라에 국한되어 있던 국내의 애청 오페라 레퍼토리의 폭이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오페라의 감상 혹은 이해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리브레토가 한글로 번역된 숫자가 적다보니 그 동안 서양 클래식 음악 역사의 집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오페라 장르를 다양하게 즐길 여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출판사나 대학 중심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바로 이 기초작업을 바로 국내의 음반사들이 뜻을 갖고 진행하고 있으니 음악 애호가들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는 메인 레퍼토리를 벗어나 유럽에서도 메인 레퍼토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작품까지 한글번역으로 소개하는 야침찬 기획을 선보였으니, 그것이 바로 이 지면에 소개할 야나체크의 오페라 ‘미크로풀로스 사건’이다.
 

레오시 야나체크(1854~1928)는 드보르작 이후 최고의 체코 작곡가로 그 이름이 높다. 그러나 그 유명세만큼 그의 다양한 장르의 많은 작품들은 아직도 청중들에게 친숙하지만은 않다. 그나마 관현악의 명곡인 ‘타라스 불바’나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등장하는 ‘신포니에타’, 혹은 불륜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현악 4중주 2번 ‘비밀편지’ 정도, 혹은 애국심의 발로인 2악장의 피아노 소나타 ‘1905년 10월 1일’ 정도의 이름 정도가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음악에서는 국민주의적 열정 혹은 극단적인 우울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1917년 그의 마지막 사랑인 유부녀 카밀라 스퇴슬로바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난 뒤에는 왕성한 창작열과 더불어 관능적 표현주의와 환상적인 사실주의가 음악을 뒤덮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대부분이 바로 이 말년의 사랑의 시기에 탄생한 것인데, 특히 이 시기에 작곡한 오페라들이야말로 평생에 걸친 야나체크의 신념을 집약한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체코의 상류층과 문화계는 대부분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애국자였던 야나체크는 끝까지 체코어로 된 리브레토를 사용했다. 이미 그는 1904년 ‘예누파’로 성공을 거둔 바 있는데, 이 작품은 향토적인 선율과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로 낭만주의적인 감수성을 훌륭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그러나 한 동안 오페라에 손을 대지 않았던 야나체크는 스퇴슬라바를 만난 이후 심기일전하여 오페라를 쏟아내기 시작하며 보다 표현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세계로 향했다. 이 ‘마크로풀로스 사건’을 비롯하여 ‘카차 카바노바’(1921), ‘교활한 암여우’(1924), ‘죽은 자의 집에서’(1928) 등등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들이 바로 이 시기의 산물이다. 이들 오페라의 공통점은 이전과 달리 요부스러운 여주인공이 등장하여 관능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이다. 아마도 야나체크가 자신의 뮤즈로부터 느낀 감성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이들 작품은 체코어라는 한계 때문에 서유럽 오페라 극장에서도 메인 레퍼토리로 인식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호주 출신의 지휘자로서 야나체크의 사랑을 받았던 체코의 명 지휘자 찰스 매케라스의 노력으로 이러한 편견은 깨지게 되었고, 야나체크의 오페라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오페라 레퍼토리로 급부상할 수 있게 되었다. 드뷔시나 말러보다 일찍 태어난 야나체크의 음악이 그들보다 덜 급진적이고 덜 혁명적이고 해서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들이 작곡하지 않은 오페라 장르에 있어서 야나체크가 보여준 극적 감수성과 음악적 표현력의 일체화만큼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후기 독일낭만주의 작곡가들이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표현력과 감수성을 독창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크로풀로스 사건’은 1926년 작곡가가 서거하기 2년 전에 완성된 걸작으로서 현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욕망과 부조리를 조명한 교훈적인 작품이다. 내용은 아버지가 만든 신비의 약 덕분에 무려 337년을 산 아름다운 여성인 마르티와 몇 세대에 걸쳐 재산분배 소송을 진행 중인 프루스 남작과 그레고르 가문 사이에 얽힌 사건과 욕망의 SF적 환타지인데, 자세히 보면 호러, 미스터리, 불륜, 법률, 추리, 치정 등등의 다양한 소재가 얽힌 일종의 장르파괴적 리얼리즘 오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캐빈 인 더 우즈’처럼 이 오페라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작품의 방향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을 법도 하다. 이것은 바로 야나체크가 카렐 차페크(1890~1838)가 쓴 동명의 희곡을 각색했기 때문으로서, 차페크는 로봇이라는 단어(체코어로 로보타, 즉 노동을 하도록 고안된 존재라는 뜻)를 처음으로 사용한 1920년작 희곡 ‘로봇’을 쓴 체코의 저명한 극작가다. 그만큼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복잡하지만 정교하고 공상적이지만 사실적이며 기괴하지만 감각적이다.
 

음악 또한 이러한 대본의 완성도 이상으로 훌륭하다. 아니, 위대하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그 동안 매케라스의 DECCA 음반 외에 CD와 영상물을 통틀어 이 작품의 대표음반이라 부를 만한 음반이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HD 소스의 밝고 선명한 화질과 최신의 음향 컨디션으로 제작된 이 2011년 잘츠부르크 실황 DVD의 가치는 더 없이 높다. 더군다나 체코어, 독일어, 그리스어 등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하는 이 오페라의 대본을 한글자막으로 볼 수 있어 화면과 내용의 즉각적인 이해와 극에 대한 몰입을 높일 수 있고, 크리스토프 마르탈러의 연출은 현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효과가 극대화되어 있어 무대에 설득력 또한 높다. 더군다나 매케라스 이후 야나체크 오페라의 최고 연주집단으로 평가받는 빈 필하모닉의 환상적인 사운드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겔라 데노케를 비롯한 현역 1급 성악가들의 열연, 예사-페카 살로넨의 열정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지휘까지, 모든 것이 최고인 영상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페라에 앞서 이 작품의 주제를 압축해 놓은 ‘무언의 프롤로그’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이 영상물의 장점이다.
 

무대는 1막부터 3막까지 변하지 않는다. 맨 좌측에는 흡연실과 객실이 설치되어 있어 극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들이 극과 연관성을 맺고 있는 에피소드적인 극을 독립적으로 펼쳐나간다. 특히 ‘무언의 프롤로그’에서 두 명의 청소부가 영생의 삶을 논하는 흡연장면과 마지막 호텔 객실에서 노파가 꽃다발을 받으며 기뻐하는 장면은 극중극으로서의 색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무대 중앙은 일종의 재판장이다. 여기서 모든 내용이 펼쳐지며 이에 대한 현실적인 상징은 왼쪽 무대에서 이루어진다. 맨 오른쪽 무대는 잉여공간과 밀실로서 극에서 밀려난 자들 혹은 죽은 자들이 등장하는 억압된 차원이다. 이렇게 현실의 세계-극의 세계-무의식의 세계가 수평적으로 꾸며진 파노라마 같은 무대에서 등장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은 제각기 관련을 맺으며 만화경 같은 삶의 비극을 진행시킨다.
 
데노케의 존재감은 이 극의 전체를 압도한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괴물 같은 히로인으로서 그녀는 모든 캐릭터들과 사건들의 추이를 관통하고 있음을 엄청난 표현력으로 보여준다. 대화 오페라인 탓에 아리아라고 말할 수 있는 특징적인 대목은 없지만 3막에서 자신이 337년전 그리스에서 태어난 엘리나 마크로풀로스이고 그 많은 이니셜 E.M.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며 아버지로부터 불사의 약을 전수받았노라 말하는 대목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성악적 흡인력은 가히 발군이다. 적어도 이 배역만큼은 데노케 외에 그 어떤 소프라노도 이토록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떠오르게끔 하는 대목이다. 
 

희곡을 바탕으로 한 만큼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나 음악적으로 커다란 두각을 보이는 역할은 딱히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르 역의 레이몬드 베리는 탐욕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고 라이벌인 푸로스 역의 요한 루터는 귀족적인 자신감과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아들인 야넥 역의 알레시 브리스체인은 마치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역시 자살하는 동네 청년과도 같은 우유부단함과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들 캐릭터는 가사의 단어 단어에 담겨 있는 뉘앙스와 문장이 갖고 있는 극적 표현력을 리얼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상대 배역과의 호흡 및 오케스트라와의 밸런스 모두에 있어서 순발력 높은 앙상블을 보여주며 야나체크 오페라의 매력을 한껏 배가시킨다.
 

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오페라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지휘자 예카-페카 살로넨이다. 그의 지휘는 감각적이면서도 서정적이다. 특히 빠른 대사의 주고받음에 있어서 오케스트라는 명확하고 놀라울 만한 변화무쌍한 표정을 발산한다. 특히 1막에서의 뇌쇄적인 마르티의 등장과 수동적인 인형과 같은 크리스타의 음악적 대비, 유서를 찾아내기 전까지 갈등을 고조시키는 오케스트라 단편들의 특징적인 인상들은 현대적인 감수성이 두드러지고, 2막에서는 후기낭만주의적인 감정의 폭발과 긴장감의 고조, 3막에서는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듯한 선율적이면서도 평화로운 화음의 향연이 그러하다. 야나체크 오페라만의 독특한 매력을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 DVD에서 살로넨의 인상적인 클로즈 업 지휘 장면만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이 영상물의 또 다른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