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2
일어나니 발코니 바깥 마당이 희끗희끗… 간밤에 바람소리가 거세더니
나 모르게 눈발도 흩날렸던 가보다. 날이 차갑다. 바람이 불어 그러지
않아도 영하인 날씨가 오전 열시 현재 체감 -7도에 육박한다는데
자전거를 몰고 강가로 나갈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방콕이다.
내일 전시회 참관을 위한 상경과 관련하여, 앓아 누우면 여러 가지 지인들과의
일정 조정문제가 골치 아픈 내자의 가벼운 감기기를 일단 핑계로 삼는다.
‘무위’와 ‘나태’의 이유는 무궁무진해 어떤 경우에도 고갈되지 않는다.
곁에 밤사이 확 떨어져 20도를 밑 도는 실내 온도에 자그마한 기여를
하고 있는 커피 한 잔이 모락모락 가녀린 증기가닥을 띄워 올리며
동그마니 앉아 예쁘게 배시시 웃고 있다. 스무 살 무렵 처음 접해,
40년을 애호해 온 갈색 유혹…크림 넣은 커피는 중년에 아무리 친해 지려
노력해도 도무지 정이 붙지 않았던 블랙커피와의 경쟁에서 승리해 여전히
내게 있어서만은 독점시장을 구축하고 있는데, 소싯적 길들여 진 기호품의
끈질긴 배타성을 보면 사람이란 확실히 이성으로만 조종되는 시스템이 아닌가 보다.
부모로부터 받은 32개 중, 실익없이 늘 문제를 일으키던 사랑니 네 개와
10여년 전 게으름과 방탕한 일상이 주요한 추정 원인으로 해 잃은 좌상
가장 바깥어금니 한 개를 뺀 27개의 충치 없는 비교적 쓸만한 치열을
요즘 유지하고 있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구강과
치주조직의 구조상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지만, 최외측 틈에 끼는
음식물 찌꺼기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치주염이 며칠 사람을 괴롭히더니
김희경원장의 ‘무지막지’한 처치를 받은 지 하루가 지나 이젠 거의
정상으로 돌아 왔다. 예방적으로 방금 털어 넣은 항생제와 한 컵의
물로 배가 부르다. 해가 가면 갈수록, 오래 막 써 피폐해 가는 엉성한
내 몸뚱이는 비록 소소하나 꽤 빈번히 고장이 나 대고, 병원들 문턱은
내 신발의 족문으로 어지럽다.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 하나라는 데
김원장에게서 야단맞고 교육받은대로 양치질을 제대로 잘 해야겠다.
저녁엔, 때 이른 은퇴로 다 정리하고 남은 겨우 여덟 개 모임 중
하나인 중학교 동기회의 송년회다.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이즈음이면 송년모임으로 심신이 고단할 때여서 중학교 모임이
뭐 새삼스러울 턱도, 굳이 시비를 걸 이유도 없으나 언급을 해 두는 건
좀 생뚱맞은 모임장소 탓이다. 총무 일의 수고로움울 마다 않고
늘 즐거운 기분을 배달해 주는 전직 형사 반장인 내 친구의 전문에는
서면 뒷골목의 어느 술 집 이름이, 모임장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할
휴대폰 메시지의 해당 공간에 버젓이 디스플레이 되어 고딕체의
반듯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ㅎㅅ클럽”!! 눈을 의심하고, 문자의
발신자의 이름를 다시 확인하고, 발신 당시 발신자의 정신상태에
대한 약간의 의문을 잠시 떠 올리고 기타 사건의 전체적 그림을
꽤 오랜 시간 유추해도 상궤를 벗어 난 해괴하고 엉뚱한 그 의미를
제대로 짚어 내기가 어렵더라! 그 장소가, 이전에 몇 번 떼로 함께
들르기도 한 터여서 내게 완전히 생소한 장소는 아닌데도 참으로
기습적인 기분이 드는 이유는, 업소의 성질 상 어두워 질 무렵 모여
밥 먹고 곁들여 몇 잔 걸친 후에 뒤풀이로 들르는 것이 과거 우리들의
암묵적 상식으로 통하던 곳이고, 노래방 기기가 설치된 무대와 의자가
딸린 테이블 열 몇 개가 시설의 대부분인 사실로 미루어,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사실상 최종 목적지로 직행하여 일정을 거꾸로 풀어 내려는
친구 발상의 기발함에 아연한 때문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마도,
그 술집의 주인이 오늘 모임 멤버인 내 친구의 중학시절 여친이 운영하는
술집이기도 하거니와, 일년에 하루쯤 거의 오십 년 전 애인이던
남학생의 친구들에게 문 닫아 걸고 술,밥 겸해 한 상 푸지게 펴 놓고
망년회 할 장소와 분위기를 제공할 배포를 가진 여 주인의 호의로 부터
비롯된 작품이 아니겠는가? 뭘 먹게 될지 어떤 모습으로 모임을
파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얼마 전까지 거나하게 취하면 마이크쥐고
방방 뛰고, 여인이라면 전봇대에 치마만 둘러도 눈이 초롱해 지던
정열조차도 이제 마누라 치마폭에만 폭 감겨 별 볼 일 없게 소진된
내가, 어떻든 여인이라고 60넘은 여주인과 50대 아지매 동업자 앞에서
역할 상 n분의 1이 아니라 친소 관계로 볼 때 거의 투명인간 급에
가까울 텐데도 수컷으로의 테스토스테론 작용 수준이 어떠할 지 참
흥미롭고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로, 엉뚱한 상황과 사건이
삶에 활력을 부른다. 총무로부터 보름 전에 받은 모임통지가 그래도
며칠 즐거운 상상과 기대로 날 훈훈하게 한다.
올 초부터 거의 끊은 술이지만, 오늘 밤엔 두어 잔 입술이나 축여 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