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6
마누라와의 유럽여행이 4월15일
날로 정해져 있다.
33년, 짧지 않은 동고 동락의 세월
속에 함께 물 건너 가는 일은
처음인데 시국이 하수상하다. 북쪽의 망나니들이 오늘은 또 무슨
망동을
저지르고선 똥 싼 놈이 성내는 꼴을 연출할 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요즘이다.
내 나이 60, 숨 쉬고 산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늘 머리 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두통거리 하나를 이고 살아 온 게 무슨 원죄 때문인지
한숨만 나온다. 세상 일이 돌아
가는 이치를 채 깨닫기도 전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골치거리가 아니면 성가심을 유발하는 고약한 존재이다가,
내
인생의 늙으막 지금에 이르러서는 숫제 함께 죽자고 자해공갈을
해대니 악연도 참으로 질긴 악연이다. 그냥
남쪽 땅덩이 뚝 떼어서
저기 태평양 한 가운데 공해상에 끌어다 놓고 우리끼리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병3년에 효자 없다는데, 하물며 지 잘못은 생각 않고
맨날 가족사는 초가삼간
집구석 불 태울 생각만 하는 정 없고 집안
애물단지 노릇 반세기 넘은 형제간 뭐가 그리울까 보냐.
대륙의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충수처럼 붙은 이 땅은 살기에 참 척박하고
마음 놓기엔 많이 모질다. 식민사관이라 치부하지 말고 자화상을
그려보자. 자칭 5천년 역사상 남의 주머니에선 쌀 한 톨 털어 본 적이
없는 착한 민족이란 평가 혹은 역사 뒤에 숨은 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구가 적고 물산이 부족한 탓에 축적된 부와 힘이 없어 가까스로 겨우
연명해 온 구차한 역량의
반증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공동체가
정의롭고
이타적 가치이념을 지녀서가 아니라 동네에서 제일 형편이 어렵고
패밀리의 규모가 작았던 탓에 맨날 얻어 맞고, 주린 배 부여잡고서도 그냥
대갓집 담벼락에 기운 없이 기대 쪼그리고 앉아 눈물 찔찔 짠 세월이라고
말하는 게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건강한 사고일 것이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 어쩌다 겨우 조금 주린 배 채울 만
해 진 게 엊그젠데 어릴 때부터
공부 안 하고 사고 치면서 엇나간 피붙이 하나가 시도 때도 없이 집구석에
들어 와 쌀 퍼가고 문짝 부숴대니, 그나마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어
모은 구차한 살림 세간 마저 날리게 생겼고 옆집에 얼굴들 수 도
없게
창피한 꼴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첨엔 막대기 휘두르는 정도이더니
이젠 숫제 기름통과 성냥 들고 설치는 꼴이니 참 하늘도 무심하시다.
남북의 관계를 인체의 골칫거리에 비유하자면, 치주염과 비슷하다.
한번 염증 생긴 잇몸은 치조골을 녹이고 따라서 치아가 밀려 올라
감으로써 잇몸과 이의 결합도가 낮아져 사이에 음식물찌꺼기가 끼는 데
양치질을 아주 정교히 하지 않으면-평소 이를 예방할 수 있을 정도로
꼼꼼히 칫솔질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염증이 생기고 다시
또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 간다. 끝내 치아는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게
되고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는 고초를 겪거나, 인공치아에 의존하는
만만치 않은
비용을 각오해야 된다. 대개의 경우는, 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섬찟한 느낌의 예리한 기구, 뼈를 갈아 내는 듯한 굉음으로부터의 공포를
회피하거나, 평소 약간의 통증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만용과 무지의
혹독한 대가이다. 퉁퉁
부은 볼을 원래대로 돌려 놓자면, 잇몸에 마취제바늘
찌를 때의 따끔함은 물론이고, 치석을 긁어내는 마찰음과 두개골을
울려대는 진동의 공포와 상당기간 통증을 참아내야 한다.
작은 딸 아이가 세상에 나온 날이 1983년 8월12일이다.
내가 예비군복을 입고, 공습사이렌과 텔레비전에서 실제상황임을
다급히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자막에 잠시 망연자실하다
예비군훈련의 학습된 바에 따라 용약 동사무소로 달려 나간 게 그 며칠 전이니
그 날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진 못해도 8월 8-9일 경이었을 것이다.
지금 30년이 지나 그게 중국 민항기였는지 귀순자 이웅평이 몰던
전투기인지
헷갈리지만, 하여튼 휴전선을 넘어 오는 항공기 때문에 난리법석이 난 것이었다.
출산을
앞두고 내자와 세 살 짜리 큰애는 처가에 가 있는 때여서,
점심 무렵 홀로 군만두 하나 시켜 놓고 텔레비젼
앞에 앉아 동대문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당시 최고 인기의 고교야구경기를 보고 있을 때 였는데
갑자기 공습경보로 교육받은 사이렌소리와 함께 야구중계가
중단되는
순간, 머릿속을 강타한 것은 전쟁이 나면 애를 어떻게 낳나?
하는 순간적
전율과 동원예비군으로서 싸우러 가야 한다는 절박한 긴장감이었다.
나는 사병복무
기간 33개월 15일의2/3이상을 육군중장의 사무실당번으로
보냈고 국방부 합참본부 행정병으로 1978년 제대한
사람이다. 장군을
모시는 비서사병으로서 나름 장교에 못지 않은 투철한 사생관 속에
군복무를 마쳤고, 그 즈음에도 여전히 국가의 방위에 한 몸 바치는 것은
이 땅에 태어난 남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기는
정의감에 충만한
시절이었다. 예비군복을 황급히 갈아 입고, 동사무소로
뛰어 가는 중에
동네 세탁소 아주머니의 상황해제 전언에 참으로 인생에 두 번 경험하기
어려운 안도를 느끼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 왔지만, 그 때의 트라우마가
지금도 완전히 씻기지 않은 가운데 전전긍긍하고 있는 요즘이다.
또 하나, 때는 76년 8월18일 그날로 기억의 실개천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입대를 75년 12월8일에 했으니 약 8개월이 지난 시점인데, 장군당번이
되기 직전에 군단사령부 인사처에 근무하던 시절이었고, 25일간의
첫 휴가가
한달 남짓 남은 때여서 복무지인 경기도 포천에서 극과 극인 부산의 집에
가는 게 정기휴가 외엔 어림없던 그 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그 날을
기다리던 어느 날, 망나니들이 저지른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졌다.
비상이 걸리고 내무반 포기와 진지투입이 실행됐다. 미국의 항모가
들어오고 북폭과 전면전이 임박한 상황인 것이 지금과 비슷했을려나?..
그 바람에 내 천금 같은 휴가는 2개월이 늦어 졌고, 다음 해 전방GOP
부대 실습 때 현지부대 기간사병의 말을 빌면 이젠 다 죽었다 하고 유서를 썼다던가…
천안함 폭침에도, 연평도 피폭에도 그 때만큼 놀라지 않게 된 건,
다행인가 불행인가. 고귀한 생명들이 아무런 귀책사유 없이 유명을
달리 한 엄연한 사실을 놓고도 자중지란에 빠진 이 사회가 어떤 대가를
치를지 두렵고, 우리에겐 잃을
것이 너무 많아 내 살을 베어 주고라도
망나니의 뼈를 꺾을 용기가 생기지 않고 이 명제가 당위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자문에 무력감과 자괴감이
엄습한다. 곪은 건 짜 내든지
외과수술로 제거해야 한다. 우리
몸에 생긴 고약한 종기를 아프다고
방치하면 패혈증으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여리박빙 如履薄氷 이란
말이 있다. 지난 대선 선거운동기간 막바지에 반으로 잘려 ‘박빙’으로
많이 인용된 말의 온전한 모습이다. ‘살얼음을 밟는 것과 같다’는
형국은 지금 이상의 걸맞는 현실 상황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차세계대전 전 스위스의 담대함이 다시금 가슴을 울린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당이 조선에 대하여 침략을
일으킬 명분으로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빌려 달라고 했던 예처럼,
나치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면서 정지작업으로 스위스에 대하여
동맹할 것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으면 20만 대군을 동원해 점령하겠다는
협박을 하자 국민개병제의 스위스는 코웃음을 쳤다던가.
‘쳐들어 오려면 와 보라! 총알20만 발만 있으면 너희는 전멸이다.
다행이 우리에겐 그 보다 훨씬 많은 탄약이 비축돼
있다!!’ 스위스가
각축의 중심인 그 위치에서 이태리,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 등의
열강들에 굴하지 않은 건 알프스의 산악지형 덕만
본 게 아니란 걸
우리는 몰라서 이 모양일까.
정신차려야 산다. 굳이 서부극의 허황된 설정을 채용하지 않더라도,
황야의 선량한 주민들이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 도적떼의 횡포에
맨날
얻어맞고 굴종할 것이 아니라, 희생이 있더라도 자위적 역량을
길러야 하고 지금 당장 형편이 안되면 외지에서
보안관을 스카웃해서라도
내 동네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할말 하고 살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울타리를
지켜 내려면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나이 60이고,
무기를 만져 본 경험이라고는 근 40년전 그 시절 고철에 가까운
엠원과
카빈총 밖에 없지만 아직도 방아쇠를 당길 줄은 안다. 영점이 비록
잡히지 않아도 적에게 위협은
될 것이다. 까짓 유럽여행이야 상황에
따라 못 가면 그만이지만, 나라
지키는 일에 나이가 문제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