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파일을 위한 명반 - 4


비싸고 불편해서

중년 남성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람들이 근사한 오디오 시스템 앞에 서있다. 둘 다 머리가 벗겨진 모습이 그 나이를 짐작게 한다.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한 명은 팔짱을 끼고 뭔가 말하고 있는 듯하고 나머지 한 명은 주머니에 가볍게 손을 찔러 넣고 있다. 아마도 미국의 주간잡지 뉴요커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한 장의 삽화가 내게 주는 인사이트는 꽤 신선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The two things that really drew me to vinyl were the expense and the inconvenience.”

생각해 보면 엘피에 끌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비싸고 불편해서였다. 예전에 턴테이블 리뷰를 쓰면서 서두에 유사한 주제로 글을 썼던 일이 퍼뜩 생각났다. 역시 느끼는 건 제각각이어도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사실 타이달, 코부즈 같은 고음질 음원 서비스를 애용하고 이젠 애플뮤직, 스포티파이까지 고음질 음원을 도입한다고 하는 마당에 엘피로 빼곡히 채운 오디오 랙이나 디지털 기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일러스트 속의 시스템은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들어가는 돈에 관한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음악에 대한 몰입도는 종종 편의성과 반비례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스트리밍에 비하면 수십 배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엘피를 모으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엔 한동안 내 시스템에 공석이었던 시디피를 구입한 이후부터 절판된 시디를 수집하고 있다. 아니, 반대로 시디를 들어야 하다 보니 시디피를 다시 구입한 것.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선 찾기 어렵고 있어도 음질이 열악한 가요 혹은 고음질 음반들이다. 불편함을 따지자면 엘피보단 덜하지만 음반을 넣을 때의 적당한 긴장감과 물리적 움직임에 따른 약간의 불편은 음악에 대한 집중 상승에 대한 대가치고는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선 음원이 아닌 음반, 즉 피지컬 매체를 통해 최근 즐겼던 음악 중 가슴에 남는 음반들을 무작위로 소개하기로 했다. 그냥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은 것이 아니라 시디와 SACD, 엘피 등을 통해 듣는 음악은 동일한 음악, 동일한 음질이라고 해도 또 다르게 다가온다.


1. 저스틴 피어스
〈바흐 : 무반주 첼로 모음곡〉

바흐란 음악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듯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어떤 이는 음악을 넘어 진실을 쫓는 일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만큼 바흐 음악의 심연은 깊고 아름답다. 그중〈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어떤 음악가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곡으로 첼로는 물론 기타,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로 연주되고 있다.

파블로 카잘스로부터 시작된 이 곡의 발굴과 지속되는 새로운 해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필자도 새로운 연주가 나오면 대부분 들어보곤 하는데 최근 놀라운 음반 하나가 출시되었다. 다름 아닌 영국 런던에 소재한 고음질 전문 레이블 ‘체이싱 더 드래곤’에서 발표한 앨범이다. 연주자는 저스틴 피어슨이라는 사람으로 영국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리고 신포니아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또는 객원으로 첼로를 연주해온 인물이다.

녹음은 2019년에 시작해 작년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을 경유하면서 끊긴 후 다시 이어 녹음해 전곡을 완성해냈다. 최초 런던의 템플 교회에서 전곡을 녹음할 계획이었다가 사용이 금지된 이후 켄트 세인트 보톨프 교회로 자리를 옮겨 완성을 본 것. 노이만 더미헤드 마이크 두 대와 Flea/AKG 등의 마이크로 녹음하고 소니 릴 레코더로 녹음해 제작한 엘피는 현장의 앰비언스를 대단히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프란체스코 루게이리 첼로의 단아한 음질과 음악적 표정은 이 곡의 감동을 극대화하고 있다.


2. VA
〈Audiophile Analog Collection Vol.1 & 2〉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증가한 아날로그 마니아들은 이젠 궁극의 아날로그 사운드를 담은 릴테잎까지 그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몇 년간 하이엔드 오디오 쇼에서도 여러 브랜드들의 부스에서 소스기기로 릴덱을 세팅해놓고 시연해 주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디지털 사운드에 식상한 오디오파일들이 아날로그 황금기 시절의 아날로그 마스터 사운드를 듣고 싶어 하면서 생긴 진풍경이다.

그래서 몇몇 음반사들이 릴 테잎을 새롭게 제작해 출시하고 있는 모습도 종종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2xHD다. 존 레논과의 레코딩 작업으로 유명세를 얻었던 앙드레 페리 그리고 나그라 USA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여러 과외 활동을 벌이고 있는 르네 라플람이 이 레이블의 주인. 최근엔 릴 테잎 외에도 엘피를 출시하기 시작했는데 그 엑기스를 모은 컴필레이션의 사운드가 무척 훌륭하다.

지금까지 이들이 발매한 컴필레이션은 총 두 타이틀.이라는 심플한 제목으로 두 장을 출시했다. 모두 나그라 IV-S 또는 NagraT 등을 통해 녹음한 음원으로 퓨어 아날로그 사운드의 진수를 보여준다. 레퍼토리도 다양해 핑크 팬더부터 바흐의 토카타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담고 있다. 때론 초저역으로 내려가는 오르간 등 넓은 대역폭과 다이내믹레인지를 담아 엘피 사운드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3. 안야 레흐너 & 파블로 마르케스
〈Die Nacht〉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는 그가 병환으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작곡한 곳이다. 와중에 작곡한 이 곡은 사실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를 위해 작곡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세월 속으로 잊혔다가 다시 부활해 사랑받고 있다. 마치 비올라 다 감바와 유사한 디자인과 소리를 가졌지만 특유의 음색적 매력이 충분했고 이후엔 기타, 바이올린 등으로 연주되곤 했다.

워낙 많은 연주자들이 녹음한 곡인데 약 3년여 전 두 개의 서로 다른 앨범이 발매되었다. 하나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미그달과 기타리스트 야콥 켈러만이 협연해 BIS에서 발매된 앨범. 그리고 또 하나는 첼리스트 안야 레흐너와 기타리스트 파블로 마르케스의 협연을 담아 ECM에서 발매한 앨범이다. 둘 다 기타를 포함하고 있지만 하나는 바이올린, 또 하나는 첼로가 협주하고 있다는 차이를 보인다.

내게 단 하나만 고르라면 후자다. 발매된 지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들어본 안야 레흐너와 파블로 마르케스의 협연은 앨범 제목처럼 밤 그리고 꿈을 그리고 있는 듯 조용하고 편안한 어느 밤의 정경을 연상시킨다. 이 외에도〈밤과 꿈〉,〈거리의 악사〉그리고 부르크뮐러의〈3개의 녹턴〉등 밤의 고요함 위로 잔물결이 넘실대는 느낌. 마치 꿈결을 걷고 있는 듯 감각적이며 회화적인 음악으로 가득하다.


4. 그레고리오 파니아구아/아트리움 무지카에 드 마드리드
〈La Spagna〉

그레고리오 파니아구아가가 아트리움 무지카에 드 마드리드와 함께 녹음한 앨범 중 오디오파일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앨범들 두 장이 있다. 하나는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발매했던, 그리고 또 하나는 BIS에서 발매한 본 작 다. 각각 스피커스 코너 그리고 오디오노츠 레코딩스에서 재발매 되어 뛰어난 음질을 자랑한다.

1980년 아날로그 레코딩인 는 오리지널 자체도 훌륭하지만 재발매하면서 로버트 폰 바르에 의해 더욱 뛰어난 음질로 재탄생했다. 레복스 A77과 1960년대 디자인의 젠하이저 MKH105 무지향 콘덴서 마이크 두 대 등을 사용한 녹음. 최소의 신호 경로와 최소한의 개입으로 본질적인 음향을 극대화하고 있다.

아마도 최근 클래시컬 녹음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 생생한 아날로그 사운드는 오히려 최신 녹음을 뛰어넘는다. 마드리드 임페리얼 칼리지 예배당 안에서 듣는 듯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홀 톤, 앰비언스가 돋보인다.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친 스페인의 노래 41개가 바람처럼 공간을 감싼다. 원본도 뛰어나지만 다시 리마스터링한 UHQCD 및 엘피라면 더할 나위 없는 앨범이다.


5. 찰스 브러피/캔자스시티 합창단, 피닉스 합창단
〈라흐마니노프 : All-Night Vigil〉

아직도 사운드미러 스튜디오에서 처음 들었던 이 녹음을 기억한다. B&W 800D3를 위시로 브리카스티 파워앰프를 바이앰핑해 SACD 멀티채널로 들었던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의〈철야기도〉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각 성부가 마치 눈앞에서 노래하는 듯 생생했고 특히 베이스 파트는 더없이 깊고 웅장했다. 녹음 현장이 그대로 그려지는 아날로그 녹음의 진수였고 새삼 SACD 포맷에 대한 관심을 재 점화시켰다.

찰스 브러피가 지휘하고 캔자스시티 합창단과 피닉스 합창단이 함께한 이 앨범은 아델이 ‘올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하면서 이슈를 뿌렸던 제 58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합창 연주’부문을 수상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앨범의 녹음을 사운드미러 코리아의 대표 황병준 엔지니어가 진행했다는 사실이다.

위중한 환자와 함께하며 그 영혼을 위로하는〈철야기도〉레코딩엔 합창 단원 수만 해도 오십여 명이 동원되었고 러닝타임이 70여 분에 이르는 대곡. 이 앨범에선 반주 없이 합창 단원의 목소리만을 멀티채널 서라운드로 녹음했다. 무지향 마이크까지 동원해 녹음한 이 앨범의 진수는 SACD, 그중에서도 멀티채널로 듣는 SACD 사운드다. 더불어 찰스 브러피가 지휘한 또 다른 샨도스 레코딩 도 추천하고 싶다.


때론 음반이 좋다.

하이엔드 오디오 산업도 이젠 작건 크건 효율성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빠른 반응 속도와 화려한 UI, 보다 저렴한 가격에 거대한 유저를 거느린 네트워크 스트리밍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아니, 이미 우리 주변을 지배했다. 효율은 거침없이 하이엔드 오디오 시장까지 집어삼키고 있는 와중이다. 하지만 종종 생각한다. 효율보단 느리고 비효율적인 것에 담긴 진실, 저가의 대량 공세보단 고가의 고급스러운 컨텐츠와 피지컬 포맷에 대해서. 우리 사는 세상도 비슷하다. 때론 비효율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때론 불편함과 많은 지출을 감수하게 만든다. 때론 낡아 보이더라도 실체를 가진 것들 안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그것이 아마도 음악의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유독 비싸고 불편할 때만 성큼 다가오는. 그래서 때론 음반이 더 좋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