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2
내자는, 예나 지금이나 별 변한 게 없는 썩 적극적이지 못한 그 성격 탓이거나
아니면 손
잡은 지 3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능력 안 되는 남자 만난
불운 탓으로, 그나마 순전히 본인의 착한 성품 하나로 일군 몇 되지
않는 모임 중 하나에 소집되어, 점심약속일 것 임에도 열 한시를
갓 넘기자마자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래서 집구석은
음악소리 뿐이다.
모처럼 호젓이 앉아 먹 갈고 화선지 펴 우선 천자문부터 몇 자 그리다 보니
점심시간이다. ‘먹기와
살기’중 어느 쪽을 수단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고색창연하고 진부한 주제를 굳이 들먹일 것도 없이, 냉동실에서
동면 중인 만두 몇 개를 넣고 끓여 낸 라면 한 냄비는 내게 식도락과
포만감, 그리고 당분간의 활동 에너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 낼 것이다.
한
열흘만에 처음 먹는 맛 있는 인스턴트 요리다.
라면에 관한 기억은, 1968년으로 소급한다. 물론
그 이전에 우리 곁에
스며 들어 온 음식이지만 적어도 당시 우리 가족의 경제적 수준으로
볼 때는 녹록히 가까이 할 물건이 아니어서 포장된 봉지조차
만져보지
못해 본 기이한 먹거리였었는데, 가까스로 열 다섯이 되던 해 친한
친구의 집에 초대 받아 가서야
내 미각에 뭔가 흔적을 남겼고
그 강렬했던 기억은 그로부터 45년이 속절없이 흘러 가버린 오늘
점심
때에도 크게 변하지 않고 봉지를 뜯게 만들고 말았다.
당시, 친구는 시골 출신으로 산동네인 우리 집에서 야트막한
언덕 하나 넘어 사시던 나이차이가 꽤 나고
그 때 이미 결혼하신 지
제법 된 누님 댁에 유학을 왔었는데-중학교도 입시가 있던 시절이니까-
동생이 다닌 학교가 그래도 경남지역 일원에서는 목에 힘 좀 줘도
동네 사람들에게 별 손가락질 당할 곳이 아닌지라
자형 되는 분도
내가 가면 반가이 맞아 주시곤 했었다. 부모님의 엄격한 외출 통제로
인해 친구 집 방문은
정례적으로 이루어 졌는데, 일요일 오후
그 친구네 집이 내게는 해방구이자 행복구여서 달리 일상을 즐길
거리가 없던 철부지 청소년이던 나는 일요일 기다리는 낙에서
유일하게 한 주일의 의미를 찾던 시절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일요일 집에서 먹던
대개는 영양적으로 부실한 점심의
양을 의도적으로 좀 줄여
뱃속을 비운 후 바람처럼 달려 도착한 친구 집의 커다란 벽시계는
거의 예외없이 세시 경을 가리키곤 했었는데, 꽤 돈을 잘 버는
친구 자형 덕에 그 누님 댁에는 당시 첨단 기술의 상징이자
선망의 대상이던 전화와 텔레비전이
그 산동네 전체의 유일
무이한 문명의 이기로서 위용을 뽐냈고, 따라서 아직 오늘 날처럼
삭막해 진 아파트
촌의 시대에는 감히 상상 불능인 이웃간의 인정이
미만하던 세상이라 당연히 그 전기로 작동되는 기물은 온 동네
사람들의 공익물로 활약하고 있었는데-참고로 우리 집에 그 물건들이
들어 온 시기는 그로부터 10년을 훌쩍
넘기는데- 이에 더하여 나를
핵심적으로 유혹한 것이 있었으니, 저녁
여덟 시 직전
친구와 겸상으로 끓여 내 주시던 라면 그릇이 아니었다면 그 친구와의
정례적 회동도 그리 오래 지속되진 못하였으리라!
주택이 옛날식이어서, 안방에서 문을 통해 대청마루로 나오는
구조로 예의 텔레비전은 안방과
마루를 구획 짓는 장지문의
안쪽 건너편 벽에 붙어 놓여 있었고 상영시간이 되면, 대청마루로
옮겨졌고 따라서 열 평 남짓 되는 마당에 놓여 있던 커다란 평상에 걸터앉으면
화면이 약간
상향으로 직통 시야에 들어 오는 포맷으로 돼 있었는데,
흑백 브라운관의 특성상 대낮에 반사로 인한 화질 저하의 문제가 있었지만,
주인장의
지성이 이를 간과했다기 보단 일요일 저녁 일곱 시 반이 되면
인근 동네 사람들이 이른 저녁식사들을 마치고 서둘러 여덟 시부터
시작 되는 문화방송의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그 집 마당으로
몰려 드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배치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은 한참 후 나이가 들어서 깨닫게 된 진실이었다.
비록 마당 혹은 대청마루에서 시청하는 십여 명의 무료 관객들에게
화면을 가리지 않도록 안방의 한쪽 구석에 비켜 앉아도 오늘 날
예술의
전당 로열석에 절대 꿀리지 않을 자부심과 우월감이
미각을 마구 자극하는 하늘이 내린 진미인 고기맛 라면국물과
결합돼 환상의 조합을 이루었고, 삶이란 이러해야 한다는
막연한 동경은,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어 텔레비전을
사야 겠다는 별로 스케일 크지 못한 결심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도록 했으나, 그
작심은 채 이틀을 못 갔고 매주 일요일 마다
그 다짐은 재구성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겨우 목구멍이
풀칠하는
삶을 살게 된 건 순전히 타고 난 내 품성 탓이니 누굴 탓하랴.
요절복통이나 포복절도란 말 공히 우리 몸 중간에 있는 신체부위를
포함하는 말인데, 웃다보면
배가 당기는 이유로 해서일 테지만,
구봉서, 배삼룡 등 시대를
풍미하던 코미디언들의 꽁트에 코를
박으면 라면 가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였고,
빨간 고추기름이 동동 뜨는 삼양라면 냄비에
코를 박다 보면 배삼룡 자빠져도 구봉서가 미끌어 져도 상관없긴
마찬가지…하지만, 친구와 겸상을 하고 앉은 동안, 그 날 그 집
전체가 그려내던 풍경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어떤 순간적 장면의
한 화소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할 만큼 내가 나이가 들었거나
주변인식 가능한 자각역량에 이르지 못했기에 즐거웠고,우리
집에서 맛보거나
즐길 수 없단 사실이 슬프기보단 다음 일요일을
목 빼고 기다려야 하는 사실이 아쉬웠을 뿐, 나는 그
때 너무 어렸으니까…
라면은,
그렇게 내 삶에 스며들어 와, 2013년 삼월 어느 따사롭게 햇볕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점심때, 허기진 내 밥통을 오 분이
채 못된 시간에 후딱 채우고 냄비에서 비워졌다. 동물성기름에서
식물성 기름으로 성분이 바뀌고, 포장이 세련되었으며, 전체적으로
품질이 개선됐다는 이유와 요즘의 일본처럼 드문 예외가 있긴 하지만
세월은 늘 인플레이션과 함께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특성으로
68년의 가격 대비 수십 배로 올랐지만, 약간의
열에너지와
내 수고를 더한 천원 짜리 한끼 식사가 거의 반세기나 빛 바랜
옛 기억을 다시 불러 내고, 드물지는
않더라도 이 정도의 포만감을
제공해 주는 걸 보면 우리가 라면을 애호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하겠다.
점심도 해결했으니, 음악 한 곡 틀어 놓고 책이나 읽어야겠다.
오늘은 오란 데도 없을 뿐 아니라 딱히 갈 곳도 없으니, 그야말로
유유자적이다. 중국의 석학 린위탕(임어당)이 그의 명저 ‘생활의 발견’에서
‘사람은 적당히 빈둥거릴 줄도 알아야 된다’ 라고 갈파한
대로 오늘
오후는 ‘빈둥’이나 거려볼까. 엊그제, 본래 목적이 아니라 덕원 아우
만나러 들렀던 오디오 가게서
기어이 방안간과 참새의 도식적 관계에
포획돼 잘라 온 스퍼커 케이블-각 5.5미터-은 한 사흘 지나니 소리가
썩 깨끗해 진 것 같단 느낌이
드는데 아직도 소리에 연연하는
이 부평초 같은 내 마음은 언제가 돼야 흔들리지 않을까? 문고본
전자책이 100권 딸린 크레마터지 전자책리더를 내자용으로
어제 들였는데, 쓱
훑어보니 ‘커피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다.
카페인 땜에 요즘 거의 입에 대지 않는 기호품이지만, 열아홉에 처음
혀에 댄 그 쌉싸름하면서 고소한 맛과 향은 100권이나 되는 도서
목록 속에서 내 눈을 맨 먼저 이끌
정도로 강렬한 유혹인데 목구멍으로
넘길 형편이 아니면 눈으로 보고서 상상으로나마 즐겨보자.
지금 이 순간 콘크리트 더미에 갇혀 형상도 맛도 없는
전자네트워크의 끈을 붙잡고 세상과 조우하고 있지만, 내 영혼은 자유다.
내가 가진 건 시간뿐이지만, 세상 모든 행복은 시간이라는 코인으로
빼 낼 수 있는 vending
machine안에 있으니 무엇이 부러울까!
세상 일은 전문적 판단과 상식적 판단의 선택지의
결과다.
精而博, 精而不博,
博而不精?…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느끼는 오후를 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