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3
날이 밝았다.
사람에 따라, 큼지막한 의미를 갖다 붙일 수도, 그저 또 하루일 뿐이라
여길 수도 있는… 어제와 별 다를 게 없는 ‘일상의 론도’가 다시 시작된다.
방송에서 흘러 나오는 브람스의 교향곡이 그나마 2014년 첫 날의, 해가
아직 들지 않아 여전히 칙칙한 집 거실을 잔잔히 어루만지고, 주방에서
스며 나오는 떡국 끓이는 내음이 에너지를 보충하라는 내 육신이 보내는
미약한 신호로서의 허기를 자극하고 있다. 새해 아침이 되면 일출을
보기 위한 장사진이 어김 없이 연출되는데, 부질없단 생각에 한번도
그 군중들 속에 끼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호사가들의 정열이
부럽다. 아마도, 난 건조한 사람인가 보다. 아니면 늘어 난 고무줄같이
되어 버린 탓인지..
내가 갑오생이고 확실히 100살을 넘기지 않았으니 올 해 환갑이다.
태어난 해 전 60년에 갑오경장이 있었고 후 60년에 컴퓨터 자판
두들기기로 글을 쓰고 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있을 것이며,우리나라가
원시 농경 수준 이었던 시절에 태어나 지극한 행운이 함께 해 전쟁을
겪지 않고 60년 후 첨단 문명 시대를 누리고 있으니 세대로 치면 이런
복 받은 세대가 없고 우리 5천년 역사상 드문 경우일 테니 무어 아쉬울
게 있고 더 누려야 할 게 남았을까. 불평불만은 복에 겨운 투정이고
굶기를 먹듯 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 새해 아침은 지상에서
바로 천국을 이루었음이라.
세월이 쏜 살 같다함은 진부하니 말을 바꿔 해 보자. ‘세월은 LTE 같다’라고
해야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려나. 이리 채이고 저리 밀려 ‘개밥에
도토리’ 처럼 밥그릇의 가장자리에서 맴도는 신세지만, 그래도
내게 아직 사람으로 해야 할, 또는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으리라.
올 해 내 집에 나와 둘 다 띠가 같은 새 생명이 둘 태어날 예정이라
베이비시터를 직업으로 삼아야 할 듯하니 아주 잠깐 지난 한 해
누린 짧디 짧은 인생의 휴식기도 단 1년 여로 끝나버리고 또다시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참이다. 철없던 시절 낳아 두 딸을 아무
생각없이 키운 벌로 이제 제대로 생각해 가며 길러야 할 손주들을
안게 되었으니, 책임은 크고 권리는 없을 작업이지만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 스스로 보람을 삼아야 할 테다.
사람의 존재를 규정하는 직업과 관계라는 두 끈 중 직업의 끈이 떨어져
나가니, 그러지 않아도 허약했던 관계의 끈들도 태반 잘라져 나가고
이제 질기디 질긴 인연들만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세밑에 몇 몇
아우님들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 주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고마운 사람들이고 고래힘줄처럼 질긴 인연의 사람들이다. 내게
아무것도 얻을 것 기댈 것이 없고, 오히려 자기네가 내게 빼앗길
것뿐인 사람들이 그래도 날 잊지 않음은 내 살아 온 과거의 표현형이며,
내 그릇의 크기를 알려 주는 계기판이 아닐까?
조동진의 부드럽고 편안한 노랫소리가 가슴을 쓰다듬는다.
아침에 일어 나 발코니 쪽 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 그 한산한 거리가
눈에 들어 오고서야 비로소 오늘이 휴일임을 깨달았다. 반 휴식과
반 건강의 애매하고 흐릿한 일상이 계속되고 내겐 치열할 이유가
없는 시간의 흐름이 정신을 부식시키는 가운데, 새해랍시고 또 무슨
각오를 새로 다질 것인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대책 없는
시간덩어리를 어찌 부수어 낼 것인가? 연말을 목표시점으로 팔 수
없고 팔릴 리 없는 책이라도 한 권 써 낼까? 왔다 가며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망이므로!
꼭 20년 전 오늘은, 육영수여사 피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나던 날
시작해 19년 동안이나 내 일상을 지배하고 알지 못하는 가운데 곁의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쳤던 흡연을 포기한 날이다. 이제 담배를 끊은
이후의 시간이 피운 세월을 넘어 섰다. 아무런 대체재에 기대지 않고,
신기하게도 건강한 상태에서 의지 하나로 딱 정지한 그 악습은 이후
단 한 개비조차 입에 물지 않으므로써 거의 완전히 내 인생에서
멀어져 갔지만, 담배 끊는 의지가 다른 수많은 악습으로부터도
해방되는 데에도 공히 적용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가 현실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는 걸 깨닫기 위하여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60이 된 지금도
성공의 기록은 20년 전 그 사건이 유일하다.
새해 소망이 있다면,
‘식습관의 획기적 개선’인데 이건 담배 끊듯 일도양단의 성질이거나
답이 명확한 문제도 아니고 스스로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참으로 복잡하고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라 장담키 어렵다.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는 동안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세상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추고, 몸의 욕망을 깎아 내고 가져 성가신
물건들로부터 자유를 얻고 어깨에 진 짐을 줄여가면서, 절벽에서
떨어지듯 추락하지 않고 흔적 없이 소멸해 피안으로 연착륙하기
위한 것이다.
게으름과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2년에 가까운 기타 연습은,
지지부진이란 말로 충분치 않다. 보케리니의 미뉴엩
한 곡을 독보해 쳐 내는데도 사흘이 걸려서야 일이 될 턱이 없다.
멜로디와 박자, 리듬과 템포가 오래 전에 이미 깊이 각인되어 단지
손가락만 움직이면 될 일이 이처럼 어려운 건 순전히 태만 때문이다.
태만이라는 악습을 끊어야 할 것이다. 20년전 그 날 처럼!!
형님,아우님들! 새해엔 우리 모두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주 뵙기를 소망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