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3
여덟 시가 채 못 돼 눈을 뜨니 거실 창 밖이 희끄무레하기에
흐린 가보다 했는데, 아침 신문을 본다고 잠시 서재에 들어
와 있는 동안에 바깥이 아주 캄캄해 졌다. 어제 눈부시던 초봄
햇살과 벗하며 쉬기 반 걷기 반으로 태종대 갈맷길을 서너 시간
노닐었던 뒤끝이 약간의 피로로
몸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카페인을 제거한 커피 한잔과 약간의 기지개면 다시 가뿐한
하루를 보낼 수
있으리라. 이만한 복이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남항 앞 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혹은 나가고 혹은 들어오며,
자리에서
섬처럼 암초처럼 검은 실루엣으로 붙박이가 되거나
하는 크고 작은 배들이, 거의 시야 전부를 좌우로 가득
채우는
광활한 은빛 물결 속에서 인간이 그림으로는 그려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정경의 점묘화가 되어 나를 경탄케 했다. 미풍은
엊그제 까지 품었을 그 칼날깥은 한기를 이미 잃었고, 바다는
옥 빛으로 온 세상을 다 담고 있는데, 양지 바른 곳에 터를 잡은
목련은 이미 꽃 망울을 터뜨리는 가운데
온기가 아직은 모자라
터질 듯한 몽우리를 가지가 힘겹게 이고 지며 버티고 있는
나무에게도 아마 내일 모레쯤 차례가 오지 않을까.이윽고,
오랜 기다림으로 목마른 내 가슴에도 정녕 봄이 오는가.
인생의 봄은 이미 지나 가 버리지 않았을까? 이 시간 내 오두막에도
티볼리 라디오의 봄소식이 가득하다.
눈부신 햇살과 짭짤한 해풍 속을 걷다 보니 대충 때운 아침의
부실함으로 이른 허기가 찾아 와 간이 매점에서 내자와
함께
먹은 컵라면 하나가 이 아침 다시 그립고, 예전 ‘자살바위’라고
회자되던 절벽-이 수직벽 위에서 영원으로 뛰어 내린 혼령들을
기억한다- 위에 축조된 전망대 캐피티어리어에서 두 접시에
이만원을 지불하면서 쓴 입맛을 다셨던 맛 없는
‘비후까스’일 망정
다시 기억하는 이 순간 군침을 돌게 하는
건 지금이 비단
식전이어서 그런 것 만은 아니지 않을까.
평일이라 우리 두 사람 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기우에 불과하였는데, 젊고 늙고를 떠나 백수가 아니면
뭐라 달리 짐작키 어려운 꽤 많은 수의 나들이 객이 홀로이거나
커플이거나 아니면
떼로 찾아 와 걷기도 하고 노란색 바탕에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칠해 동심을 자극하는 순환열차를 타기도
하면서 화색이 만면한 걸 보니 총부리를 들이
대고 있는 저기
북쪽 망나니들 생각에 내심 불안한 건 나 만의 소심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항 쪽 기슭을 돌아 나오면, 건너 편 송도의 풍광이 펼쳐 지는데,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니 내가 사는 이 시대 이 지역의 모습,
내가
만들어 가는 내 세상의 그림이 참 복잡하기도 하다. 대개
육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습관적으로 대상을
뭉뚱거려 보게 된다.
디테일에 대한 정보 보다는 큰 그림의 국면 전체를 눈에 받아 들여
그 특징을 기억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진기의 좁은 구멍으로
피사면을 대하게 되면 세밀한 부분 부분을 들여다 보게
된다. 일러,
피사계 심도가 높아진다고 하던가.
카메라를 들고 우리 강산의 많은 장면을 정지화면에 붙잡아 왔지만,
거의
언제나 나를 안타깝게 하는 현상은 어제 태종대 입구에서도
마주친 ‘전봇대와 간판’이다. 아주 인간의 흔적이 드문 오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 강토에서
이를 피할 길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이쑤시개
다발처럼, 아니면
고슴도치 가시처럼 도시 농촌 가릴 것 없이 찔러
놓은 이 놈의 전봇대-무생물이니 욕 먹어도 대 놓고
반박이야 않겠지만-
때문에 도무지 광각렌즈 한 컷 안에 이 물건들을 들여 놓지 않을 방법이
없다. 간판은 또 어떤가. 간판이란 물건의 본래 목적 상 사람들의 눈에
잘 띄어야 한다는 특성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주변 배경과 너무나
조화되지 않는 생뚱맞은 색상과 형태, 크기
등을 무슨 전위적 예술쯤으로
이해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울화통이 치밀 뿐…
우리는 왜!, 먹고 사는 문제를 꽤 훌륭히 해결한 지금 조차도,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걸까. 스스로를 치장하는
데는
큰 비용과 비록 예리한 칼끝이라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아침에 눈 뜨면 부닥치는 세상이란 그림을 낙서와 쓰레기 속에
방치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위도상 별로 다양한 색깔로 변화할 게
없어 구비 돌면 거기가 거기고 강이나 개천 한 줄기
건너 봤자 요만
고만한 풍경이지만 그래도 교외에 나가면 내면의 때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을까 해서 맘 먹고 나서게 되는 이 좁아터진 국토가
한
발짝 건너 한 개씩 시멘트 침에 꽂혀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신음하고 있고, 싸구려 간판으로 뒤
덮혀 어디 한 구석 눈 돌릴 곳이 없는
도심의 현실이 안쓰럽고 안타까운 건 나만의 과민반응인가? 먹고
사는 게
어디냐고, 배 부른 소리라고만 치부해야 할까. 물론, 전깃줄을 지중화해서
집어 넣는 데는 돈이 들겠지. 할 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 물론 나도, 현상에 탄식하는
거지 누굴 탓할 처지가 아니다.
직접세는 현재론 한 푼도 안 내는 백수 주제에..
늘 지나다니는 길에 눈에 들어 오는 영도 섬. 언제나 안개 혹은 구름이거나
아니면 도심의 연무에 희끄무레하게 시야에 들어 오는 봉래산 꼭대기의
모습을 접할 때면 홍콩섬 생각이 난다. 원시림이
밀생한 무인도라면
숲 남길 것 남기고 나머지를 확 갈아 엎어버려 멋진 곳으로 만들고
싶지만 바닷가 돌무더기 위에 올라 붙은 따개비 처럼 어디 손가락
하나
비집고 들어 갈 자리가 남아 있지 않은 저 삶의 현장을 어떻게 갈아 엎을 수
있을까. 아마 내
생애, 내 마음으로 그리는 아름다운 영도 섬은 볼 수
없을 테다. 태종대는
그나마 영도 섬의 마지막 남아 있는 자존심이다.
사람이 자주 머무는 몇 곳, 다듬어지지 않은 상업 시설물과 자연친화적이지
못한 조경시설들을 정비하면 될 법하지만, 우리네 공무원들을 유학을
보내야 하나 아니면 동해안 영해 내에서 거대유전이 발견되기를 기다려야 하나.
그냥 소일이 아니라 삶을 위한 충전의 시간을 보내는 환경으로서,
자연만큼
소중한 공간은 없다. 내 집이 초라하더라도 바깥이 멋진
자연이라면 뭘 더 바랄 것이 없고, 인티어리어가 아무리 화려하다고
한들 집 주변이 허섭쓰레기라면 무슨 소용일까.
서 있는 곳에서
사방을 둘러 어디 사진 한 장 찍을 곳이 없는 강산을 후손에게
물려 줘선 안될 텐데.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면 양손 엄지 검지로 사각 틀을 만들어 들여다
보기만 하여도 그게 곧 명화가 되는 우리
산하를 만들 수 없지 않을 텐데,
왜 우리는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까. 태종대의 하늘과 물 빛,
벌어진 목련꽃, 수평선 너머의 온기 그 봄의 기별에 함께 실려 와
내 비어버린 가슴을 채우던 바닷바람과 눈부시다 못해 아찔한
현기증처럼 쏟아 지던 햇볕과 함께 한 네 시간을 위안으로 삼고
희망을 가진다. 밀리고 쫓기나마 고 만큼
남은 것만 해도 아직은 늦지 않았다.
바다를 앞에 하면, 인간은 점이고,
먼지이다가 이윽고 아무 것도 아니다.
하물며 하늘 앞에서랴. 하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없으면 하늘도 없다.
태종대 자갈마당의 몽돌처럼
파도 앞에서도 당당한 삶을 살아 내자.
지금은 어둡지만, 어제
태종대를 비추던 햇살은 아직도 내게 환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