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4
아직은 아침의 영역이다.
이 시간 쯤, 거의 반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카페인프리 믹스커피
한 잔을 홀짝인다. 믹스커피는 디지털 음악감상체계와 닮아 있어,
편리하나, 때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곤혹스럽다.
한 달 중에 제일 분주한…이라기 보단 모임이 몰려 있어 제일
덜 심심한 한 주일을 보내고 다시 나의 느슨하고 허술한 카운트다운의
체계 안으로 편입된다.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미 현대의 삶에
빼고서는 얼개를 구성할 수 없어져 버린 ‘요일’은 참 교묘하게 잘 설계된
인공적 관념적 메커니즘이다. 7이란 숫자를 채택한 건 적당한 크기의
소수라, 일력과 계속 어긋나 변화와 다양성을 주기 위함이었는가?
천지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분 조차도 하루를 쉬어야 하는데 하물며
하찮은 인간임에랴…선조 인류의 인문학적 지혜는 뭐 오늘에 못지
않음의 반증이 아닐까?!
지난 주말, 종택 아우 댁에서 장장6시간에 걸친 ATC100A의 향연은
자신감도 잃고 피폐해진 형편으로 인해 희박해 져 가던 오디오에의
관심에 다시 불을 지폈다. 현재 내 방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가녀린
모니터30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펀치감…사실 이 요소는 내게
오랜 갈증이요 허기였다. 음악에 심취하게 된 이후 오랜 세월 언제나
주머니 사정의 문제이거나 공간 혹은 가족관계에서의 제약으로
가능하면 경박 단소한 시스템 위주로-그 결과 주로 인티앰프만 수십종
사용해 보는 역정이었다- 꾸려 오다 보니 소리는 언제나 단아하고
조촐하며 질박했고 경천동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생을 통하여
일상적으로 예외 없었던 열 평 이내의 청취공간에서 조차 땅바닥을
기는 저음에너지를 구현해 보지 못했으니 그 갈증과 허기는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천상의 소리는 결국 머릿속의 문제이고 현실세계에서 오디오 시스템의
최종 결과물은 결국 왜곡의 선택이라 생각해 왔다. 변형과 윤색은
예술행위의 기초를 이루지 않는가? 사진조차 사진(寫眞)일 수 없다는 게
내 경험이다. 100A가 내는 소리가 어떠하냐 하는 말을 하지 말자.
들어 본 사람은 들어 본 대로일 테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설명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물리현상이 아니니! 다만, 모니터30의 딱 모자란
내 욕망치 30%를 채워주는 소리로 나는 들었다. 如是我聞! 불교철학적으로
쓴 말이 아닐뿐더러 귀가 맛이 간 초로의 청취소감이니 시비의
단초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반가운 얼굴, 드물게 귀를 긁어 주는 소리,
예전 아직은 힘과 정열이 충만하고 여인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미만하던
그 시절의 느낌과 결합되어 머릿속에 각인된 그 시절 그 노래…
그 세 요소가 함께 한 저녁시간은 기억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인간에게 타임머신이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경이로움의 한 때였다.
느낌 아니까!!
어느 시점에선가, 디지털음원에 대한 음질 시비가 우리 모임에서
자취를 감춘다. 연전에 DSLR과 필름카메라의 메커니즘쉬프트와
관련해 논쟁을 벌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기술발전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말 많은 오디오 세계의 다음 먹거리는
무엇일까? 앰프의 회로이론은 끝장을 본지 오래고, 경험에 따르면
새로운 곡면 인클로져의 소리통이 전통적 직육면체와의 승부를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막선도 훌륭한 소리를 내주는
케이스가 드물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공간문제에 관한 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 시스템도 허다하다. 오디오 허무주의를 운위할
경력도 되지 않고 생각도 없는 푸념으로 치부해도 좋지만 아무리
많이 듣고 읽고 헤매도 답은 없다. 아니, 답이 없다는 답을 얻었으니
소득이라면 소득일 터….
복일까 화일까?
모자람으로 치열한 극복의 역정을 걷는 게 보람일까, 아니면 대충
걸어 평균적으로 훌륭한 소리의 시대를 사는 게 복일까. 귀가 순해진
탓도 있겠으나 요즘 소리는 다 좋다. 희미해져 가면서 좋았던 부분만
남기는 뇌기능의 작용으로 지금도 여전히 전설인 장전축에서 울리던
풍성하고 여운이 긴 그 시절 그 음악소리의 기억을 반추할 수 있는
세대의 생각 속에는 더 이상의 오디오 논쟁은 무의미하다. ‘과유불급’은,
수 천 수만의 음원바다에서 허우적대며 음악의 서두만 잠깐 핥고서
다음 음원으로 넘어가 버리는 우리네 오디오쟁이들의 고약한 악습이
더욱 고질화되여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의 시대를 규정하는 프로파간다이다. 소니 카세트레코더
메고 다니며 존 덴버의 ‘Rocky mountain high’를 늘어나 못 듣게
될 때 까지 플레이시키고, 여름 야외전축의 갸날프고 서걱거리던
빽판으로 흘러나오던 모래사장과 오버랩되는 그 까마득한 시절의
궁핍과 기아가 그리운 건 싸구려 감상일테지… 오디오에 더 이상
모험의 세계는 사라진 걸까?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참 어렵다.
팩트만 서술해 보자. 육하원칙중에서 시간, 장소 따위는
빼고 뼈대만 추렸다.
“한 남자가 대화 중에(폭력으로 위해를 가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식적으로는 제스츄어로 추정된다) 옆에 있는
다른 남자의 허벅지를 손으로 쳤다(대신에, 만졌다 쓰다듬었다
건드렸다 눌렀다 문질렀다 때렸다 등등으로 표현해도 선택의
문제일 테다). 대상이 된 남자는 지병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 접촉으로 약간의(이 어휘도, 꽤. 상당히. 매우. 가볍게. 엄청.
놀랄정도로…등등으로 쓸 수 있겠지) 통증을 느꼈다. 둘 사이는
평소 그리 친숙한 관계가 아니다. 앙숙이라서가 아니라 서로
친목관계가 형성될 정도로 오래 된 면식이 아니다. 두 당사자는
기분이 나빠졌다. 먼저 기분이 나빠진 쪽은 잘 모르는 사이에서의
신체 접촉을 문제 삼았고, 다른 일방은 일상적인 사건에 과민반응
한다는 이유로 나중에 기분이 상했다. 당사자 일방은 모임 중간에
나갔고, 타방은 사과를 하지 않았다(타이밍을 놓쳤는지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이후 그들만의 리그에서
사건 전개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양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내가 인지한 팩트다.
위의 서술은 열린 모임에서 흔히 보는 자그마한 사건을
관찰자의 시각을 배제한 채 건조하게 나타낸 것이다. 글재주가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이를 주제로 중편 소설
한 권은 써 낼 수 있으리라.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은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한다. 인간에게 때론 타인이
알 수 없거나 이해하기 불가능한 동기가 내심에 존재하고 마음이
시키는 것과 다른 형태로 감정이나 행동을 표출하는 신경회로의
다중구조를 가지므로 두 남자의 잘 잘못을 내 기준으로 재단하기는
불가능하다. 물론 그 각각의 반응이 잘못인지도 극히 개인적
해석이리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물에 대한 태도가 소위 ‘양비론’이고
조금이라도 더 비난하고 싶은 쪽을 가리는 것이 내 성격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관한 한 그럴 생각이 없다. 다만, 현상 자체로서 재발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각웅 아우님의 글에, ‘아구찜에 아구가 없다’는 명구가 나온다.
붕어빵에 없는 붕어가 아구찜에 없는 아귀와 같은 계통의
개념인지는 그냥 웃고 제쳐 두자. 나는 원래 아구찜을 앞에 두면
어릴 적 아직 시원한 국물맛을 알지 못하던 시절의 아픈 기억으로
아귀살은 잘 짚지 않는다. 결국 콩나물을 씹는 식감과 매콤한
양념 맛으로 밥을 넘기는 게 내 방식인데, 혹시나 해서 뒤적이던
직경 35센티미터 정도의 접시에서 바닥을 보일 때 까지 콩나물과
붉은색 소스로 엄폐된 살코기 한 점을 찾아내는 데 실패함으로써,
밥 한 공기 삼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꽤나 의아한 느낌을
가졌었는데 이는 나만의 소회만은 아니었나 보다.^^ 쥔장에게
따지지 않은 것은 내 섭식취향 때문이기 보단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는
소심함과 무력감이라 믿는다. 서비스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돈이든 성가심이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반대로, 그 식당 쥔장
측면에서 보면 돈 벌기 위해서는 그 따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의 공식풀이에 다름 아니다.
종택아우의 퍼머머리도 멋지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시스템세팅
또한 오랜 오디오경력에 걸맞는 경지를 보여 주었는데,
요사이 한 달 지나가야 몇 잔 입에 대지도 않는 소주 넉 잔 먹고 보낸
토요일 저녁의 즐거움을 다시 맛보려면 한 달이나 남았다.
기다리는 사건은 빨리 오지 않고, 피하고 싶은 고초는 언제나 코 앞이다.
그러나, 다들 파이팅이다. 모든 건 다 지나가는 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