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5
전에 있던 게 오래 돼 턴테이블 커버를 아크릴로 새로 만들어 덮어 놓으니,
지문 묻어 뿌옇던 안경 잘 닦아 다시 쓴 것처럼 맑고 투명한 모습이 보기 좋다.
자꾸 체중이 늘어 몸이 불으니 무겁다. 172센티의 키에 뼈대가 굵지 못해
생애를 통틀어 70킬로그램을 넘어 본 적이 없고, 몸이 가뿐하고 컨디션이
비교적 양호한 적정체중이 65-6정도인 내가 벌써 달포 전 66을 넘어서더니
최근 일주일 째 체중계의 숫자가 68을 넘고 있다. 체중계가 고장 난 건 아닐까.
아침에 씻으면서, 노안으로 가까운 물체에 대한 시야가 신통치 못해 대충
건성으로 훑어 내리던 거울 속 익숙한 얼굴을 돋보기를 끼고 들여다 보니
꽤 살집이 붙어, 볼이 푹 들어 가 있던 시절보단 풍채가 나아지긴 했는데,
자글자글한 잔 주름이야 어디로 숨을 곳이 있으랴. 뒷 산 오르는 데 소용될 만한
작은 배낭 하나 정도의 쓸데없는 무게를 늘 짊어 지고 다니게 된 원인은 과식일 테다.
저녁마다 입이 궁금해 손이 가게 되는 과자 나부랭이, 설탕을 넣은 디카페인 커피,
별로 시장기가 느껴지지도 않는데 억지로라도 끼니 채우는 습관을 어쩌지 못한 식사,
사람을 만나면 겨운 흥에 대책 없이 입으로 쑤셔 넣게 되는 음식들 거기다 머리도
몸도 전보다 적게 쓰는 내 무위의 삶이 원흉이다. 먹을 걸 걱정하게 되지 않게 된,
주린 뱃속을 채우기 보단 입에 붙는 음식을 잠재적으로나마 선호하게 된 때는
정확히 1972년 11월 내 손으로 돈을 벌게 된 때부터다. 타고 난 성품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니는 식도락과는 거리가 멀고 지금도 식탐이나 기아에 대한 본능적
불안감 따위가 상존尙存할 리는 없으나 적어도 먹거리가 내 일상의 고민인
상황에서 탈출한 그 때 이래 40년을 각성 없이 살아 오다 이제야 먹는 걸 줄여야
할 때가 온 것을 깨달아 가슴이 서늘하다. 먹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살리고 늙고
병들게 하고 죽게 할 수 있다.
걷기가 일상이 된 여느 날처럼 어제 토요일에도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일대를
4시간걸었다. 일곱 시에 일어나 내자와 함께 한참 분주히 집안을 횡행한 끝에
갑작스런 진안행을 결행한 시각이 아홉 시. 녹은 아이스크림의 온도에
탄산음료의 삽상한 자극성이 가미된 눈부신 세상이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린다.
분석해 볼 필요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드라마‘내딸 서영이’에 나오는,
거의 끝 무렵 서영이 아버지(배우 천호진 분)가 죽은 아내를 추억하며 걷던
진안의 모래재길(내 차의 내비게이션에는 드라이브코스로 등재 돼 있었다)
장면이 왜 내 가슴에 흔적을 길게 남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극중 인물이
내 또래여서, 아니면 나도 딸을 가진 아버지라서? 이유야 어떻든 내자와 의기
투합했고 갔다 오는데 하루면 족하고 봄볕은 집구석에서 졸고 앉아 있는 게
죄악이라고 질타하고 있질 않은가.
현장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때로 사람들에게 혼란과 좌절을 안긴다.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시력의 우열에 불구하고 광각적 평면적이며
피상적이고 가변적이다. 짐작은 했었지만 내가 밟은 모래재 길은 드라마 화면 속의
그 곳은 아니었다. 고성능의 망원렌즈로 당겨 촬영한 화면에는 인간의 눈에
필연적으로 잡힐 수 밖에 없는 주변 사물의 번잡함이 제거된다. 육안에 잡힌
거의 180도에 육박하는 광각의 현실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고 카메라와 사람의
기획이 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지만 사기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모래재가 단독의 대안 없는 목적지였다면, 어제의 내 여행은 거의 전 구간
회색의 시멘트가 주는 건조함과 고속으로 회전하는 타이어의 마찰 소음으로
구성된 왕복 440킬로미터의 드라이브였거나, 마이산 입구에서 시장기를
훌륭히 해결해 주었던 산채비빔밥 한 그릇에 대한 괜찮은 기억으로 마감되었을
테다. 그러나, 일상사엔 때로 반전의 묘미가 있어 인생은 살 맛이 나는 게 아닐까.
진안에는 나를 유혹한 그림 속의 모래재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도중에 아직도
가동중인 정미소가 오랜 슬픔 같은 걸 머금고 있었고, 전라도 특유의 붉은
황토가 있으며, 마이산과 탑사가 있다. 사물은 보려는 자에게만 보인다.
진입로 늘어선, 우리 삶에선 어쩔 수 없는 현란한 상업적 광고 혹은 시설물과
소란함을 그러려니하는 약간의 체념과 함께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짧은 시간
걸어 들어 가면 멋진 그림이 펼쳐진다. 화사하기 그지없는 햇빛은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아스팔트 도로 위에 수묵을 흩뿌리듯 쏟아 붓고 있고 아직 피지
못한 벚나무 열주들은 때 이른 아지랑이 속에서 버들이 되어 춤춘다.
둑이 하나 있어, 너머에 산 기슭의 개활지가 이어질 것으로 짐작하고
올랐더니 불현듯 직경이 약 300미터 쯤되는 호수가 나타났다.
마이산 일대의 주봉과 종봉들이 상하 대칭으로 비친 모습이 가히 선경이다.
슈베르트의 가곡이 울려 퍼지는 서재에 음악이 있어 좋다. 그것도 물로 닦은
검은 색 음구를 콩크라풍크트로 긁는 아날로그의 음색이 좋다. 카트리지가
중심을 향하여 부드럽고 재빠르게 미끄러진다. 엘피 한 면이 순식간이다.
우리네 세상에서는 사람이 몰리는 곳에 눈을 어지럽히는 물건들이 없어선
안되나 보다. 탑사는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 자락에 그림 같은 둥지를
틀고 있고 쌓은 돌탑 하나 하나에 인간의지가 담겨 있어 경탄을 금치
못할 곳이지만, 마당 건너 국적불명 조화부재의 식당과 기념품 가게 건물들과
대척점에서 갈등하고 있다. 부처님은 용서하시겠지. 연화는 진흙탕 속에서
피는 꽃이지 않은가. 난삽한 건 빼고 볼 것만 보자. 우리가 가진 것이 이럴진대
탄식만 하고 앉아 있을 순 없지 않나. 그나마 이 정도라도 가진 걸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440장, 기관총처럼 난사한 반나절 셧터 누르기가 오후 4시쯤 끝났다.
이건 순전히 내 역사기록이니 몇 장을 건지냐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많은 수의 그림파일들이 휴지통에 버려지고, 많는 정보들이 어울리지 않는
요소라 여겨져 잘려 나갈 것이지만, 그럴듯한 사진 한 장의 테두리 밖 보이지
않는 영역의 삶의 현장은 내 기억속에 각인되고 살아 남은 사진이 모니터를
채울 때 마다 링크되어 되살아 나겠지.
드라마에 자극 받아 찾은 진안은 토요일 하루의 시간과 환상을 소비해 버렸지만,
아름다움은 난마처럼 얽힌 생활의 현장에 여기 저기 숨어 있다는 걸 깨달은
곳이다. 삶은 언제나 극보다 더 극적이다.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는 아직
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 탄 술처럼 네 맛도 내 맛도 없는 내 일상에
오똑 솟은 마이산 봉우리처럼 방점을 찍을 세월만 남았다. 몸 속엔 아직도
전율을 만들어 낼 호르몬이 부족하진 않을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