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29
어제는 정형외과 병원에서 주치의가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찔러 댄
주사바늘 때문에 한동안 욱신거리는 어깨로 성가신 오후 반나절을
보냈다. 2주 약을 먹고 담배씨 만큼 좋아져가는 듯 싶은 어깨는 세월이
약일 듯 하고, 일상생활에 그리 큰 지장은 없으니 그럭저럭 참고
견뎌내는 중이다. 그나마, 소화장애와 구토감을 유발하던 내복약을
중지하고 패치로 전환해 준 의사가 고맙다. 아침 저녁으로 알약을
삼키는 일만 하지 않아도 그저 행복하다. 불편하고 아픈 어깨가 뭔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들을 해 냄에 있어 장애가 될 법 한 요즘인데도
내게는 사건들이 있었다.
4월, 작년의 서유럽여행에 나름 감명을 받았던 아내의 강권으로
이번엔 동유럽 여행을 가기로 해 예약을 했고, 일기가 불순하여
바깥 운동을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 런닝머신(트레드밀)이 한 대가
어제 ‘다시’ 들어와 거실 남쪽 창가에 버티고 섰으며, 숙면을
위한답시고 한 2년 취침 시 각방을 쓰다 ‘문제없는’ 부부의
생활패턴으로는 부적절하다는 ‘나’의 판단 하에, 못마땅한
내심을 감추지 않는 내자를 윽박질러 그녀가 자던 방 안의 멀쩡한
돌침대를 내치고 슈퍼 싱글 침대 둘을 1.2미터의 이격을 두고 배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10년 동안 작은 애의 공부방 겸 거처로 있던
송도 오피스텔별장은 등기부에 간단한 흔적을 남기고 남의 물건이 됐고,
해서, 우리 둘을 제외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영향도 기여도 없는
그저 그런 일들이 내 일상을 바쁘게 몰아친 한 달이다. 내 수준에서
멋진 오디오 풀 세트를 꾸려 낼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전자적 신호전송
몇 번으로 허공에 흩어졌다. 한정된 재화의 배분 순서가 세월 탓에
바뀐 거지만 한동안 오디오쟁이를 자처했던 내게 있어, 과거 돈이
물건으로 치환됨에 정서적 등가성이 생기는 건, 침대나 트레드밀
따위가 아니었다.
며칠 째 날이 차갑다. 나가 보면 겨우 내내 비스듬했던 햇살은
곧추 서서 망설임 없이 아래로 화살을 내리 꽂아 땅을 달굴 준비를
슬슬 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겨울은 닫힌 문지방에 낀 치맛자락처럼
쉬 빠져 나가지 못하고 사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그래서, 3월을 묘한 부조화의 계절이다. 친구들이 SNS로
전해 오는 봄소식은 매화꽃 봉오리가 대표적인데 세월이 가면
통신수단으로 향기도 전할 수 있으려나.
지난 토요일 정모엔 그래도 모처럼 열명이 넘게 모였다.
김희경원장의 28층 penthouse는 저층에 사는 내게 오래 전
부산 촌놈의 눈을 현혹하던 서울 노량진 63빌딩 전망대를
상기시켰고, 거기나 여기나 100미터가 가까운 수직타워 위에서
내려다 본 아래 세상은 과연 시멘트 더미에 다름 아니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저 밑 지면에 따개비처럼 붙어 회빛으로
착색된 자잘한 조각들의 희미한 경계를 지우고 인공이 빛이
사방 시선 끝까지 가득 차게 되면서 그 삭막함과 건조함은
잠시나마 자취를 감추었다. 스트라디바리 오마쥬와 180인치
스크린에 비치는 입체영상의 선명하고 과장되다 싶은 현실감..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익히 알고 경험하는 세상의 물건들이지만,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데에는 도리가 없다. 색 즉 공..이나 우리는
부나비 같은 존재인 걸..
3미터 넘는 전동스크린을 28층까지 계단 걸어 옮겨 온 김원장의
정열은 놀랍다. 타인들의 조력 없이 연약한 제수씨와의
단독 작업이었단 데 아연했고, 비슷한 물건으로 예행연습까지
치렀단 말에는 경악했다. 그는 호사가다!
전원케이블에 대해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예의 그 논쟁이 한참
불을 뿜었다. 부지불식간에 시간을 보내는 데는 이만한 item도
드물다^^ 논쟁의 좋은 먹거리와 서식지는 논점의 애매함,
측정가능성의 모호함이다. 귀라는 단말기는 뇌라는 해석메커니즘과
결합해서 애매모호함을 낳고, 끝없는 꼬리물기가 UFC의
케이지처럼 흥미진진하다. 우리 모임도 14년 째다. 사람만 늙는 게
아니라 모임도 늙는다. 구성원의 평균연령이 높아진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모임이라는 무형의 존재도 활기는 사라지고 탄력은
죽어 스스로 늙어 간다. 무언가 답 없는 질문에 매몰된 까닭은 아닐까?
14년을 이어 온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는 건 아닐까? 나이가 들면
세상 보는 눈의 폭이 넓어진다 믿어 왔다. 구덩이 깊게 파는
집중력은 세월이 거두어 가지만, 그 대신 광각렌즈 하나를 선물
받는 게 인생이다. 앞으로 10년의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트레드밀에서 첫 45분을 걷는다. 간간이 비스듬히 위치한 TV에
눈을 박아 가며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는데15분이 지나니
몸에 땀이 촉촉히 밴다. 오른 쪽으로는20미터 아내 아파트 뜰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비록 쌀쌀할 테지만 한 꺼풀 유리 사이를 두고
보는 바깥 세상은 춘색이 완연하다. 저 아래 벚나무에 화사한
벚꽃이 만개할 날도 머지 않았다. 나중, 걷는 게..걸을 수 있다는 게
삶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행위가 되는 날도 이윽고 올 테다.
걸으면 주변사물이 뒤로 밀려 가는 게 과거 인류의 경험일 텐데
사람이 다람쥐 쳇바퀴를 만들 때 트레드밀이 고안되리라고
상상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걸으며 상대적으로 정지하고 있는
기계를 만들어 낸 사실은 참 재미있다. 도심에서 산책길을 찾아
내는 일은 어렵다. 공해물질과 소음, 수없이 도사린 자잘한
위험들로 인해 이삼십 분을 차분히 걸어 낼 코스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걷기 위해 시골로 이사 가는 일도 용기와
각오 없이는 이룰 수 없다. 극복할 수만 있다면 트레드밀은
아주 좋은 도구인데 문제는 따분함이다.
점심은 장어구이다. 요즘은 텔레비전 먹방이 인기라는데
장어는 엊저녁 방송의 영향이다.나 보단 아내가 즐기는 음식이고,
먹어 무슨 힘쓸 일 있을까 보냐 하는 심정이지만, 햇볕이
너무 좋아 걸어 갔다 오는 한낮의 활기나 만끽해 보자! 내 맘보다는
늦게 오는 봄이지만, 아직 완전히 떨어 지지 않은 감기에도 좋지 않을까!
쓰고 보니 망설이는 봄처럼 아직은 풋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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