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1
며칠 계속 포근한 날씨다.
방송으로 듣는 마우로 줄리아니의 기타협주곡이 마침 끝났다.
어제.
자전거를 싣고 알싸한 초겨울 아침 공기를 가르며
백양터널을 넘어 고속도로를 조금 달리면 도로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초입 부근에 강변도로로 내려가는
램프가 있다. 삭막한 회색 콘크리트가 망막을 채우는 가운데
꽤 길게 이어지는 고가도로가 중간에 가지를 벋어 오른 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경사면을 내려가 거의 직각으로
강과 교차하던 도로의 진행방향이 편안하게 물흐름의 역방향으로
차가 평행하게 되면 하구의 폭 넓은 물줄기를 왼쪽으로 두고
멀리 양산 범어 일원의 고즈넉한 풍경과 순식간에 조우하게 된다.
산은 나지막이 멀리로 밀려나 있고, 물안개인지 연무인지는
몰라도 아직 난삽한 우리네 교외 풍경을 적당히 가려주는 덕에
거울처럼 강 건너 대저의 풍경을 반영하는 강물이 시간의
흐름 따위를 잊게 한다. 화명 생태공원에서 양산천 회차로까지
왕복 20키로미터 남짓의 아내와 함께 하는 짧은 일상적 라이딩이다.
벡스코 아트페어 전시장에 초대작가인 아내의 그림 두 점을
갖다 내고 늦은 점심…서면에서 갈비탕 한 그릇. 오랫만의 고깃국이다.
그러고 보니 근 일주일 풀때기만 먹었네. 자발적 기아에 가까우니
뭐 남 탓을 하거나 국가와 사회를 원망할 일은 더욱 아니다.
허기는 최고의 향신료 아닌가.
그 전날.
부산에서 21년간 컴퓨터 학원을 경영하던 하나뿐인 일곱 살 아래
처남이 3-4년의 준비를 거쳐 장인의 고향인 고성으로 귀촌한 지
2년이 갓 넘었는데, 김장 김치도 서리할 겸 놀기 삼아 아내와
후딱 한나절 다녀왔다. 통합된 사천시 삼천포 쪽 경계와
6킬로미터의 거리가 있는 삼천포 외곽 농촌지역인데 앉은
집 터가 양지바르고 뒤엔 대나무 숲이 병풍을 이루어 안온하고
정다운 집이다.
뜬금없이, 시골사람이 된 처남얘기를 꺼내는 건 다 숨은 뜻이 있다.
아내와 나는 둘 다 약골이어서 애초에 농사지어 먹고 팔자는
못 타고 났을 뿐 아니라, 이제는 덤벼 볼 용기조차 낼 나이가
지나 언감생심 전원생활의 꿈을 꾸지 못하다가 여기 저기
몸에 고장이 나고 텔레비전이건 어디건 늘상 착하게 살지 않으면
아플 것이라는 겁을 주는 풍조가 장난이 아닌 탓에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별 돈 없고 기술 없는 나에게도 혹시 얻어 걸릴지
모른다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미몽속에서 요즘 헤매는 중인데…
분가한 아이들의 형편에 따라 우리 부부의 여생도 그림이 달리
그려질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 어차피 가까이 살아
일상사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작은 아이
부부의 일차적 정착지가 어디냐에 따라 방향과 거리가 정해질
가능성이 거의 100% 이겠지만, 덩치가 둘 살기엔 너무 큰 집도
지나 친 호사라 줄여야 하고 몸을 움직여 남새라도 마당에 길러
먹는 일견 낭만적 삶-비록 순진한 초로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각오 아래-을 그리며 남은 생애의 마지막 이사를 계획하고 있어서이다.
머릿 속에서 집을 짓고 부수기는 이미 수천 수만 번이다.
비록 도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설계도도 뇌세포 속에 작은 부분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상 속의 집 서재에서 흘러 나올
음악소리도 이미 이명처럼 귀를 울리고 있다. 자극 없는 일상에
딱히 뭘 고민할 것 조차 없다고 말하면 매일 매일 먹고 살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보통 사람들에게 뺨 맞을 배 부른
소리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회오리의 가장자리에 밀려 난지 일년..
잊혀지고 무디어진 내 존재의 확인을 위해서도 무언가 부하를
걸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실로 겪어 보지 않은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오늘.
늦잠을 잤다. 요사이는 아침 일곱 시가 되기 전에 눈이
떠 질 때가 대부분인데, 아마도 아내의 이른 아침 외출로
자전거도 잠을 자야 하는 탓에 별로 조여 질 것도 없는
긴장의 끈이 그나마 약간의 실낱 같은 텐션조차도 놓아 버린
때문이리다. 아홉 시가 다 된 시간에 눈 비비고, 이런 저런
이유로 며칠 쉬다 한 어제의 운동 탓이 틀림없는 묵직하고
뻐근한 두 다리로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바삐 서두는 아내가
말아 준 채소쥬스 한 공기를 비몽사몽간에 입에 털어 넣은 게
조금 전인데…
휑한 집구석에 잠시 망연히 앉아 있다 세탁기에 한시간 후에
널 일주일 묵은 바구니의 내용물을 털어 넣고 전원을 누른 후,
나갈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화끈한 온도의 물에 몸을 맡기면서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서는
카페인을 거의 걷어 낸 커피를 한 잔 을 거실 아내의 책상 위에
내려 놓고 앉았다. 방금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끝났다.
곁에 음악이라도 없으면 이 고독감과 적막감은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인생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지만 음악은
더 알 수 없다. 그저 진동의 고저 장단으로만 본다면 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왜 내게 영향을 주고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인지 경이로울 뿐. 자연계의 흙을 빚으면 도자기라는
유용한 물건이 되듯 소리도 다듬어 깍아 내니 음악이라는
조각이 된 때문인가.
남은 오늘 내 하루는 예상컨대, 한 시간의 장부정리와
두시간의 기타 연습을 빼면 거의 육체적 휴식과 우주를
유영하는 공상의 번잡한 결합으로 점철될 터이다.
어둑해 지는 저녁 무렵에야 귀가할 아내의 목소리나마
사람의 육성을 들을 테고 벌써부터 느끼는 허기는 500ml의
수분과 약간의 탄수화물, 포화지방, 나트륨 그리고 무시해도
좋을 만한 섬유질, 비타민등으로 구성된 라면 한 그릇으로
때워질 게 거의 확실하다.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이면 25년전
젊은 시절 천오백만원 대출보증을 서 줄 정도로 가까운
친구와 점심을 함께 할 수도 있으나 그 조차도 때로 귀찮을 때가 있다.
나를 엮어 내고 있는 그 무엇들이 하나 둘씩 무의미 해 지거나
권태감으로 배척되는 일이 잦아 지는 것이 꼭 나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닐터이지만 ‘프로젝트’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가을, 전어 수송 수조에 물메기 한 마리면 횟집 도착할 때 까지
대부분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말도 있듯이 뭔가에 쫓기듯
몰두하고 고통받고 치열하게 싸워 버티는 게 인생이다.
호구책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쭉정이만 남은 내 속을
채우는 방법을 좀 더 진지하게 궁리해 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다.
열 한시. 여느 때라면, 양산천 멋진 자전거길에서 돌아 올
시간이지만 오늘 오전은 거친 호흡 대신에 관조와 충전의 기회다.
한 가지만 빼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 새, 세탁기가 다 돌았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