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7
정형외과 병원에 다녀 오는 길에 만사천원짜리 갈비탕을
한 그릇씩 비우는 호사를 누리고, 이제야 집에 들어 왔다.
아침 아홉 시에 나선 병원 행이 반나절 아까운 시간을
소비했지만 나름 위로가 되는 진단 결과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현재는 통증으로 굴신이 어려운 내 오른 쪽 어깨지만,
수술 필요 없이 달포간의 약물과 재활치료로 좋아 질 것이고,
‘외상의 후유증 이라기 보다는 오래 쓴 기계의 경고음’이란 게
앞으로 내 주치의가 될 양반의 확신에 찬 선언이다. 수소문
해 보니 명의란다. 그 명의 분의 또 다른 당부는 ‘이제부턴
까불지 말’란 말이다. 암…그럴 때도 됐지 않은가?!!
환갑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친구들 부부동반으로 열 쌍이
가기로 수년 전부터 계획했던 중국 계림여행은, 우여 곡절을
겪은 끝에 허무하게도 우리부부를 포함한 세 쌍으로 낙착을 본
3박 5일 여정을 지난 금요일 새벽에 끝냈다. 스무 명이
빠짐없이 예약시스템에 편입되어 미래에 비행기타고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기적이 아니라면 절대로 성사될 수 없다는 다소
상식적인 진실을 60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머저리들에게 뭐라
달리 더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는 계획단계부터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 70이면 몰라도 60에는 불가능하다는 걸
미리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경험해 본 사람은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니…위약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가니 마니 하는
실랑이로 몇 날 며칠을 티격 태격한 건 실로 한편의 코미디였다.
난세에 영웅이 나고 역경에 본성이 나온다더니 45년을 알아 온
친구들의 진면목이 이제야 커밍아웃을 하다니!!
출발시각이 밤 10시라는 팩키지의 상황도 범상치 않지만,
여객기가 순항모드에 들어 가는 경우 경험에 따르면 약간의
소음 외에는 진동이 거의 없어야 할 비행기가 가는 동안 내내,
소형 여객기가 난기류에 휩싸인 때문으로 추정되는
심한 진동으로 인하여 간은 콩알만해 지고 심장이 요동질 치게
만든 건 물론이고,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좁아터진 이코노미석에
묶여 심야 근 4시간을 잠도 못 자는 고생이 향후 여정의
고단함을 예고하는 가운데, 아무튼 시간은 인생사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진리를 깨달을 새도 없이 얼떨결에 중국 땅에
내려 섰다. ‘그런 악조건을 버텨낸 나의 체력과 정신력은 아직도
쓸만하다는 방증일 것’이란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테다.
2005년에 북경 일원과 장가계를 다녀 와 중국패키지여행이
어떠하다는 걸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그 때와 달라진 건
거의 없다고 본다. 향신료나 간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은
싸구려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내 자발적 의사가 아니라
안내원을 따라 다니고, 사람 수가 적어 우리 여섯에게 배정된
중국산 소형버스의 그 악의적인 진동과 소음 속에서..혹은
2류호텔의 통통튀는 철 스프링 침대 위에서 제대로 조절되지
않은 공조로 한기와 건조함 속에서 보낸 사흘은 그래도
견딜만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행 중 친구 한 녀석이 첫 날 저녁 밥을
먹는데, 젓가락을 놓고 있는 거였다. 독감이란 게 보통
약간의 미열과 이로 인한 근육의 불쾌감으로 시작되어 열이
심해지고 비염과 인후염 기침과 심한 근육통이 병발하다
열이 가시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목에 가래가 끓다가
좋아지는 코스를 밟지 않는가?!! 친구는 이제 시작인 거였다.
출발 전에 불길한 느낌을 감지하였으나, 이건 공식 비용만
부부 합산 2백만원이 날아 가는 해외여행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선 인간의 만용에 바이러스는 추호도 사정을 봐 주지 않는다는 걸
이번에 알았단다. 그 친구가 어제 내게 한 말이다. 비상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이 시즌의 계림여행은 한국에서
가득 사람 싣고 간 비행기가 새벽에 다시 가득 싣고 부산으로 온다.
다시 말하면, 일반 여행객이 있을 리도 만무고 자리는 더 더욱
있기 어려우니 전세기를 띄우지 않는 한에야 어떤 수를 쓰던
아픈 사람은 계림에서 몸으로 때워야 하는데, 고약한 것은
패키지의 내용이 하루의 관광을 포기하고 호텔방을 집구석 삼아
마누라 옆에 끼고 링거 맞으며 요양을 할 수도 없는 구조의
3박 3호텔이란 거다. 내 안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하다. 본인
스스로가 체력이 시원찮고 건강에 관한 한 평소 치명적인 질환은
없으나 관리하지 않으면 잘 몸 져 눕는 스타일이어서 짐을 꾸리면
비상약이 약국 반은 차리고도 남는다.^^ 타이**이란 해열 진통제
혹은 소염제는 현재까지 안전성이 확립된 몇 안되는 양약으로
알려져 있고, 임산부에게도 비교적 안전하다는 것이 정설인데
이 정제는 항상 마누라의 비상약 목록에서 빠짐이 없고 양도
충분히 확보한다.
**레놀은 기적의 양약이다.^^ 하루 6정을 넘지 말라는 경고 문구를
어길 수는 없어 모두 12정을 이틀에 걸쳐 복용한 친구는 48시간
이상을 버티며, 복파산 330계단 첩채산 400계단을 부축 없이
오르내림은 물론 그 어렵고 험난한 입욕방식의 용승 노천온천
물에 몸 담그기 등 우리 건장한 나머지 사람들의 일정을 빼 먹지 않고
따라 다녔고 약을 먹고 식욕 없어 속이 비니 메쓱거리고 뒤숭숭한
가운데 낙오하지 않고 모든 밥상에 앉아 전 일정을 소화해 냈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아니할 수 있을꼬! 조마 조마 여리박빙의 나머지
다섯의 내심을 읽은 그의 존경할 만한 의연한 대처로 우리 일행은
금요일 새벽 부산 김해공항에서 가까스로 여행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진정 즐거운 마음으로
해단식을…아! 갈수록 여행은 힘들어 지는가 보다.
중국은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거리의 건물에 우리네보다
더 심하게 도배를 한 간판과 현판글씨들을 접하면서 지금
우리의 광고문화를 씁쓰레하게 떠 올렸고, 무질서한 교통문화를
눈쌀 찌푸리며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언제 생겨난 건지 자문해
보지만, 프랑스 빠리 세느 강변의 야경을 모방해 조성한
계림 양강사호의 모습이라든가 고층건물을 짓지 못하게 한 관광진흥의
마인드…그리고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80만 인구의 중소 도시가
갖춘 인프라를 보면 그네들의 노력과 비록 지금은 조악하나마
노력의 결과물들이 우리의 모습을 능가하는 것 같아 마음이 허하다.
여행은, 젊어서 하랬다. 그건, 단순히 위락과 소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견문을 넓히고 자극을 받음으로써 남은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을 전제로 한 경구일 테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교훈을
삼아 보면, 낯설고 먼 곳에서의 여행은 건강이 보장되지 않으면
큰 코를 다칠 것이고, 일행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쳐 여정을
불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경고일 수도 있어 더 더욱
젊어서 다녀야겠다 싶다. 가벼운 배탈이나 외상이야 여행의
양념일 수 있겠지만, 독감이나 심각한 부상인 경우에는 특단의
대처가 필요하고 과연 이방인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에
그 치명성이 있을 것이다. 해외여행은 애들 장난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건강이 있으면 시간과 돈이 없고, 시간 있어도
건강이 없다면 여행은 그림 속의 떡이라 이미 나이 들어 언제
어디서 고장 날지 모르는 우리 세대는 모쪼록 조심하고
대비하는 게 왕도다.
오늘 아침에 진료를 받은 의사는, ‘수술은 최후의 수단이고
함께 최악의 수단’이라고 했다. 3주전에 나를 진료한
다른 병원 정형외과 의사는 약물치료로는 가망이 없고 수술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했다. 두 의사의 단도직입과 우회의 개념상
상반된 진단에 대해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판별할 능력은 없다.
다만, 사람 몸은 기계와는 다르니 맹장염처럼 당장 처치하지
않을 경우 죽는 병이 아니라면, 살살 해 볼 수 있을 때까지는
해 보고, 써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 먹자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 건 인지상정 아닐까! 사람은 아프면 기가 죽고 우울해 진다.
하지만, 내 지금 심정은 평온하다. 아파서 당장 생활에 지장이
있는 삶도 아니고 아파서 당장 오늘 내일 하는 건 더욱 아니니
그저 고쳐 쓸 생각만 하면 되고 다행이 자동차로 30분이면
A/S센터에 갈 수 있으니 무어 걱정일까. 한가지, 몇 달 후면
내 직업이 베이비시터 보조가 될 터이니 그 때까진 고쳐 놔야..
오월엔 동유럽여행이다. 까짓거 덤빌 수 있을 때 덤벼 보는 거다.
일생 간 작은 아내도 어째 이 문제에 관한 한 간이 나보다 크다.
이 남편의 가슴팍이 아마도 그렇게 늘 좁았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