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8
안테나도 붙이지 않은 티볼리 라디오에서,
아침의 정갈함과 숙연함에 걸 맞는 기타음악이 잡음 없이
꽤 훌륭하게 흘러 나오고 있다. 아직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은 내 어두운 귀가 다시 깨어나고 있다. 피라미드처럼 세모지게
마감된 담벼락 위에서 망설이며 불안한 저울질을 하는 초보 밤손님인
듯 감기는 아직 완전히 내 담장을 넘어 오지 못하고 있으나, 나는
시답잖이 걸어둔 문고리로 인해 언제 털릴지 몰라 불안한
오두막처럼 떨고 있는 아침이다. 초코파이 크기의 자체 스피커가
모노로 붙어 있는 티볼리에다 딱히 용처가 정해지지 않아 이리 저리
굴러 다니다 두어 군데 상채기가 나 이미 고물이 된지 오랜
오디오엔진 A2 스피커를 이중볼륨이 가능하도록 붙였더니
그래도 소리가 좀 스케일이 커졌다. 그 앙증맞은 소리통이
당분간의 제리를 찾은 거다. 궁즉통이고 갈구하는 자에게
한 모금 물은 비할 수 없는 축복인 것을..미시의 세계에서도
재미는 있는 법 아니던가!
단지 그저 심심해서 혹은 순치된 무의식이나 습관의 작용이 아니라,
나름 그래도 뭔가 계획된 의도를 갖고 행한 요즘의 몇 가지
일 중에 기억해 둘만한 일은 내 방의 납작하고 새카만 42인치
텔레비전에 2.1스피커를 붙여준 일이다. 사람의 눈에 비치는
사물의 크기를 가늠하는 메커니즘의 요소에는 시야각이 있다.
여기에다 거리정보를 결합, 해석함으로써 뇌가 물체의 실제
크기를 유추한다. ‘유추한다’함은 인간의 지각이 늘 그러하듯
절대적이지 못하단 뜻이다. 골치 아프게 에둘러 말하지 말고
바로 가자. 아주 방안이 깜깜해 시야에 들어 오는 사물의 구분이
불가능하단 설정이라면, 영화관의 스크린 시야각을 내방
텔레비전과의 구조에서 구현할 때 서로 구분할 수 없단 얘기다.
이건 어설프나마 스스로 실험을 해 봐서 맞는 얘기고 물론 이 때
주 시야 주변의 비교물이 눈에 들어 오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텔레비전의 영상물이 주변 사물의 영향을 무시할
정도의 몰입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고 이런 경우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훈련여하에 따라 상시적으로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단 것이다.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일이니 ‘이 걸 뭐 훈련까지’라고 부담스러워 하지 말자.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걸 뭐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나?’
하고 의문을 갖지는 더더욱 말자. 이렇듯 별로 설득력 없고
부질없어 뵈는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 오른 이유는, 내가 120인치
전동스크린에 걸 맞는 공간이나 A/V system과 같은 호사를
누릴 형편이 못 되는 빈자들 중에서 제일 실없고 싱거운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시간 많은 백수의 머릿속은 거의 언제나
잡다한 비현실적 몽상으로 가득하고 때로는 이게 위로의
칵테일바가 되기도 하니까^^
!
문제는, 영상물을 현실감있게 즐기기 위하여는 하나의
요소가 더 필요한 데 이름하여 ‘효과음향’이 아니던가! 내장
스피커의 소리가 주로 말소리 중심의 중고음에 맞추어져
튜닝되다 보니 대포소리는 깡통 차는 소리에 다름 아니고
육중한 트럭의 엔진음이 동네 중국식당 배달스쿠터의 배기음에도
못 미치니, 화면은 저 멀리 지평선 위에 있는 것 같고 소리는
날림으로 지은 공동주택의 옆 집 생활소음 들리는 수준이라
이것이 바로 얄팍한 지갑에 예매하고 나들이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고도 굳이 우리들이 영화관을 찾는 이유라고 하겠다.
문화적 행위에 대해 효율을 따지는 일 만큼 한심하고 몰이해한
관점도 없겠지만, 사유와 행위의 제한 범위가 많이 확장된
사회에 사는 백수의 내심은 침해할 수도 없고 침해해서도
안 되는 성역으로서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빈자들은 다들 모여 나를 따를지어다!!
2.1채널 PC용 스피커를 고르기 위해 인터넷을 사흘 뒤졌다.
텔레비전이 검은 색이라 색조의 통일도 염두에 두어 가면서,
가격대는 50만원을 넘지 않는 놈으로 추려도 꽤 많은 물건이
검색리스트에 오른다. 하나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마누라와 나는 참 성격이 다르다. 34년전 나와 가연을 맺은 건
그 이전 1년6개월간의 저울질 기간이 있어 가능했던가?!
그녀는 물건을 하나 사도 사흘 나흘을 고민할 뿐 좀처럼 결정을
못 하는 정도를 넘어 배송받고 반품도 일쑤다. 그럼에도
각 홈쇼핑의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을 걸 보면 값나가는
물건을 별로 주문하지 않은 탓일 테지. 반면 함께 사는 나는
물건을 고르며 애면글면하는 게 골치 아프다. 직장에 다니면서
일을 볼 때는 그래도 동료들로부터 용의주도하다는 평을
듣곤 했었는데, 일생 물건 고르는 일만은 그리 꼼꼼하지
못했고 잦은 후회로 가슴을 칠 때가 많았던 건 자기합리화에
능한 심리의 인물이라서가 아닐까하고 스스로 자문해 본다.
아무튼, 심사숙고 없이 선택되고, 벌써 사흘째 정이 들어
이제는 내 물건이 되어 버린 물건은 로**에서 나온 2.1채널
스피커다. 예전 첫날밤에 그녀 옷 벗기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박스를 벗긴다. 초로의 지금도 이점은 신기하다.
텔레비전세트의 내장 스피커와 외부 스피커를 함께 울리면
연결방법에 따라time lag이 발생하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
그렇다고 외장으로만 울리면 5.1채널시스템에 있어서의
센터스피커 기능이 빠져 약간 가운데가 비고 소리의 알맹이가
없지 않나. 손바닥을 턱에 괴고 TV주위를 빙빙 돌다 패널 후면의
많은, 돋보기를 끼지 않으면 존재조차 잘 구별해 낼 수 없을
구멍들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참고로 나의 경우
SK broadband Cable channel을 이용하고 있어 셋탑박스의
아날로그 출력과 광출력 두 계통을 모두 연결해 보았는데 앞서
말한 시차문제와는 별도로, 아날로그 출력은 음질이 떨어지고
광출력은 채널에 따라 굉음만 나오는 경우가 있어 컨버터의
입력포맷을 조정해 봐도 해결이 안 되는 예가 있다.
그러다 패널 후면 광출력이 퍼뜩 눈에 들어 왔다. 유사 이래
수많은 발견 발명의 태반은 우연의 소산이라던가? 구멍이
있으면 찔러 보는 게 유아들의 행태를 보면 꼭 남자만의 본능은 아니고
아마 인간에게 부여된 공통의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으로 추정되는데, 나름 호사가로서의 기질을
다분히 타고 난 내가 이를 간과할 리가 없다. 굴러다니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구석이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던
노란 색 싸구려 광케이블 하나를 집어다 이었다.
오디오쟁이라면 잘 알다시피, 박스개봉의 물건은 에이징
타임이 필요하다. 특히 스피커는 음량에서부터 감이 오는데,
전기를 넣어 소리가 터지려면 적어도 수 시간이 필요하므로-
메이커에 따라 수개월을 요구하는 비상식의 경우도 들리는데
나로서는 약간의 사기성이 함축된 게 아닌가 하지만-커피
한 잔을 타와 느긋한 기분으로 가죽의자에게 back-hug해
주기를 요청하고 앉았다.
Catch-on HD채널은 중간 광고가 없어 매우 좋아하는
영화채널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로 재탕 삼탕이
심해 새 영화를 한편 얻어 걸치는 데 행운이 필요하지만,
살다 보면 영화 한 편의 중도에 출타해야 할 일도 생기고 하니,
다음에 또 보충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생각하면 이점이기도
하다. 물론, video-on-demand가 아니어서 볼 때 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 금상첨화다. 미디어의 음향이나 영상의
질은 따질 일이 없고 화면은 응축된 full HD 텔레비전의 특성상
영화관에서의 느낌보다 낫다. 앞에서 말한 시야각의 문제를
감안하고서 본다면…
마침 방영하고 있던 게, HD로 리마스터링된 ‘sound of music’이다.
뭔 영환지 설명은 말자. 우르릉 꽝꽝에 가까운 음향은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하는 종반부 탈출 장면에 나오는
독일치아 군 차량의 엔진음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영화다.
그 소리가 어떤 소린지에 대한 설명도 참으로 사족이다.
39년 경에 유럽 땅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내 숭앙하는
모짜르트 선생의 고향-의 야밤에 한적한 도로를,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없어 모르겠지만 아마 폭스바겐 비틀의 무개차
버젼이 아닐까 하는 새까만 차량이 전속력으로 달릴 경우 -
한 쪽은 도주이고 한 쪽은 추적이니-날 수 있는 굉음이
내 방에서 울려 퍼졌다. 밥도 첫 술이 맛있고, 사랑도 첫사랑이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내 고막을 울린 예의 2.1채널
PC스피커는 경악에 가까운 충격과 함께 기존 2만원 짜리
새끼 소리통을 축출하였을 뿐 아니라 오늘 아침 이 시간까지도
주인의 기분을 흐뭇하게 만들어 주어 곧 있을 출타에 힘을 보태고
있다. 돈은 31만원이 들었다.
그 정도는 우습던 시절이 나도 있었다. 일진광풍에 푸른
빛 검이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공간을 쪼개듯 카드 꺼내 호기부리던
시절이 엊그젠데..사람이 참 쪼잔하게 변했다^^. 고스톱을
쳐보면 대미지의 차이가 있을 뿐 ‘점백’이나 ‘점천’이나 시간가는
건 같다. 310만원짜리 스피커라 내 귀를 완전히 채워줄 수
있으랴만, 간이 작아지니 작은 것에도 기쁨은 반비례로 커진다.
나는, 은둔자에 불과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당혹스러우나 하찮은 진실을 외칠 숲이래야
여기 말고 아무데도 없다. 뭔가 세상에 대해 별 의미 없는 손가락
꼼지락거림이라 하더라도 그나마 움직이고 있으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생각하는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했지만, 나는 꼼지락거리고
있으므로 존재한다. 쩨쩨하게 31만원짜리 소리통 세트 하날 가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