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30
여덟 시에, 얼마전에 견주면 그나마 꽤 산뜻한 느낌으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며칠 전 구입한 순백에 가까운 트윈 베드와 화장대로 새로 꾸민 침실이
화사하고 따스한 느낌을 주어 아침에 일어나는 기분도 상쾌하다. 감각기관의
간사함이란! 해독주스 한잔의 간소한 아침식사지만 설거지할 식기가 적지 않은데
싱크대 건조기가 고장 나 물이 배수되지 않는 바람에 그 짬에 책상 앞에 앉았고
그런 김에 몇 자 두들길 염이 생겼다. 마침 봄을 재촉하며 내리는 비 때문에
어둑한 방안의 분위기도 그렇고..당연히 내 애호해 마지않는 모니터30 스피커에선
차분하고 맑은 라디오방송의 음악소리가 어릴 적 추억의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촉촉하고 울림이 있다. 보통 아침의 방송음악은 티볼리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소박한 포맷으로 들어 왔는데, 그으예 그 물건도 작은 딸 아이가
저희 집으로
집어 가 버렸다. 저희네 집에 딱!이라나 어쩌나..
돌이켜 보면, 40년 세월 음악을 참 많이도 들었던 것 같은데 찬찬히 곰 씹으니
이처럼 건성건성 해 치운 일도 없는 듯하다. 방송에 나오는 거의 모든
고전음악 악곡 중에 안면 없는 곡은 거의 없는데 요즘은 태반이 곡목도 작곡자도
생각나지 않는다. 몇 곡을 제외하고 나면 첨부터 끝까지 멜로디와 화음의
진행을 제대로 기억하는 경우는 더욱 없다. 사람 사귐으로 치면 악수하고
명함 주고 받은 후 함께 점심 식사까진 했는데, 얼마 후 길거리에서 마주치니
알쏭달쏭한 거와 닮았다고나 할까. 2014년 현재 내 방에서 울리는 재생음악의
질은, ‘음악을 음악답게’ 라는 기준에서 보면 훌륭하다 못해 과분하기까지 하다.
퇴화된 내 귀가 들어 내지 못할 영역까지 고역이 뻗어 명료하다 못해 지나치게
세밀한 부분까지 들이밀어 오히려 불필요한 잡소리마저 과장되어 밸런스를
깨 먹는 상황이고, 중역대의 밀도감이나 현실의 악기라면 딱 그만큼이라 할
정도의 탄탄한 저역대가 훌륭한 밸런스를 이룬다. 공간 측면에서 유닛의
중심축 기준으로 뒷벽에서130센티, 옆벽에서 100센티 떨어져 놓이고
약 40도의 안쪽 토인을 준 스피커는 5평 좁은 방이나마 스피커 사이 정 중앙
약간 후방에 핀포인트의 음장을 형성하고 청취위치가 바뀌어도 그 초점이
움직이지 않는다. 음악 한 곡을 들어 내는 데 있어 기계에 관한 한 더 이상
불평 불만을 할 시대가 아니다. 도대체 뭘 얼마나 더 손을 봐야 만족한단 말인가?!
다섯 평 콧구멍만한 공간에 필요한 소리란 얼마나 커야 할 것이며 60십줄
초로가 음악 한 곡 듣는 데 해상력이 얼마나 더 필요할까. 내겐 지난 시절
적지 않은 실연감상의 기억과 대조하여 모자라지 않으니 그 나머지는
과유불급이요 개발에 편자이며 사족이다.
그래서, 눈을 돌려 이제는 음악이다.
내방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날로그, 디지털 음원만 해도 1만 수천일 뿐
아니라 각종 채널에서 쏟아지는 복합 컨텐츠의 양은 잴 수도 모아 둘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나고 그 품질 또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세상이 도래해
들어도 들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언제까지나 소리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어야 할까. 밥상 위에 산해 진미가 그득한데 언제까지 밥알의 형상이나
챙기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말이다. 악기를 다루고 악보를 읽고 음악사를
이해하고 음악가의 삶을 공감해 보는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한 게 사람의
일상이 아니던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삶의 이치이고 감성에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음악의 감칠 맛 조차 이해가 깊어지면 더욱 커 지는 게 진실이다. 스코어를
앞에 놓고 가상의 지휘자가 되어 악곡의 흐름을 좇아 여행을 떠나고 악기를
울려 소리를 내면서 작곡자의 의도를 간파해 보는 일은 적어도 오늘날 재생장치의
평균적 품위를 감안한다면 케이블 하나에 불만이고 받침대 하나에 못마땅해
하는 일보단 짧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30년 전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내겐 다행히도 오늘이 2014년에 속한 어느 하루니까.
취미의 영역에는 ‘천착(穿鑿)’이란 요소가 필요하다. 좁은 테두리의 세계에
시간을 투입하다 보면 자연히 깊이 파고 들 수 밖에 없게 되고 고고학처럼
부스러기 하나 파편 한 쪽에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데
이럴 때 경계해야 할 일은 균형감각이다. 의문이 생긴 어느 한 현상에
골몰하다 보면 이게 필요 이상으로 커 보이고 이윽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모든 것’이 되어 버린다. 지난 시절 내가 그래
왔으니까! 미망에서 깨는 시점은 이를수록 좋다. 중계하는 텔레비전의 해상도를
따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스포츠 생동감은 경기 현장이 최고일 테다.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지금 내 방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KBS classic
FM의 소리는 더 이상 왈가왈부의 대상이 아니다. 더 좋은 소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이걸로 충분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다가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가 되고 마지막에는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이 된다던가?! 빗방울이 비스듬히 부딪히며 굴러 떨어지는
격자무늬 창가에 앉아 왼쪽 귀를 소리 나는 쪽으로 기울여 가며 커피 한잔을
마주 하고 있다.
한 달 가량, 가벼운 감기와 어깨 통증을 핑계로 거의 움직이지 않다가
요 며칠 새로 들인 트레드밀-트레드밀에 관한 좋지 않은 기억은 누구나 다
하나씩 가지고 있을 테다- 에 올라 걷고 어젠 두어 시간 낙동강을 따라
페달을 밟았더니 인간의 심신은 약간의 텐션이 필요하다는 게 진리이듯
몸이 한결 가뿐해 졌다. 적당한 기온에 화창한 햇볕은 지평선이 거의 없는
우리네 환경에선 드물게 보는 낙동강의 하류의 열린 공간에 손을 뻗으면
움켜 쥘 수 있을 듯한 질감의 싱그럽고 달콤한 공기로 가득 차 바이크
애호가들의 천국이었는데, 돌아 오는 길에 달포 가량 휴식을 가졌던 탓으로
약간 불편을 유발한 안장통 말고는 참으로 즐거운 라이딩이었다. 자전거도
이젠 일년에 가까워 오래 된 옷에 덧댄 가죽처럼 따로 놀던 쇳덩이가
몸에 착 붙게 되니, 업그레이드의 지름신이 스멀거리며 곁에 다가 오는 듯 하나
오랜 시간 헛된 꿈을 좇아 방황하던 ‘오디오’란 취미는 시간과 노력과 돈을
희생한 대가로 내게 지혜를 주었고 이것이 앞으로 내 여생에 도로(헛수고)를
회피하게 하는 유용한 보호막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딱 한가지 걱정스러운 건 내 귀가 아주 얇은 팔랑귀라, 이를 가만두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유혹의 함정으로 이끌 몇몇 고약한 아우들의 술책을 어찌 피해
나가느냐 하는 점인데, 경제적 무능력은 때로 미망을 벗어나게 하는 훌륭한
조건이 되지 않을까? 부지런히 기름치고 닦고 조이고 갈면 싫증이 날 때 까지
써 먹을 수
있으리라.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 한잔 그리고 이런 저런 기억에 남지 않을 자질구레한
동작들의 결과로 벌써 열한 시에 가깝다. 라디오에선 베토벤 선생의 9번
심포니 4악장이 흘러 나오고 있다. 경외해 마지 않는 곡이다. 소름이 돋는다.
차근 차근 쌓아 올린 견고한 붉은 벽돌집처럼, 혹은 현란한 장식이 없으나 견고히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을 연상한다.
고딕이 아니다. 뾰족하지 않고 뭉툭한데 폐부를 묵직하게 찔러 온다.
악곡이 소리를 압도하는…
방금, 뜻하지 않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친구로부터 점심초대를 받았다.
아직 나는 완전한 외톨이는 아닌가 보다. 문 밖의 노크가 반갑지 않은
은둔자처럼 나는 점차 스스로 그렇게 갇혀 가고 있는 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