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8
내 오디오파일로서의 역정은 산을 오르고 내림과 닮아 있다.
산행의 초입, 기슭을 오르자면 호흡이 가빠오고.
배어 나오는 땀과 거친 호흡으로 얼마간 힘든 시간을 보내면
이윽고 숨결이 터지며 한결 편안해 지는 순간이 온다. 일러,
사점(死點:Dead Point)이라는 첫 고비를 넘긴 때문이다.
이제는 편한 하산 길에 접어 든 황혼녘이지만. 돌아보니 쌕쌕거리며
정상을 향해 달음질하던 시절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뒤로 한
저어기 아스라한 꼭대기가 회한으로 다가와 기억의 문을 두드린다.
60의 나이에 뒤돌아 보면, 참 이것 저것 많이도 집적거리며
지내 왔으나, 음악과 벗하는 일만큼은 한번도 잊거나 포기한
적이 없었다. 횡보와 전도의 세월 속에서도 나를 제 길로
일으키고 돌려 세운 건, 사람 말고는 음악소리 듣는 일 하나 였다.
내 서재는 지금, 음악 방송의 트럼펫 소리가 청아한 울림으로
채워지고 있다. 가만히 시스템을 살펴 보는데, 참으로 질박하고
보잘것 없다. 높은 산의 기슭만 밟아 한번도 모험에 도전치
아니하고 지나 온 내 오디오역정의 끝머리인데 높이 오르지
못했으니 추락할 것도 없다.
일전에, 덩치 크고 무거운 물건들에 질려, 그저 시큰둥하게
그저 그려려니 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기다랗고 무겁고 까맣게
반질거리면서 꽤나 샤방한 소리를 내 주던 사포의 첼로와
바꿔 들인 하베쓰의 모니터 30은, 예상과 달리 찰지고
부드러운 소리로 내 반쯤 맛이 간 어두운 귀에 착착 감기는데,
20년 전 쯤에 내 방에서 활약하던 로져스의 Studio 7을 문득
기억저장소에서 끄집어 낸다. 소리통 혼자 소리를 내는 건 아닐 테니,
April DP1과 AI500 인티앰프의 역할도 언급치 않을 수 없다.
장식품 혹은 음향조절용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고 합하면
그래도 수천을 헤아리는 손 때 묻은 LP와 CD가 그나마
내 조촐한 음악 생활의 자존심으로 아직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15년 오디오 동호회 활동의 결과물이자 인생의
제4막 초입에서의 거의 유일한 정신적 자산이라 생각하면,
참 스스로에게 몰염치한 합리화이다.
요즘 내 귀엔 어느 시스템을 들어봐도 예전 어디서든 쉽게
조우하게 되던 쏘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데, 귀가 순화된
것인지 기계음이 좋아진 것인지 그건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뭘 먹고 마셔도 맛있는 미각의 소유자와 같은 복 받은 변화가
아닐지 모르겠는데 그런 변화 때문에. 허접한 내 시스템으로도
음악청취 생활이 가능한 게 아닌가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요즘 소리는 또 다른 계통에서 내게 관심을 끈다.
작년 여름부터 일년 여, 본업인 그림이 슬럼프를 겪는 동안
함께 classic guitar를 뚱땅거리던 마눌이 내 예상을 그리 오래
벗어나지 않고, 그으예 얼마 전 두손을 들고 말았다.
별로 부자 아닌 살림에 거금 300만원짜리 기타를 두 개
사서 거실에 펼쳐 놓고, 문화센터를 들락거리며 한동안
폼을 재던 일 조차도 첫 장벽 앞에서 돌파할 추력이 되지
못하고 퍼져 버렸다. 팔던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투의
포기 선언에, 대개 경험상 여성들의 사물에 대한 보편적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허탈함은 잠깐,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업그레이드의 지름신이… 부산의 거의 유일한?
기타 공방인 ‘피***’ 제작300호 기타 두 개를 주고 500호 하나를
받아 든 건 마누라의 포기 선언이 있고 꼭 20일 만이었다.
물론, 이 정도의 수준은 거의 입문기이고 세상엔 엄청난
물건들이 쌔고 쌨다는 진실을 도외시 할 만큼 순진한 내가 아니다.
하카란다 전판과 셸락이 아닌 광택 좋은 우레탄 칠로 뽀대가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 들인 물건은 소리 또한 많이
달라서, 3번줄 소리의 미세하게 둔탁한 느낌을 제외하면
완연히 다른 경지의 사운드와 큰 음량을 내 주는데 이게 또한
오디오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고, 연주랄 것도 없는 생 초보의
탄현으로도 이만큼의 차이를 보이니 한계 비용체증의 법칙으로
유추해 보면 계통도의 바닥쯤에 위치한 악기라고 보아야 하겠으나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상대적 음질차이임을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악기를 다루고, 화성을 공부하는 일이 음악생활 아니 오디오 생활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아직은 불분명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소리에 관한 감각의 깊이가 더 내려가는 방아쇠가 되리란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금속성의 기계로 만들어 내는 소리와
목재 울림통에서 증폭돼 나오는 소리의 작은 차이를 음미함은
오디오 파일로서의 오랜 역정에 다채로움을 더할 것이며,
직접 악보를 읽어 가면 퉁기는 나일론 줄의 떨림은 오디오로
듣는 그 위대한 음악 지은 이들의 영혼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차가운 낙동강의 늦가을 아침 북풍을 마주하고, 강변 자전거길,
파랑이 이는 물결과 벗하며 페달을 밟으면 헬멧 아래 귓전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서늘하다. 양산천 까지 아니면 물금까지
오가는 동안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기에선 음악이 흘러 나와
달아 오르는 체온을 식혀 준다. 자전거타기는 마눌과 함께
또 집적거려 보는 레져 겸 운동인데 이제 갓 6개월을 넘겼다.
바늘 구멍처럼 좁게 느껴지던 공포의 자전거 도로의 말뚝이
별 문제 아니게 되고, 처음 5Km를 가는데 세 번이나 쉬어야
했던 저질 엔진이 이제 10Km를 쉬지 않고 내달릴 정도로
업그레이드가 됐지만 위험과 불편이 동반되는 겨울이 머잖았다.
두어 번 넘어지고 나니 겁도 좀 없어지고 내리막이나 순풍에선
30km/h이상의 속도에도 익숙하게 되어 이제 좀 탈만하다 싶지만
몸조심 또한 잊어 먹게 되는 위험한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요즘 24간을 거의 함께 하는 마누라는, 매주 목요일 마다 뼈마디와
근육을 주무르는 치료소에 가고 집구석은 음악소리만 유일한
자극이다. 하루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소멸한다. 외부 세상의
다양한 자극과 차단된 내 신경은 불운하게도 영혼의 치유에 수
렴되지 않고, 이곳 저곳 아픈 곳을 만든다. 현재의 최첨단
의료기기로도 딱히 측정되지 않는 관념적 통증과 불편감이
드물지 않게 몸을 휘젓다 운동을 하면 없어지는 걸 보면 관념의
산물이요, 한가와 무위의 대가가 아니겠는가? 육체적으로 보면
그리 늘어져 있지만도 않은데, 느슨해진 정신을 어떻게든
조이고 닦고 기름치는 일이 목전의 과제라면 과제다.
낼 모레면 우리 방 모임이다.
다른 이의 소리를 들으면 즐겁다. 한참 소싯적 철 없던 때에
남의 집 소리,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 오면서 뒷담화로
낄낄거리던 치기의 시대가 그립기도 하지만, 공치사가 아니라
요즘은 모든 시스템의 소리가 다 좋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 오디오파일이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르고 아마추어 음악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음악애호가로 분류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 내 친구들은 날 쫓아 내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소주한 잔 즐겁게 함께 해 줄 것이며, 무위의 시간에
머리에 떠 올려 미소 지을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 줄 것임을 믿는다.
이각웅님의 초청이 고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