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발사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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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 속의 그대를 찾아서

그를 본 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생김새가 어떠한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10여 년 전, 몇 번 만나는 동안 이름조차 묻지 않았으니 그의 이름 또한 알 턱이 없다. 어쨌든, 그는 이발사였다. 제 가게도 없이 이 곳 저 곳을 떠돌며 하루 일당으로 5만 원을 받고 사글세방을 전전하는 가난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시골에서 상경하여 이발소에 취직한 그에게는 남다른 꿈이 있었다. 그것은 번듯한 가게도 아니었고, 내 집도 아니었으며, 오직 삶의 갈증을 채워 줄 오디오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 동안 자신의 고단한 삶을 지켜 준 것은 음악이라고 했다. 보잘것없었지만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음향 기기였던 FM 라디오가 서울에서 사귄 유일한 벗이라고도 했다. 음악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그에게 오디오 시스템이 절실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오디오 상점에서 처음으로 만난 그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한 눈빛과 의기소침한 몸가짐은 보기조차 안쓰러웠다. 사연을 물었더니 고생 끝에 모은 돈으로 오디오 시스템을 장만하여 자신의 단칸방에 들여놓고, 며칠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오디오 취미는 이발사의 얄팍한 수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호사였던 것이다.

상점 점원의 말에 의하면 기기 바꿈질에 돈이 바닥난 그가 최후로 선택한 것은 자신의 셋방에 놓았던 전화를 반납하고 전화국에서 돌려받은 설비비 25만 원으로 기기 하나를 사더니,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자, 이제는 일도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상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오디오 상점에서 하는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저 친구 일 좀 다시 하게 설득해 달라고 필자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졸지에 오디오 의사가 된 필자와 이발사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어떤 음악을 들으십니까?”
“음악이면 뭐든 다 좋아요.”
“그래도 마음이 끌리는 음악이 있을 텐데.”
“……”
“어떤 기기를 쓰십니까?”
“아무 앰프에 아무 스피커요.”
“그렇다면 지금의 시스템에서 불만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소리가 나질 않아요.”
“원하는 소리가 어떤 것인데요?” “그게 말이죠… 저는 잠 잘 때 빼놓고는 언제나 음악을 들어요. 그러다가 오디오를 사고 보니 소리가 정말 깨끗하고 또 웅장했거든요… 그런데 듣다가 보면 뭔가 없는 것 같아요. 하여튼 이건 내가 원하는 소리가 아니거든요.”

웬만한 경력의 오디오 애호가라면 그 다음의 스토리는 더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딱한 친구의 처량한 푸념일 테니 말이다. 집착, 편집증, 신경쇠약, 광기가 그가 처한 현실을 설명해 주는 단어들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오디오 초심자의 한심한 고민으로 보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소리 그 하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 오디오 애호가라면 그의 이런 모습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그대 음악이여…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고역의 직선성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저역이 이보다 더 강력했으면… 소리의 표정이 좀 더 선명했으면… 이런 생각 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오디오 애호가의 고행은 시작된다. 이 점에서는 하이엔드 시스템을 소유한 특급 마니아나 앞에서 언급한 가난한 이발사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따지고 보면 음악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한 번 시작한 이상 음악의 참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가상한 일이다. 그것이 단순한 과시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음악의 표현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열기 위한 것일 때 그렇다. 이럴 때 그가 수도 없이 저지르는 시행착오 또한 이러한 명분의 보호 아래에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으리라.

그러나 오디오 애호가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정당성을 온전히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씁쓸한 일이다. 각자의 경제 형편에 따라 여유가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있고, 경력의 차이가 있을 뿐, 오디오 애호가들이 보여 주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봇물이라도 터진 것처럼 쏟아 내는 유명 기기들, 이들 기기의 음향 특성과 개성, 그리고 기기의 조합 등에 관한 이야기로 소일하는 사람이 오디오 애호가라고 한다면 필자의 망발이 지나친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오디오 애호가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다양한 음향 철학과 기술에 따라 천차만별의 음향을 만들어 내는 기기들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개성이 뚜렷한 기기들을 통하여 재생음향의 표현 영역이 확장되어 간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전 세계의 애호가들이 이런 측면에 골몰하는 것도 그리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기기와 음향 그 자체의 감각적 측면에 지나칠 정도로 탐닉하는 모습은 정말 당연한 일일까? 그리고 이것으로 오디오 취미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을까? 혹시 이들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쯤에서 다시 가난한 이발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에게는 무엇이 문제였는가? 첫째, 자신의 상상 속에서 그리는 음악과 실제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그 자신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둘째, 기기 자체의 능력과 재생음향의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술 특성과 음악에 대한 판단 기준과 경험을 그 자신이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음악과 음향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그에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에 눈을 뜨게 된 동기, 음악과 음향에 대한 관점과 취향, 사용해 온 기기와 시스템의 등급과 내력 등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음악의 모습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오디오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향, 즉 보편적인 음향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이 자리에서 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애호가가 원하는 내면의 울림을 음향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 오디오 취미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 자신이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최종 목적지,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음향, 그리고 그 자신이 처한 현실과 단계 등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보급형, 중급형, 하이엔드 등으로 나누는 오디오의 등급은 단순히 판매 가격의 차원보다는 음향의 표현 등급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로 가격은 초 고가이면서도 음향은 중급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기가 있을 수 있고, 아주 드문 일이지만, 가격대는 중급이면서도 최고의 음향을 만들어 내는 기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오디오 애호가는 현재 자신의 시스템으로 얻을 수 없는 표현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의 시스템에게 너무 과도한 짐을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대의 음악 거울! 그 속에 비친 음악의 모습은?

그러나 음악 표현의 적합성의 관점에서 재생음향의 완성도를 판단케 해 주는 경험과 기준을 결여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재생음향의 완성도는 궁극적으로 음악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향 특성으로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음향이 음악에도 반드시 좋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는 것이 오디오의 세계이다. 예를 들어 음향의 투명도가 현재보다 더욱 높아져야 한다면, 다이내믹 레인지가 확장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특정 색채 표현을 조절해야 한다면, 그것은 음향 그 자체의 완성도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음악 표현의 완성도를 위해서인가?

이쯤에서 오디오 작업이란 음악과 음향에 대한 ‘해석 행위’라는 사실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음향이 연주의 결과물이고 연주가 작품에 대한 해석의 산물이라면, 재생음향은 그 음악, 그 연주, 그 녹음에 대한 애호가의 주체적 해석의 결과물이 된다. 따라서 동일한 시스템이 사용자마다 각기 다른 음향 특성과 인상의 재생음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니다.

특정의 재생음향이 오디오 애호가의 음악 경험과 수준을 반영하는 것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음향 상태가 좋은 공연장에서 이루어지는 훌륭한 연주와 음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재생음향의 완성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단순한 멜로디 라인과 성근 다이내믹 표현 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초보 애호가에게 악기의 질감과 다이내믹 표현 사이의 역학 관계를 납득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특정의 재생음향은 그 자체로서 음악에 대한 애호가 자신의 심미안이 투영된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음향 측면에서만 접근할 때, 재생음향이 음악의 실상에서 멀어질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자신이 진지한 오디오 애호가라면 그에게는 자신이 선호하는 음악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음악 이해의 폭을 넓히지 않고, 공연이나 음반을 통하여 다양한 연주와 음향을 경험해 보지 않고, 마지막으로 그 자신의 내면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고, 어떻게 자신의 시스템에서 영혼을 울리는 음향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경험의 축적 없이, 이 기기에서 저 기기로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는 것은 공상의 음악 세계만을 키워 가다가, 궁극적으로 그 어떤 재생음향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애호가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상상 속의 울림과 내면의 외침을 현실로 옮기기 위한 토대를 상실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음향과 음악, 그리고 상상력과 현실 사이의 조화! 가상의 음향 공간 속에서 음악의 진정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오디오 취미에서 이처럼 중요한 원칙은 없다. 이렇게 보면 오디오 기기란 애호가 내면의 울림과 음악의 영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음향 이미지로 비추어 주는 ‘음향의 거울’인 셈이다. 따라서 그 거울에 비친 음향 이미지, 그것은 음악의 이미지인 동시에 애호가 자신의 모습이 된다.

이럴 때 오디오 재생에서 주체와 객체를 엄격하게 분리해 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앞에서 언급한 가난한 이발사가 꿈꾼 공상의 세계가 현실의 토대를 잃고 있는 것처럼, 음향의 객체성을 지나칠 정도로 확정하려는 오디오 계의 현실 또한 오디오 작업이 음악과 음향에 대한 주체적 해석 행위라는 대전제를 도외시하고 있다. 음향을 잃은 벙어리 음악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음향 특성의 관점으로만 재생음향에 접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음악은 음향이라는 감각 표지 저 너머의 세계를 표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묻자. 상상 속의 그대여! 그대는 음악인가? 아니면 바로 나 자신인가?

-llhtml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