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nheiser HD800 + Bakoon AMP-11R, 냉정하고 선명하게
"편히 자면서 들을만한 소리는 아니군요."
글.그림 : 루릭 (http://blog.naver.com/luric)
이 청음 후기는 젠하이져의 HD800과 바쿤 AMP-11R 앰프 세트의 감상문입니다. 오디오의 리뷰에는 보통 2가지 분류가 있는데, 하나는 제품을 소유하고 직접 오랫동안 사용해본 사람들의 경험담이고 다른 하나는 제품의 소리를 최소한의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듣고 분석해본 사람의 First Impression입니다. 이번 청음의 방식은 후자에 속합니다. 단 한 시간의 청음만으로 최대한 깊은 디테일을 찾아내어야 하는 일종의 테스트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 방식은 제품의 생활적 측면과 깊은 감상에 대해 서술하기는 어렵지만 오디오 자체의 주된 특성을 파악하는 것에는 유리합니다. 귀와 청신경이 가장 신선한(?) 상태에서 자신의 경험과 편견이 적게 관여된 사운드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많은 분량의 리뷰를 작성할 수는 없으니 간단한 감상문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제대로 된 청음 후기를 쓰려면 아마도 하이파이클럽 사무실로 1주일 정도는 출퇴근을 했어야 할 겁니다.)
저는 지금껏 수많은 이어폰(인이어 헤드폰)을 분석해왔으며 몇 개월전부터 직장 상사분들이 하이엔드급 헤드폰에 빠지는 바람에 몇 가지 제품의 청음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Audez'e LCD-2, Sennheiser HD650, Beyerdynamic T1의 삼총사를 통해 업무에서 집중력이 떨어질 때마다 일종의 청량제를 흡입하고 있지요. 셋다 성향이 전혀 달라서 무척 재미있기도 합니다. 이번에 접하게 된 청음 장소는 조용한 주택가의 중심이며 흡음 처리가 잘된 널찍한 방 안이었습니다. 약간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오픈타입 헤드폰의 소리를 감상하기에 충분히 좋은 청음 환경이며 오디오 청음실 답게 전원과 노이즈 부분의 배려도 잘 되어있더군요. 청음 기간은 오전 10시경부터 1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약 40여분에 걸쳐 CD와 MP3 파일 모두, 그리고 재즈, 락, 클래식, 보컬, 일렉트로닉 장르를 들어본 결과는 HD800이 생각보다 현대적이고 모니터링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한때 클래식 전용이라고 인식되었던 젠하이져의 개성은 이제 올라운드와 모니터링으로 바뀌어야 할 듯 합니다. 또한 매치업된 AMP-11R 역시 빠른 응답을 토대로 한 긴장감있는 사운드를 추구하는 듯하여 HD800의 특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제 개인적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쓴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케익은 즐거운 감각을 주지만, [에스프레소 + 농도 90퍼센트 다크 초콜릿]은 짜릿하면서도 괴로운 경험이 되기 십상이니까요. 몸빵 캐릭터와 지능형 캐릭터가 2인조로 활동하면 뛰어난 영웅 일당이 되지만, 몸빵 캐릭터 둘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피 엔딩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해상도와 디테일은 하이엔드로써는 무난한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앰프와 플레이어, 케이블 등의 영향이 있겠으나, 다른 것보다도 고음역의 높은 부분이 섬세하게 다듬어지지 못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낮은 고음역은 더 바랄 것이 없을만큼 선명합니다만) 그러나 이 부분은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높은 비용이 투입되는 헤드파이 시스템들은 기본적인 해상도, 분리도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주기 마련이지만, 개인 취향과의 궁합 여부나 음악 감상의 감동은 모두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HD800과 AMP-11R의 조합은 어쩌면 차가운 도시 남자 스타일에 매우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 그래프는 제 느낌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만든 것입니다.
어떤 소리를 상상하고 있는지 감만 잡아주시면 되겠습니다."
고.중.저음의 비중은 거의 플랫에 근접하고 있으며 음색 또한 무색무취라고 해도 좋을만큼 중립적입니다. 이어리시버의 소리는 은근히 제품 자체의 디자인과 많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데 HD800의 금속 덩어리 같은 디자인 역시 소리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빈티지, 아날로그 같은 키워드와는 전혀 연결시킬 수 없는 냉정함이 그것입니다.
사운드에서 뭔가 따뜻함이나 아름다움을 위한 착색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고음역은 분명 높은 부분도 재생되고 있으나 대체로 낮은 부분에 비중이 실려있는 듯 합니다. 이런 세팅은 현란하고 밝다는 느낌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기에 좋습니다. 사람이 귀에서 직관적으로 '고음이다!'라고 느낄만한 부분에만 약간의 포인트가 있군요. 또한 음의 비중에서 고음역의 양이 많게 느껴지므로 다른 소리보다도 맑고 선명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유리하다고 봅니다.
중저음역은 생각보다 단단하게 뭉쳐있어 소리에서 지속적인 긴장감이 이어집니다. 음악을 들으며 조금이라도 디테일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빠른 응답으로 일관합니다. 덕분에 편안하고 따뜻한 음악 감상은 어려워보입니다. 굳이 장르 매칭을 찍는다면 클래식보다 오히려 차가운 일렉트로닉에 어울리는 성향이군요. 저음역 부스트가 아주 미세하게 있는 정도로써 든든한 감각이 있으나 풍성한 감은 줄어드는 편입니다. 이 부분은 헤드폰 케이블의 교체를 통해 조금이나마 변화를 노려볼 수 있겠습니다.
저음역의 울림은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응답이 아주 빠른 것도 아니요, 깊고 부드러운 느낌도 아니라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립]이라는 것은 이런 면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HD800과 AMP-11R의 조합은 음악을 객관적으로 대하게 만드는 저음역을 추구합니다. 짧게 끊어지는 숏텀 베이스에 유리하며 비교적 강한 타격감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군요. 빠른 템포의 곡이나 타격감을 중시하는 락 음악에서 좋은 면을 보여줄 듯 합니다.
응답 속도에 대해 더 깊이 풀어보자면, 중저음의 응답은 상당히 빠르거나 중립적인 수준으로 보이지만, 고음역의 응답은 약간 느리게 느껴집니다. 소리에서 전체적으로 잔향감이 다소 존재하나 그것은 대부분 낮은 고음역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이 특징 덕분에 재즈에서는 드럼의 하이햇 심벌즈 파트의 찰랑거리는 음이 시원하게 번집니다. 베토벤 9번 4악장을 들을 때도 관악기, 심벌즈의 음이 터질때마다 청량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제품은 사실상 스튜디오에서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응답 특성이 좋으며 고음부터 중음까지 연결되어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을 줍니다. 덕분에 스테이지의 넓이는 약간 좁게 표현되나 오픈타입 특유의 널찍한 개방감은 그대로입니다.
이러한 청음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HD800과 AMP-11R 세트의 소리 판단 기준은 음악에서 발생하는 고음역의 잔재까지 모두 재생하는 것과 적당히 다듬어주는 것의 차이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HD800과 AMP-11R은 소리를 타협없이 모두 재생하는 쪽입니다. 자동차의 서스펜션에 비유한다면 최대한 하드하게 세팅한 것과 같습니다. 서스펜션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롤링이 줄어들고 정밀한 코너링이 가능하지만 승차감은 매우 나빠질 것입니다. 소리에서 감정과 따뜻함을 제거한 결과는 뛰어난 사운드 분석 능력으로 이어졌지만 편안한 음악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반대로 짧고 굵은 여행에서는 이만한 물건도 드물겠습니다. 경쾌하고 정밀하며 시원한 코너링을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 플랫한 고.중.저음역의 비중을 추구하며 냉정하고 선명한 소리를 원한다면 청음해보셔도 좋겠습니다. 반면 현란하고 아름다운 느낌의 소리, 따뜻하고 나긋한 음색을 원하신다면 다른 구성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