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6.정모후기
창 밖으로 눈발이 흩날린다.
기온은0도에 가깝고 아침 아홉시가 넘었는데도 방안은 여전히 어둑하다.
집에서 만든 요구르트를 넣어 단맛이 배제된 담백한 해독주스 한 사발을
곁에 놓고 자판을 벗하는 이 시간, 방송음악이 매끄럽게
귓전을 어루만진다.
다음 주 3 박 5 일 예정의 외유를 앞두고 걱정거리가 생겼다. 달포 전부터
약간의 통증이랄까 뭔가 석연찮은 불편함이 느껴지던 오른 팔과 어깨가
진료결과 비록 간단하지만 수술을 필요로 하는 고질병이 되었단다.
팔을 내리고 있으면 아무런 자각증상이 없지만 들어 올리거나
뒤로 젖히는 경우엔 격통이 생기는데, MRI 촬영 결과, 작지만 건 파열이 있고
주변에 근육내부에 염증이 생겨 있어 약물치료는 어려울 공산이 크고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단 게 의사의 소견이다. 생각해 보면, 단순히 노화로 인한
문제라기 보단 오래된 고질인듯 싶다. 지난 수년, 주로 즐긴 운동이 골프와 탁구,
그리고 자전거 등이었는데 운동 전후 스트레칭은 늘 건성이고 나름 승부에
물불 안 가리고 몰두하는 성격으로 무리를 했을 뿐 아니라, 쇳덩이에 가까운
오디오기기를 혼자 이리 옮기고 저리 갖다 붙이는 무망한 짓거리의 세월
또한 만만치 않아 타고 나기를 그리 건장하지 못해 부실하기 짝이 없는
몸뚱아리로 가당찮게 무리를 해 왔던 것이고, 이미 오래 전부터 몸은 계속 경고
신호를 보내는데도 시쳇말로 개무시를 때린 이 늙은 철부지에게 ‘마음만
청춘’이란 말이나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경구들은 과연 뒤늦게나마 고통속에
철들게 하는 만고의 진리 아니던가. 즉시 수술을 해야 한다면, 여행을 취소해야 하고
이미 경비까지 지불한 마당에 위약금의문제도 현실적 고려대상이지만,
나와 달리 이전에 중국을 가 보지 못해 목 빼고 기다리는 내자의 입장을 감안치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주치의와 상의한 결과 당장 죽을 병은 아니므로
2주간 대증적 약물처치를 하면서 다녀와 어깨에 구멍을 뚫기로 했다. 아랫돌 빼
윗쪽 막아야 하는 둑처럼, 허술하게 엮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성근 울타리처럼
내 몸은 외곽부터 봉화가 올라가는데 이젠 뭐 별로 놀라지도 않는 걸 보면
스스로 도 통한 듯 싶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엊그제 토요일엔 김해 용교 아우 댁에서 7명이 모였다. 조촐하다.
해서 더 아기자기하다. 모니터 실버를 박은 오토그래프에다, 일러줘도
외울 수 없을 것 같아 아예 물어 보지도 못한 엄청난 빈티지 라인업에
꽂혀 있는 진공관의 열기로 후끈한 가운데, 주인네 소리야 라인업과
주인장의 공력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테니 중언부언은 실례일 테고,
용교 아우님의 여섯 살 난 딸 정빈이-용교 아우가 거의 50에 이르렀으니,
나이로 계산해 보면 마흔 서넛에 얻은 외동딸 늦둥인데-의 목청이 탁 트여
우렁찬 노랫소리-대성의 소지가 엿보인다는 중론-에 경탄의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마감하였는데, 연전의 산청모임에서 나중 들은 바에 따르면
다들 잠도 못 자게 지치지도 목이 쉬지도 않고 끊임 없이 울어 대던
녀석의 목청이 이처럼 동요를 훌륭하게 불러 내는 음악적 재능을 표현하는
도구로 승화될 지 그 때는 아무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다행히 나는 그 때 저녁 반주를
과음하는 통에 일찍 꿈나라로 가버리는 바람에 그 환란에서 비껴나는
행운을 누렸지만…^^ 용교 아우는 사업하면서 술 먹고, 납땜에 날 새는 줄
모르는 나날과 씨름하다 잠시 건강을 해쳤지만 그만하기 천만다행이니,
부디 하늘의 고마운 yellow
card를 망각하지 말기를 바라고…
뜬금없이 자랑인지 고민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독백으로? 아니면 들으려면
듣고 말려면 말라는 식의 방백인 듯한 어투로 서두가 어디부터인지 알 수 없게
꺼낸 B아우의 말을 대충 스토리대로 재미 삼아 한번 옮겨 보자. 여기서 부터는
겹 따옴표 안의 내용은 ‘19금’이고 본인의 말을 다듬기는 했으나 의미의 왜곡은 없다^^.
“지난 번 사고로 인한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늘 불편한 몸으로 다친 이후
담 쌓고 금욕의 세월을 보내고 있어 그 기능 여부에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그 문제의 날, 컨디션이 조금 회복되는 듯 하면서 젊은 남자로서는 너무나 당연히
‘해소’해야 하는 욕구가 불현듯 참을 수 없게 치밀어 올라 다짜고짜로
‘making love’를 실행하였고, (제 3자인 우리들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평소
피력한 바처럼 시간이나 기교에 있어 카사노바는 게임이 안되고 변강쇠
-그러고 보니 성이 ㅋㅋㅋ-와 호형호제한다는 사람으로서 오랜 금욕 끝의
방사여서 인지 엄청난 양의 분출로 마감하였고, 이후 다시 휴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딱 그 한번의 사랑에, 올해 46세의 사나이 B군의 내자
(우리도 잘 아는 제수씨^^)는 중학교 다니는 외동 딸아이의 동생을 잉태하기에
이르렀다” 는 것이었고 아울러 낳게 되면 다 큰 딸이 ‘자기가 키울 테다’라는
나름 반가운 의지를 밝혔으나, 여건상 낳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
라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부러운 인생이다!
앞의 B군보다는 나이가 10년쯤 위이고, 공립중학교 교사인 L아우님은
요즘 수염을 기른다.작년 초부터 길러 1년이 조금 넘은 탓에 이미 이미지가
지인들에게 새겨져 이젠 예전 모습이 차라리 생경할 판인 나의 경우를
참고한 것인지 별개로 우연히 그리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백수인 나의 경우와는
달리 교단에 서시는 분으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하긴, 푸른지붕에
근무하는 고위인사 중에도 구렛나룻을 기른 경우가 있으니 우리네 사회가
터부의 울타리를 많이 허물긴 했어도 내 경험으로 미루어 그 용기가 가상타^^
지난 토요일 날 1년 여 만에 혼사 때문에 만난 올해 나이 60인 사촌 누이가
이 오빠의 손을 부여 잡고 이게 누구냐? 이게 뭔 짓이냐고 깔깔대며 놀리던
내 수염 기르기는 단순히 재미가 아니라, 실용적 측면이 강하다. 뚜껑이
거의 사라져 버린 내 얼굴은 거의 특징이 없어 밋밋하고 건조하므로 백수가
된 이후 사람을 만나거나 볼일이 있어 출타할 때 모자를 하나 쓰고 나다니는 게
익숙한 모습인데, 여기다 제법 거뭇하고 탐스런 수염까지 더해지니 잔잔하고
뭔가 메시지가 있는 용모가 된 듯하다. 사진기라도 하나 메고 나가면 예술 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는 곤혹스러운 일이 간혹 있다는 것인데 까짓거 아무리
쪼잔한 인생이라도 예술이라 아니할 순 없으니…^^ 아무튼 수염기른 동지가
한 분 더 계신다는 건 흐뭇한 일이다. 고맙게도 왕복의 교통편을 해결해 주는 바람에
여러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시간 보냈는데, 올해는 꼭 아우가
속 깊은 반려를 얻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한 사람 빠져서는 안될 분이 그 놈의 계절병인 독감으로 못 오셨다.
참석 못하는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전화기 속의 매력적인 코맹맹이
소리가 안쓰럽게 여겨지는 가운데, 다음 날을 기약했는데 곧 쾌차하시면
감기퇴치 번개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walking encyclopedia인 아우님의
불출석은 모임을 상당히 건조하게 만들었는데 겨우 수회의 참석으로 이렇듯
빈자리가 느껴지는 걸 보니 걸출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너무 빨리
친해지니 또한 쉽사리 친구 잃어 가슴에 상채기 날까 두렵기도 하다^^
자그마한 체구에 얼굴은 동안이지만 하얗게 쇤 머리털을 이고 자그마한 체구로
느릿하게 걷는 상현 아우님의 사이클로 다져진 튼튼한 다리가 나는 부럽다.
고단으로 빡세게 체중을 얹어 페달을 밟아야 할 텐데, 무릎 나갈까 봐 편안한
페달링 위주로 운행을 하다보니 7개월을 힘준 허벅지라 해 봤자 예전이나
난형난제라! 투박한 MTB를 타다 보면, 쌩 지나가 순식간에 먼 빛으로
사라져 버리는 로드사이클에 호기심이 가다가도 태생적 성격탓에 저러다
공중에 날아 버리면? 하는 공포상상이 먼저 머리에 떠 올라 언감생심인
나와는 아주 다르게 대담한 양반인 걸 보면 담력은 체구와 반비례하는 건가?
나는 세상에 부러운 친구 사이가 있다. 안지가 올해로 16년째인 ‘택배’로
묶어 불리는 두 아우다. 99년 양산의 광우전자에서 ‘300B’ 관 시청회가 있던
그 날 천리안 동호회에서 글로만 접하던 두 양반을 처음 만났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겪어보니, 혹은 동성커플이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엄연히 아내 분들이 계시고, 아들 딸 낳고 잘 사시는 양반들이니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지만, 이건 질투와 시샘의 잠재의식이 분탕질을 하는 탓이라 치부해 두자.
내 오디오 음악생활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이 두 양반에게 의존하고 있다.
음악 들으며, 몇 번 식구와 말 섞으러 들락거리다 보니 어언 11시가 다 됐다.
지난 월요일11년 공부를 마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한 작은 애가 아직도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지 못해 그나마 친정이라고 와서 근 두 달을
죽치고 있는 통에, 밥 해 대랴 수발하랴 파김치가 되어가는 내자가 안쓰럽다.
뭐 내가 손 놓고 있는 건 아니지만 배 아파 낳은 자식에 대한 애착은 여자들이
훨씬 더할 테고, 집안일을 돕는다 해도 34년의 내공이 쌓인 내자의 태도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 대충 정리가 되면 귀가 입에 가 걸리게 옷이라도
한 벌 사 입게 해야지! 곧 점심을 먹고 조금 서성거리다 보면 또 하루가 스르륵
사라져 버릴 거다. 꽁무니에 불 붙은 강아지처럼 이리 저리 뛰고 설쳐 봤자
별 남을 게 없는 백수의 하루가 덧없어 보일지라도 인식이야 말로 유일하게
우주를 생성하는 주체가 아닐는지. 우주는 적층혼 스피커의 개구부처럼 개체의
무한대적 인식의 중첩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내가 없으면
우주전체가 없다. 무한대의 공간에선 언제나 예외 없이 나의 존재와 위치가 중앙이다.
수학적으로도 반박할 수 없이 그렇다. 나란 인식시스템의 붕괴는 우주의 종말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존귀하다.
그래서 지금 내 무위의 시간조차도 한없이 무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