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1
어김없이 날이 밝았다. 참 고마운 일이다.
매일이 여생의 첫 날이고 동시에 개인적 혹은 천문학적으로 내일이 또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으니,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그나마 주어진 시간에 충실해야 하겠다.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에 보면 3년단위 학습기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 일생에 입에 풀칠 하기 위한 노동을 빼고 뭔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말 그대로 제대로 해 내 본 기억이 없다. 내가 끈기를 타고 나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크지만, 스스로 게으른 천성이라 치부하고 싶지는 않으니 운이
따라 주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오늘 아침까지는 다행히, 하루를 채워 나갈
방법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는 않으나 머지않은 장래에 갑작스런 권태와
무위도식에 따른 허무감이 나를 덮칠 지도 모른다.
엊저녁 텔레비전의 어느 프로그램에서 40년 산중 생활하는 분의 고백 같은
대화가 귀를 후벼 팠다. ‘뭐라도 하고 있지 않았으면, 그 세월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가 이겨내야 했던 세월은 아마도 뼛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 고독과의
싸움 과정이 아니었을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부지기수다. 수 많은 방법을 동원해야 흘려 보낼 수
있는 게 시간이라면, 뭘 하기에라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충분한 것도 시간일 거다.
뭘 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의 지향점은 편의상 이기적인 행위와 이타적인 행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지. 물론 균형을 전제로. 4:6 아니면 3:7 이냐는 좀 있다
등장할 차례다. 살며, 타인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내 몸으로 땀 흘려 가면 타인과 공동체에 기여 해 본 바는
별로 없다. 채워야 퍼 낼 수 있다면, 지금은 채울 때인가 퍼 낼 때 인가?
내 삶이 축사에 갇혀 사료를 우물거리고 있는 가축들의 그 것과 구별되는 경계선은 무엇일까?
평생 동안 고민만 하다 말 것인가? 뛰어들다 다치는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섣부르나마 다이빙이 먼저인가? 질문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며, 올바른 답은 제대로 된 질문으로 이미 결정 나 있을 것이다.
무심한 하루가, 소극적, 수동적이며 구속적 무위 속에서 잦아 들고 있다.
돌파구는 채우는 데 있을 수도 비우는 데 있을 수도 있다. 허기져 밥 한 술
입에 넣어 씹으면서 느끼는 감칠 맛과 이윽고 찾아 올 포만감도 인생에 중요한
부분이지만, 비록 간단한 병렬회로 속의 네트워크 구성요소일지라도외부와의
연결속에서내존재가치를찾는일이필요하지않을까? 암중모색의 시간이다.
살며 치명적으로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어느 분야에도
전문가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환경을 탓 했고, 여건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어릴 적 한국 사회가 내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극히 좁은 꿈의 스펙트럼
속에서 건져 낸 몇 몇 환상조차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출발점에서의
프레임 속 혹은 조직 속에서의 경쟁이라는 게임에 매몰 돼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져 버리고,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일상은 관성으로 굳어져
짐진 어깨는 살이 몇 부러져 제대로 펴지지 않은 우산처럼 축 늘어 졌다.
인생의 전반은 그렇게 흘러 가 버렸다. 60년이…
어쩔 수 없이 백수가 된 건 어쩌면 축복일 지 모른다. ‘뭐라도 하고 있지 않았으면,
그 세월을 이겨낼 수 없었다’던 그 산중 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남은 시간 뭐라도 하고 있어야 할 테고, 기왕이면 전문가가 돼 보는 것이 어떨까?
돈 벌기 위해 아침에 구두끈을 매야 하고, 어두워서야 겨우 몸을 뉠 수 있는
상황에 벗어 난 것이 의지 박약하고 왜소무력한 나 같은 사람에게 늦게나마
주어진 구차했던 인생의 보상이 아닐까?
공부를 하고 훈련을 하자면, 돋보기를 끼어도 곧 침침해 오는 눈과 한 시간
앉기에도 고통이 수반되는 고물 몸뚱이가 문제다. 사람마다 타고 난 병목이 있어
기계가 노후화되다 보면 여기 저기 트래픽의 과부하가 걸리는 데 나라고
예외가 아니다. 또래들과 비교해 그나마 고쳐 쓸 수 있는 여지가 적다 생각은
안들지라도 기타를 만지는 기간이 길어 지고 연주기법의 난도가 높아 질수록
왼손은 늘 경고를 보내고 있고, 사지의 근육량은 줄어 드는데 배는 나오고,
운동을 하면 근육통과 벗하지 않을 수 없어 겁이 난다.
삶은 음악 한 곡처럼 과정이란 생각으로 산다. 기승전결의 구조 아래,
아름다움이 있지만 불협화음도 끼어야 맛이 있고… 관현악단의 총주로
막을 내리는 악곡처럼 큰 삶을 사는 이도 있지만, 어느 순간 불현듯 소멸해
끝나 버리는 작품과 같이 내 삶은 그리 조용히 막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치열하게 뭔가를 찾고 골몰하다 보면, 도가 트는 분야가
있을 테고, 시간을 잊게 하는 화두가 나타날 것이고, 육신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선약을 구하게 될 것이다.
질문은 이 것이다.
‘내일 아침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기꺼이 깨어나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