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4
새벽 세 시에 잠자리에 들어 눈 뜨니 열 시다.
아침, 일어 날 제 시간이란 구속에서 벗어 난 지 두어 달 지나고
보니
이제 요일도 시간도 예전의 촘촘한 멸치잡이용 그물망에서 축구 골대에
걸쳐 진 망처럼 큰 구멍이 숭숭나 엉성하기만 하다. 하루 해가 설핏해 질 무렵
어쩌다 꼬르륵 거리는 허기와 함께 문득 느끼게 되는 시간의 속도가 내게
전율을 일으킨다. 잔챙이 시간이 시냇물 흐르듯 조잘거리며 지나 가는 게
아니라 여름 장맛비에 산사태가 나듯 큼지막한 뭉텅이로
토막 토막 세월이
잘려 나가고 있다.
세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 데는 이유가 있다. 나흘에 걸쳐, 무슨 이유에선지
알 수 없는 충동으로 종영된 드라마 총 50회를
티비다시보기로 해 치웠다.
약 53시간을 들여서…잠을 줄여가며…드라마폐인이라더니, 내가
그 꼴이
될 줄 몰랐다. 60년대, 겨우 말귀를 알아 먹을
정도의 유년기부터 석기시대
수준의 유선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던 라디오드라마가 컬러의 고해상도
동영상으로 내 곁에 다가 오기까지 50년이 흘렀지만, 나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방송드라마다. 술 마시며 놀기, 소득 없는 오락잡기로 밤을 새 본 적이
있지만
기억 속에 연속극을 새벽 세시까지 본 적은 내 코로 숨쉰 후 처음이다.
얼마 전 종영된 그 극은, 고통스런 가족관계의 치유 이야기였는데 첫 회를
시작할 때는 미처 그 중독성을 예견치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내 가슴의 공동을 다른 이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로 채울 수
있기를 바라서는 아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봉합해 버렸던 지난 날의 내상이 스멀스멀 둔통처럼 몸 밖으로 기어 나와,
의지에 관계없이 화면 속으로 나를 떠 밀고 있었다.
눈 떠 일어 난 시간, 바깥은 화창하다. 눈 아래 마당엔 아마도 엊그제 밤
가는 겨울이 못내 아쉬운 듯 서글피 내린 찬비에 그나마 용기를 얻어
벚나무가
곱게 단장을 했다. 벌써 9년 째 보는 이른 봄 풍경이지만,
눈꼽조차 채 못 뗀 초로의 아침 눈꺼풀에는 꽃의 혈색만큼이나 애잔한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또 봄이 왔다. 며칠 전 뒷산에 오를 때 숨이 턱에 차
발끝만 보며
한참을 걷다가 이윽고 능선에 올라 서자 내 눈에 들어 온
노란 개나리가 갑작스레 봄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이
아침 유리창호
건너편에서 평면적으로 내 눈에 들어 온 벚꽃이 또 다른 봄을 예고하고 있다.
그 드라마에는 ‘진안’이란
곳이 자주 등장한다. 익숙치 않으나 언젠가
한 번은 뇌리에 흔적을 남겨 무의식으로 친근한 느낌이 들어
내자에게
말을 건네니 ‘마이산’이 있는 동네란다. 연전에 그 봉우리들만 먼 빛으로
훑고 지나친 적이 있었지. 담 주엔
늘 있는 짬을 내어 가 볼 참이다.
드라마 촬영의 현장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오래 전 내자와 한 약속을
드라마가 일깨워서이다. 변산 반도를 가면서, 시간이 없었다기 보단 당초
목적지 도착중심의 초보 여행자의 소심함에 옆 길로 새는 방법을 몰라서였지만
후일을
기약했던 기억이 어슴프레하다.
요즘 전자책으로 ‘술탄과 황제’란
걸 읽고 있다. 1453년 5월 29일 함락돼 역사의
한 장으로 마감되어 버린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황제와 함락자 오스만터키
술탄의 이야기다. 전반부를 거의 끝내 가는데, 그 속에는 천수를 누리지
못한 수 많은 죽음이 있다. 포위한 다수의
무리와 덫에 갇힌 소수의 처절한
살륙, 침대가 아닌 곳에서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강 건너 불구경’이란 우리 말은 참 감칠 맛이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 내고 절묘하게 잘 구성된 경구이다. 이스탄불에 가 보고 싶다.
4월 중순에 열흘쯤의 예정으로 유럽을 간다. 스치듯 지나 갈 네
나라는
모두 옛 로마제국의 후예들이다. 일본사람 ‘시오노
나나미’가 20년을
물고 흔든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돌을 밀가루 반죽처럼 가지고 놀았던
그네들의 속살까지 볼 수야 없겠지만, 사물에
밴 향수냄새에 섞여 희미하게나마
풍겨올 살 냄새는 맡을 수 있지 않을까.
벌써 저녁 아홉 시가 넘어 서재 창으로 보이는 바깥은 방의 불 빛이 반영되는
부분 외에 검다. 종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시간 보내는 날이 일상화된 요즘이지만,
그래도
33년 만에 묵은 말뚝에다 붙들어 매는 데 성공한 남정네와 함께하는
이 삶이 내자는 좋은가 보다. 점심을 해결하고 군데 군데 비어버린 냉장고도
채워 놓을 겸 들린 마트에는 어린 아이를 업고 안은 새댁 몇 외에
별 사람이
없고 거의 남자는 나 혼자다. 평일 마트를 배회할 수 있는 사람은 백수이거나
특수 직업이거나..
두 달 여 기른 수염은 몇 번 벌초를 했어도 덥수룩하니 제법 인상을 바꾸고
있는데, 모습이 바뀐 만큼, 세상과의 인연도 많이 바뀌었다. 모자 하나
눌러 쓰고 청바지에 사파리 점퍼를 걸치는 변신술을 부리면 그 번잡하고
구면을 만날 확률 높은 서면
거리에서도 나는 완전히 이방인이다. 90년도에
호주연수를 마치고 귀국길에 일본 동경 시내에서, 배낭 이란 구속 외에는
완벽히 아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채 일주일을 떠 돈 기억이 있다. 거의
완전한 자유는 절대 고독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깨달은 며칠이었는데,
그
때가 혼자였어도 두렵지 않고, 호기심 가득한 청년, 서른
일곱였었지.
번지점프에서의 추락은
진정한 추락이 아니라고 하던가. 두렵기는 하지만
지금의 내 추락은 번지점프다.
고요한 가운데, 문 하나 사이를 두고 느릿한 그리고 기어 드는 듯한
기타 소리가 들려 온다. 늦게 배우는 도둑질이고 취미를 함께 하자는
오랜 고민 끝의 값진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의 설익은 솜씨다.
그녀는 함께 늙어야 할 내 여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