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8
현재시간, 자판에 손가락을 올려 놓으며 시선의 직각 왼쪽 방향 3미터 전방 서가의 한칸에 올려 놓은 동그란 원목 테두리 디지털시계를 일별한다. 늦은 아홉시가 780초 남았다.
방금, L사제조의 일체형 피시 모니터에서 음악을 뽑아 내 소비하고 있다.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14번…알반베르크 사중주단…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아 몇 번의 뒤적거림 끝에 겨우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 아니면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감촉해 내, 찢어진 듯 실눈처럼 가늘게 벌어져 있는 틈으로 밀어 넣으면 뭔가 깜빡이거나 생산된 시간의 경과길이에 따라 때로는 삐걱대는 소리를 내면서, 위생적으로 그리 완벽할 것 같지 않은 깔때기 엎은 모양의 노즐로부터 갈색의 액체가, 역시 깔때기를 허리 부분에서 싹둑 자른 형태의 종이컵 표면을 데우면서 채워진,… 따분하거나 잠시 과열된 뇌를 식히기 위해 오래 눌렸던 엉덩이를 조금 전에 허공으로 들어 올린 사람 앞에 장치된 ‘자판기’의 창자에서 분리된 몇 가지 재료가 섞이고 전기회로의 도움으로 데워 진 보잘것 없고 따라서 뭐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커피 한잔처럼…쉽게… 세상이 좋아진 건지, 싸구려가 된건지는 잘 모르겠다.
슈베르트가 겨우 30년을 살고 가면서,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그리 훌륭하지 못했을 고도근시 안경을 코 위에 걸고 태생적으로 하자가 많았던 육신의 핸디캪을 극복해 가면서 햇빛이나 아니면 기름적신 실타래 끝에서 겨우 몸길이 이상은 영향을 주기 못했을 호롱불 하나에 의존하거나 하면서 물리적으로 어렵사리 퍼 냈던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음악이 200년쯤 후에 거의 지구 1/3바퀴나 해 뜨는 쪽으로 떨어 진 머나먼 동쪽의 이름 모를 땅에서 초로의 사내 하나가 그 역시 그랬을 법한 방식으로 조그만 방구석 어둑한 책생 위에서 전자회로에 명령을 주는 마우스 한번 딸깍 누르는 동작으로 당시 그가 머릿속에 그렸을 법한 화음과 소리결을 너무나 쉽게 재생해 내고 소비하리란 상상을 했을까? 실제로 여기 존재치 않은 비올족 악기 네 개가 이토록 지극히 현실감있는 입체음향으로 살아나…
오후에, 실업자라기보단 이업자(離業者)에 가까운, 초보 백수가 실업급여 첫 회분 수령을 위해, 나른한 오후 어느 시간, 차례를 기다리는 노소남녀들 속에 섞여 어떤 비현실 세계 혹은 소설 속의 인물이 되어 버린듯한 생경한 느낌으로 비닐커버의 철제의자에 대충 불안하게 걸터 앉아 다리를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앞으로 여섯 번을 더 매달 이래야 한다. 약골로 태어난 데다, 청년시절 근육을 키우는 노력을 등한시한 대가에 대한 오랜 후회와 함께 한 반평생이었던 탓이지만, 노동일에 잔뼈가 굵지 못하고 뼈대 근육과 인대가 약해 몸 쓰는 일을 한다면 골병이 들 테고, 그나마 약간의 경쟁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머리 쓰는 일이란 문에는 나이라는 복병이 숨어 보초를 서고 있을 테다. 이건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느냐의 절박하고 칼날같은 문제에서 살짝 비켜 있는 안도의 내면에 엄연히 도사리고 있는 존재론적 회의에 다름 아니다. 지금의 나는 뭘까?
기름칠이 잘 먹지 않은 빡빡한 머리를 겨우 굴려 가며,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니 어느 새 시계의 분침은 지구라는 행성의 인력에 가장 확실하게 굴복한 형태의 위치에 가 있다. 인생은 음악처럼 소비과정이다. 자판기 커피 한잔 처럼, 다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말초적으로 쓴맛과 단 맛 그리고 목구멍을 넘긴 후의 피로처럼 남은 신맛을 음미해 가며, 소싯적 다방커피의 추억 혹은 떼 버릴 수 없는 각인 같은 것으로 남은 믹스커피에의 탐닉을 즐기는 수준의 보편적 인생을 살아 온 별 볼일 없는 내 자의식으로도 확실히!
문장을 두들겨 만들어 내는 일은, 대장장이의 일과 닮아 있다. 여길 두들기면 저기가 틀어진다. 숙련된 장인이 아니라면, 균형을 맞추는 일은 지난한 과업일 게다. A4 두 장 분량의 문장을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꾸려 내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한 단락을 치고 다시 읽어 보면 원고지 위에 끄적거리던 시절이 끝난 시대인 이 저녁이 내게는 행운이다. 다행인지 슬픈일인지 내 키보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버튼은 backspace이고, 아마도 짐작컨대 그 다음은 delete일 거다. 잘 못 손가락이 가서라기보단, 원고지라면 찢어 버리는 행위에 해당하는 졸렬과 그로부터 비롯된 당혹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문필가가 아니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게시판 글이란 엄폐호 속에서도 그렇다.
분침은 9시 방향의 가파른 오르막을 헉헉대면 오르고 있다. 낮에 잘 먹어 라면 반 냄비로 때운 저녁 때문인지 목구멍에 모래가 낀 듯 서걱댄다. 내가 국가의 보살핌을 받을 만큼 기여하는 삶을 살아 온 걸까? 무능력자에게 베푸는 사회의 시혜에 100퍼센트 흔쾌할 수 없는 초로의 가슴이 헛헛해 지는 밤이다. 언제나 마음먹으면 자판기 커피 뽑듯 내 방을 채울 수 있는 음악이 있어 그나마 가슴 무너지지 않는 밤이다. 곡은 바뀌었어도 아직 음악은 끝나지 않았다. 아마 남은 내 인생도 그럴 것이다. 그에 감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