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삼십분 전에 일어 났으니 오늘은 기상이 좀 이른 편이다.

케이블채널의 영화보는 재미에 자정을 넘겨 잠드는 날이

많아 지고 당연한 결과로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는 게

보통의 경우가 돼 버린 요즈음으로 치면 그렇단 얘기다.

시청하는 내 눈의 위치에서 약 2미터 떨어진 42인치 텔레비전에다

본격적인 AV system을 설치할 형편은 안되고, 자체 스피커의

가늘고 평면적인 소리로 그냥 저냥 시청을 해 오다 Arte channel

때문에 소리를 어찌 좀 해 볼까 이 궁리 저 궁리 머리를

굴려 봐도 메인 시스템-이라 해 봤자지만-에 걸면 소리에

품위는 생기는 데 우르릉 꿍꽝하는 영화효과음을 울리기에는

너무 착하고 딱히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 이리 저리 개밥에

도토리 처럼 굴러 다니다 곱지 않은 시선의 아내에게 면후심흑을

감수하고 넘겨버린 꼬맹이-오디오 엔진을 붙여 봤어도

말소리는 먹먹하고 총 쏘는 소리는 물속 같아 반 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눈에 들어 온건, 작년에 아내의

컴퓨터에 붙여 놓았던 오디오엔진을 음악적 용도로 쓰기 위한

대체용 3만원짜리 컴퓨터 스피커-액티브형의 우퍼유닛에

좌우 두 트위터를 연결하게 되어 있는 보통 PC speaker-였는데…

붙이고 보니 이 놈이 물건이다. 대사는 중앙에 심지가 섰고

대포소리는 총소리 정도의 살집이 붙고 바닥에 탄피 떨어지는

소리는 고역청취에 장애가 있는 내 귀에도 납득할 만한 수준의

음향을 뿌려 준다. 피식 웃을 일이 아니다. 가격대 성능비가

장난 아니다. 소리는 전후좌우상하로 막 날아 다니고 방안을

꽉 채운다. 바닥을 기는 저역이야 나올리 있겠냐만 제대로 된

시스템을 붙이면 날 수 있는 소리의 바로가기 아이콘 정도는 실하다.

10년 전 쯤 어느 부자 동호인 댁에서 거의 처음으로 눈/귀동냥한

주윤발의 ‘와호장룡’…그 선명하고 가슴을 쳐 오던 영상과

음향이 아직도 각인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뇌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바코의 삼관 프로젝터‘시네8’에다 굳이

밝힐 필요 없는 당시로서는 호화 라인업은 얄팍한 주머니 사정과

관계없이 일생 처음으로 사고를 쳐 버릴까하는 강렬하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덮쳐 왔었고 그 첫사랑과도 같은

설렘과 두근거림을 가까스로 다스려 물리쳐 내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새롭다. 살다보니 어찌하여 기억 속의

그 소리가 기껏 몇 만원 짜리 스피커의 설익은 소리로

오버랩 되어 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 잘 못도 없었던 것

같은데 살다 보니 형편이 이 모양이다.신세 한탄을 하는 것

보다야 능력껏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오랑우탄 아닌 사람으로서의

자존을 회복하는 일이라, 인터넷을 뒤져 디지털 입력단이

다양하고 소리가 카랑하면서도 묵직하단 평이 있는 4-50만원대

액티브 스피커를 하나 찾아 내 아내에게 결재를 올렸는데

아뿔싸 직관이 뛰어 난 나의 예측에는 한 치 어그러짐이 없다.

머쓱하게 돌아 서면서도 스스로 예전의 전투력은 다 어디 갔나하고

한숨만 푹 쉰다. 다음 날 날 위로 한답시고 잘 생각해 보고

사려면 사라!고 한 발 물러 선 아내의 멘트에 실끈 같은 희망이

다시 불지펴 졌지만…이미 김은 빠지고 밥은 설익은 채로 식어

버린 것을…

지나 간 세월,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잠깐을 빼면 영화는

내 선호영역이 아니었다. 줄리 앤드루스의 ‘사운드오브뮤직’을

15번 보고, 챨튼 헤스튼의 ‘벤허’또한 5번을 본 건 내가

영화광이어서 라기 보단 시대상황의 반영이 아니었던가 한다.

70년대 전체에 청춘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가 데이트를 하건

뭘 하건 시간 죽이기에 달리 뭘 할 수 있었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될 법한 시츄에이션일 텐데 그 영화관의

시대는 내게 있어서 80년 결혼과 함께 아스라한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갔고 돌고 도는 지구처럼 다시 그리고 패션처럼 좀 더

세련된 반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건 백수가 된 지난 해다.

영화관은 컴팩트해졌고 음향은 입체화되었으며 의자는 안락

그 자체이고 스크린에 흘러 내리던 빗줄기 혹은 뽀샤시로 텃치한

포샵 속의 사진 같던 흐릿함은 사라졌지만 깍지 끼고 찰싹

붙어 앉아 함께 영화 보던 그 시절 봐 줄만 하던 아가씨는

 어디 가고 고슴도치처럼 무서운 초로의 아낙네가 어둠 속에서

졸고 있는 장면이 현실이라면 아! 가혹한 것이 인생이랄 수 밖에!

75인치 모니터가 내 지갑의 스케일과 걸맞는 가격대로 팔리고,

기 만원으로 제법 총소리를 내 주는 시대가 부지불식간에

내 좁은 방으로 스며 들어 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을

비웃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 나면 갤럭시탭으로 날씨를 확인하고, 신문을

일별하고서 이런 저런 서핑을 하는 습관도 이제 정착을 했다.

시절이 하수상하더니 백화제방 중구난방의 시대다. 개방적 S

NS의 거친 물결에 떠 다니는 우리네 인생은 부평초에

다름 아니다. 답 없는 문제에 답 내라는 목소리가 거세고,

남에게 내 주머니 채워달란 철없는 울부짖음이 세상에 미만하다.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님에도, 세상의 변천은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미망 속의 나날이 계속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다. 구원은 실체 없는

종교로부터가 아니라 스킨쉽이 가능한 사람에게서 온다는 게

내 신념이다. 영성을 구하는 간절함으로 사람을 구하고

사랑을 구함이 더 실현 가능한 방법일 게다. 거대담론에 매몰 돼

의견이 사람을 적으로 대하고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이

무언지는 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할 테지만 대중의 생각없는

부화뇌동이 큰 까닭이 아닐까. 싸움구경만 하고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내게 색깔이 뭐냐고 다그친다.

참 고약한 경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고 일어나 한 시간여가 지난 지금,

천국은 내 좁은 서재에 이미 내려 와 있다. 기아와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한 잔의 차와 음악이 함께 하며

별로 그리운 것도 없으니 그들이 그리는 천국인들 이와 많이

다를까. 찬찬히 생각하며 카페인을 대부분 제거한 커피

한 모금 혀로 굴리다 목구멍을 넘기고 키보드 두들기는 짧은

이 순간이, 과거의 기억 또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히

독립된 현재로서 내 존재의 유일한 증거이다. 이 순간적

혹은 찰나적 현실 외에 어떤 증명이 필요할까. 나의 현재는

천국이다. 얼마나 지속할지는 전적으로 내 몫이다. 그래서

문 밖을 나서는 일이 간단치 않다.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음을

단단히 다져 먹은 후 아우들을 만나러 나가야지! 아무도

내 소망을 거저 이루어 주지 않을 테고 구원은 그들에게서

오는 것이니 목욕재계할 일이 아닐까.

모니터 30에서 흐르는 바이올린 소리가…고혹적이다.

이제 방을 나가야 한다. 잔인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