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백수)일기.10

티볼리 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른다. KBS classic FM이다.

엊저녁부터 오락가락하던 가랑비로 길은 젖어 있고 바깥은 어둑하다. 조명을 켜지 않아 티볼리 라디오의 조그만 Led램프 두 개 만이 점으로 빛날 뿐인 내 오두막에선 눈을 뜨고 있어도 명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침이다. 날씨정보를 보니 기온이 4도란다. 부산 겨울 끝자락으로 치면 쌀쌀한 축이다.

책상에 앉으면, 음악소리가 왼쪽 귓등을 때린다. 때리기 보단 어루만진다고 해야 하나?!! 30세제곱미터의 내 공간을 음악소리로 채우는 데는 라디오 하나면 족하다. 위치를 잡고 결선을 한 직후에 소리를 들으면 사람의 말 소리가 어둡고 둔탁하다가 전원를 켜둔 상태로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 막이 걷힌다. 수 십 년을 경험한 현상이지만 아직도 참 재미있다.

언제부터인지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 오지 않는다. 눈이 글줄을 훑지만 생각은 딴 데로 가, 눈이 같은 행을 수차례 반복해 훑는 일이 다반사다. 글은 고인 물을 퍼 내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채우지 않으면 퍼 낼 수 없고 그릇이 작으면 채워도 곧 바닥이 드러나는 듯 하다. 아니면, 그릇이 깨지거나 금가서 새는 건 아닐까?

얼마전 그리스의 카찬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전자도서관(부산시립시민도서관 회원에 가입하면 e-Book을 공짜로 볼 수 있다)에서 다운해 읽었다. 학창시절 필독서로 추천되던, 그러나 초입에 재미없어 덮어버린 기억으로 남은 소설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술회에 가까운 저작인데, 화자인 청년의 성격이 나를 많이 닮아 있어 지금 읽으니 꽤나 감칠맛이 있는 작품임에도 다 읽어 내는데 두 주일이 걸렸다. 글을 읽어 내는 속도도 나이 드는 덴 속수무책인가보다. 예전에, 마음먹고 시작하긴 했어도 야마오카 쇼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 20권을 6일만에 그 의미까지 완벽하게 솎아내던 속독파였는데…

독서에 있어 ‘3S’라는 개념은 다들 아실 테다. Scanning, skimming, skipping!!

읽는 행위의 목적에 따라 찬찬히 읽고, 대충 살펴 보고, 필요한 부분만 읽는 기술을 잘 활용하면 훌륭한 독서생활을 꾸릴 수 있을 것인데, 문제는 체력이고 눈의 상태다. 책 읽는 자세로 치자면 몰려 오는 피로와 잠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초점이 모아진다. 왼손에 책을 드는 방식은 책자의 크기와 무게, 내 가냘픈 왼팔의 근력과 지구력에 그 성공여부가 달린 셈이니 결과야 뻔한 일이고, 그 동안 몇 개나 사 들였던 크고 작은 독서대 조차 100%의 만족을 주지 못한 가운데 시대가 바뀌어 나타난 것이 전자책이다.

현재, 내가 책을 읽는 방법과 채널은 다섯 가지다.

1. 아날로그 책을 전통적 방식으로.

2. 전자책을 크레마터치 전자책단말기로.

3. 전자책을 휴대폰으로.

4. 전자책을 아이패드로

5. 전자채을 피시로… 등인데,
전자책의경우소스를확보하는채널은인터넷서점,시민전자도서관 등인데 동일서적을 여러 채널로 공유할 수 있는 이점은 따로 부언할 필요가 없겠다.

그 중 흥미로운 건 전자책 단말기인데, 이건 내자와 작은 아이도 즉각 애호가가 돼 버릴 정도로 일상의 자투리 시간을 독서에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물건이어서. 모바일 통신단말기의 자체발광식이 아니라 조명이 필요한 전자잉크 방식이어서 눈의 피로도가 종이책과 다를 바 없고 전기도 그닥 많이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부피와 무게도 가방에 넣어 다니며 꺼내 한손으로 들고 보아 내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 거기다 와이파이로 온라인이 되기 까지 한다. 좋은 세상이다. 독서행위는, 콩나물시루의 메커니즘과 같아서 부은 물은 다 빠져나가 버리는데도 콩나물이 자라나듯 페이지를 넘겨도 나중에 별 기억이 남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의 사고와 행동패턴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책에는 내가 앞으로 겪을 고난과 고통의 선험자들이 쓴 육필과 육성으로 가득하다.

나이가 들면, 감각이 둔해 진다. 소리를 들어 내는 능력이 퇴화됨을 자각하면서 찾아 온 보상은 음악이 들리는 것이었다. 눈이 쉬 피로해지고 가까운 물체는 돋보기의 도움없인 제대로 파악하기 곤란해져 가는 요 몇 해 그 성가신 변화에 대한 보상은 한 줄을 읽어도 생각이 따라오는 점이고, 현대기술의 산물인 IT기기가 내 수정체 조절근육의 기능을 보상하고 대신해 주는 점이다.

글을 만들어(쓴다는 표현이 너무 제한적 의미가 되는 요즘이니) 나가다 보면, 상념이 꼬리를 문다. 단어 하나 문장하나가 수 많은 교합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상의 곁가지를 만들어 내고, 그러다보면 난삽해 지고 옆길로 새기도 하지만, 혼자 앉은 이 고독한 시간과 장소에서 스스로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왼쪽 귓등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음악의 노크에 더해, 주춤거리고 규칙적이지 못한 타이핑 소리와 함께 하는 아침이 커피 한잔,과일쥬스 한 컵으로 허한 속을 가까스로 달래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가?

정靜이 있으면 동動이 꼭 필요하다. 몸의 중력을 엉덩이로 받치는 것과 발바닥으로 버텨내는 일은 균형이 필요하다. 음악에 다이나믹스와 리듬의 변화가 있는 것 처럼…

여덟 시가 채 못 된 아침에 일어나 어느덧, 열 시가 넘었다. 늘 그러하듯 멀건 토마토 쥬스 한 잔이나마 감사히 삼켰으니 이제 몸을 써야겠지. 앉아 자판만 두들겨 봐야 돈이 생기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많은 곳으로부터 잊혀져 가는 중이지만, 그래도 당분간 완전히 잊히진 않을 것이다. 잊히지 않는 동안 스스로 먹고, 화장실 가고, 정신줄 놓지 않을 방책은 몸과 마음의 운동 뿐일터…며칠 손 놓았던 공놀이나 가야겠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