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일기.17
오랜만에 뒷산을 올라 성지곡 어린이공원을 거쳐 내려 오는데,
5월의
푸르름에 더해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내내 귀를
간질인다. 화창한 어린이날이다. 집을 나서기 전, 바깥 기온을
가늠치 못해 내자나 나나 모두 춘추용
아웃도어 복장을 했더니
집 뒷편 경사로에 접어 들자마자 초여름 같은 따가운 햇볕에
견디지 못하고 반소매 차림으로 걷어 붙이고 두 시간을 걸어
집에
돌아 왔다. 이런 저런 일로, 근 한 달만의 산책이다.
지난 달 15일, 12시간의
비행 끝에 빠리에 내려 네 나라를
맹인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으로 훑고 런던에서 떠나 온 유럽은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공통분모 이외에, 23년전 호주를
처음 들렀던 때의 문화적 충격에 비하면 이웃동네 들른 것처럼
익숙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 왔고
스쳐 지나가는 코쟁이,
까만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도 낯 설지 아니한 것이 내가 이미
지구촌의 일원으로
훌륭히 녹아 섞여 살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내자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로 눌러 댄 셔터로 나의 애장품인
소니 넥스7 미러리스
카메라가 불이 나는 가운데, 그 사람들이
살아 왔고 지금 사는 모습을32기가바이트 메모리 가득..그 것도
나중엔 사이즈를 줄여가면서 5천여장의 스틸컷으로 바꾸어
돌아 왔는데, 길안내자 따라 어찌나 바쁘게
돌아 다녔던지
사진을 정리하면서 그 현장이 기억나지 않는 장면도 상당수라..
부득이 하지만 그 한심한
주마간산에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다만, 중간에 고장 나지
않고 귀국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잘 버텨 준 사진기가 대견할 뿐이다.
열흘 동안, 이 지지고 볶는 좁은 땅의 소식과는 완전히
절연된 가운데, 책에서 혹은 영상물을 통해서 접했던 8시간쯤
우리보다 늦게 사는
세상에 이방인 혹은 물 위에 겉도는
기름방울 같은 존재로 시간을 보내면서, 오래 전에 잊어 먹어
이제는
참으로 생경할 뿐인 영어 몇 마디 써 먹기도 했는데,
나중엔 겨우 몇 마디 하는 영어로 자유여행을 기도할
용기가
생기는 걸 보면 일단 나가보는 게 답인 것 같기도 해 웃고 만다.
풍광과 시설물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네들의 수준을 보면
우리가 갈 길이 멀다.
예전 힘든 일이 있을 때 자고 나면 마음이 편해 진 적이 많았는데
지워진 메모리처럼 잠시 백지가 되어 돌아 온
내 나라는
북쪽 양아치들의 준동이 잠잠해 진 것 말고는 별로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있다면 짧은 기간
수면 시간대가 두 번이나 변하고 나니
몸이 영 개운치 못하고 흐물흐물한 것이 꽤 먹은 나이에 수평 방향으로
멀리 놀러 다니는 일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 앞에
고소를 머금는다.
해가 갈수록 많이 생기는 손등의 잔주름이 옛날 남자 손으론
드물게 하얗고 동료들 사이에서 섬섬옥수라 불리던 내
손에
관한 기억이 혹 착오가 아닐까 하는 의문의 단초를 제공하는
가운데 시간은 참 인정머리가 없다. 읽고
쓰고 듣고 뜯고 조금
나 다닌 거 외에 무위도식의 나날이 무려 벌써 120일, 올 해도
1/3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건강을 챙길까? 아니면, 내면의
나를 찾을까? 즐겁게 놀까? 세상을 구할까? 등등의 몽상 속에서
갈팡질팡 횡보와 허언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몸은
찌뿌듯하고
정신은 흐리멍덩하다.,
게으르면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은 심리는 어릴적 교육의 영향이겠지만,
아직
조직생활의 기름이 다 빠지지 않아서인지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까지는 아니라도 썩 그리 편하지 못하다. 더구나,
난삽한 정신은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생각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운동을 생각한다.
현재의 일과 상황에 몰입하는 것이 바로 '도'임을
선현들이 누누히 일러 주지 않았는가. 몸을
추스리고 마음을
다듬는 일이 쉽지 않다.
지난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아 고통을 겪은 적은 별로 없었다.
언제나 잠은 부족했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내겐 누릴
기회가
오면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이었는데, 지난
며칠 새벽 두 시가 되고 세 시가 되어도 말똥말똥해
지는 정신
때문에 힘들었다. 불면은 거의 동틀 무렵 가까스로 얕은 잠이
들고서야 끝이 나는데 그 얕은
개울 같은 선잠에는 깨어난 후 꼭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개꿈으로 점철된 느낌이어서 늦은 아침의
기상이 쉽지 않다.
내자의 진단으로는 시차로 흐트러진 몸시계와
확 떨어진 육신의 가동률이 원인일 거란다. 듣고
보니 꽤 그럴싸하다.
그래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다리를 이끌고 아침에 산행을
나선 게다. 동물은 역시 몸을 움직여야 하나보다.
서재 책상 위에, 종이 책이 네 권,
그리고 전자책 리더가 하나
놓여 있다. ‘건축예술’, ‘집짓기
바이블’, ‘진짜 기본요리’ 그리고
‘총,균,쇠’가 종이 책이고 와이파이가 되는 전자책에는
천 수백 페이지에 달해 인내심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자본주의의 매력’이라는 책 외 약200권의 생활총서가 들어 있다.
하루에 백 페이지를 읽어도 석 달은 족히 걸릴 분량이다. 서가엔
다시 읽고 싶거나, 예전 제대로 씹어 먹지 못하고 혀 끝만
대어
다시 뒤적여야 할 책도 수십 권이다. 책 읽기를 벗 삼은 지 어언
45년이다. 중학교 2학년
시절 학교 도서관의 자연과학 서적을
죄다 섭렵한 이래, 내 손을 거쳐간 서적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아는 것도 없고 꿰뚫는 건 더 없다.
몇 행을 눈이 훑으면 단기기억상실증처럼 금방 기억에서
사라진다.
눈이 행간을 주행하는 가운데에도 생각은 딴 데 가 있다.
몰두하지
못하는 건 내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일 테다. 마음이
산란한 건 정보가 많아서 인가?
방문을 닫고 음악도 꺼 버리고, 아무런 딴 짓도 하지 아니하고
책에만
집중해야겠다. 결국, 답은 책 속에 있지 않을까? 물음이
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할 거리는 많은데, 손에 잡히지 않는
요즘이다. 나는 의식 못하지만, 갔다 온 먼 동네의 기억 때문일까?
