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 루이자 밀러
Verdi : Luisa Miller

1996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제임스 레바인 25주년 기념 갈라 콘서트에 카를로 베르곤치가 등장했다. 그는 1924년생으로서 이탈리아 벨칸토를 대표하는 최고의 테너로 일컬어지는 오페라계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다. 스핀토적인 성격보다는 레지에로적인 성격을 추구하며 귀족적인 풍모와 당당한 카리스마 서정적인 미성을 발산했던 그는 당시 72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노쇠하지 않은 성대와 발성을 갖고 있었다.

황금색 커튼이 쳐진 무대 앞으로 나온 그는 전성기 시절 자신이 가장 잘 불렀던 아리아 한 곡을 부른다. 워낙 높은 음들이 등장하는 아리아라 조금 힘겨운 모습이 비치기도 하지만, 거의 정확하게 소화해내며 주인공의 절절한 마음을 절제된 어조로, 그러나 통렬하게 표현한다. 마지막 음이 끝난 뒤 베르곤치는 눈을 감아버렸고 청중은 음악보다도 감동적인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전성기 시절의 영광을 회상하는 듯 한참을 눈을 감았던 그는 이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후의 영광을 누린 뒤 총총걸음으로 퇴장한다. 그 때 부른 곡이 바로 베르디 루이자 밀러에 등장하는 아리아 ‘어느 고요한 밤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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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열 네 번째 오페라 루이자 밀러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간계와 사랑]을 토대로 작곡한 것이다. 평소 쉴러의 작품을 사랑했던 작곡가는 그의 희곡을 바탕으로 총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이 루이자 밀러도 그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도 독일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젊은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무대 또한 오스트리아의 전원도시인 티롤지방이라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분이 높은 귀족의 아들 로돌포와 시민계급에 속하는 퇴역군인의 딸 루이자는 서로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고, 여기에 여주인공을 차지하려는 부름과 영주인 로돌포의 아버지의 교활한 방해가 섞여 남녀 주인공이 모두 음독자살을 맞이한다는 비극이다. 이는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18세기에 유행하던 '시민비극'이라는 문학장르에 속하는 것으로서, 부패한 귀족계급이 도덕적이고 선량한 시민계급의 삶에 끼어듦으로써 일어나는 비극을 극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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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러의 이러한 정신에 깊이 동화한 30대 중반의 베르디는 이 루이자 밀러를 작곡하면서 대단히 발전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담아냈다. 특히 베르디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말할 수 있는 부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아 리골레토의 원형을 실험했고, 부자사이의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에 있어서 돈 카를로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부름이라는 간악한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 있어서 오텔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음악적으로는 일 트로바토레를 연상시킬 정도로 드라마틱한 구조를 완성한 동시에 도니제티와 같은 선배 작곡가들의 성악 테크닉과 양식을 계승발전시킨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편지로 인한 오해와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 카바티나-카발레타의 옛양식이 등장하여 고전적인 측면이 강조된 작품이지만, 계급갈등과 현실비판적인 측면이 가미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진보적인 측면 또한 갖고 있다.

여기 소개할 영상물은 스웨덴 제3의 도시로 일컬어지는 말뫼에 위치하고 있는 말뫼 오페라 하우스의 2012년 실황을 담고 있다. 1944년에 완공된 이 오페라 하우스는 1500석 규모의 오페라 하우스로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오페라 하우스로 손꼽힌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페라 하우스지만 최근 괄목할 만한 프로덕션이 자주 올라오며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잡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마침 ArtHaus 레이블에서 이렇게 영상물이 발매되어 애호가들의 입장에서 반갑기가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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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스테파노 비지올리의 무대는 티롤 지방의 전원색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잔디밭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여기에 운명의 손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이 무대를 떠받치고 있게끔 디자인해 언젠가 저 손이 무대에 변형을 가할 것임을 예견한다. 이 거대한 손은 이후 비극으로 치닫는 3막에 접어들어 박스형의 루이자의 집을 찌그러트리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운명이 이 밀러 가족을 위협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자연친화적이고 미니멀리즘적인 간결한 무대지만, 바로 이 거대한 손을 통해 오페라 전체의 내용을 적절하게 암시하는 효과적인 오브제로 사용되었다. 한국 오페라 무대에서 루이자 밀러를 무대에 올릴 때 이렇게 모던하고 압축적이며 상징적인, 동시에 연극적으로도 완벽한 말뫼 프로덕션을 꼭 사용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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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쉬의 원추뿔형 초콜렛을 연상시키는 듯한 삼각편대형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 피트와 레코딩 부스, 무대 뒤편의 분주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첫 서곡이 연주된다. 지휘자 미카엘 귀틀러는 치밀한 앙상블과 정교한 드라마틱을 바탕으로 서정적인 부분과 극적인 부분을 효율적으로 강조하고, 중창이나 합창이 가세할 경우에도 오케스트라의 분명한 진행을 견지한다. 이를 바탕으로 귀틀러는 성악가에게 전적으로 템포를 맞추어주기보다는 베르디 비극으로서의 엄격한 구조와 진행을 긴박하게 전개한다. 자칫 전원극으로서의 이미지로 인해 비극으로서의 긴장감이 약화될 수 있는 이 루이자 밀러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훌륭한 지휘다.

한편 성악가들 또한 훌륭하다. 비록 작년에 발매된 Tutto Verdi 시리즈의 파르마 극장 실황에 등장한 알바레제-체돌린스-누치와 같은 황금의 트리오는 없지만, 2군 성악가들로도 얼마나 극을 알차고 감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우선 루이자역을 맡은 러시아 소프라노 올레사 골로브네바의 미모와 연기력, 가창 모두가 압권이다. 빈 슈타츠오퍼를 거쳐 쾰른 오퍼와 드레스덴 슈타츠오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말뫼 오페라 하우스에도 정기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탁월한 연기로 루이자의 소박한 성격과 아버지를 향한 부성, 부정한 운명에 울부짖는 통렬함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특히 2막에서 거짓 편지를 쓰며 통곡을 하는 연기는 극적인 몰입도를 높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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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돌포역의 뤽 로버트는 미성과 표현력을 갖춘 테너로서 고른 기량을 보여주는데, 전반적으로 이전의 명테너들이 보여주었던 주인공으로서의 격정적인 한 방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느 고요한 밤에’는 매우 안정되고 세련된 가창을 들려주고, 이에 곁들여진 연기가 일품이다. 한편 리골레토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버지 밀러역을 맡은 바리톤 블라디슬라프 술림스키는 부드러움과 격정적인 모습의 번복을 잘 소화하며 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발터 백작역의 타라스 슈톤다의 악의 화신과 같은 연기와 루이자의 연적인 페데리카역의 이본느 푹스의 당당하면서도 질투심에 타오르는 연기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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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무대 모두에 있어서 3막의 드라마틱한 부분도 훌륭하지만, 전체적으로 2막의 다채로운 진행이 대단히 훌륭하다. 특히 페데리카 앞에서 루이자가 거짓증언을 하는 2막의 4중창이 특히 훌륭하다. 무반주로 진행되는 이 4중창에서 루이자 홀로 격정적인 솔로를 노래부르고 이에 나머지 세 명이 그녀와 반대편에서 그로테스크한 화음을 넣는 모습은 연출가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함과 동시에 성악가들의 정교한 앙상블이 청자의 마음을 잡아끈다. 한편 루이자의 집과 바깥 무대로 이어지는 안과 밖의 일체감 높은 동선은 합창단의 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설계되었고, 마지막 두 주인공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연출 또한 너무 ‘로미오와 줄리엣’스럽지 않아 작품의 의도를 부각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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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중심적인 사고가 곳곳에 담겨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티롤 지방의 자연과 비극적인 결말의 대비, 현대적인 상징과 절제된 미장센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는 등등의 훌륭한 연출과 성악진의 탁월한 연기가 조화를 이룬, 오페라 루이자 밀러의 연극적인 측면의 가치와 이를 의도한 베르디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상해야 할 영상물로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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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di : Luisa Miller
노래 : Vladislav Sulimsky
노래 : Olesya Golovneva
지휘 : Michael Guttler
오케스트라 : Malmo Opera Orchestra
Sound Formats: PCM Stereo, DD 5.1
Picture Format: 16:9
DVD Format: DVD 9 / NTSC
Subtitle Languages: IT (Original Language), DE, GB, FR, Korean
Running Time: 152 mins


베르디 : 루이자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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